매거진 문장 도둑

종점이란 말이 좋아요

- 이도우,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중에서

by hearida

"난 종점이란 말이 좋아요. 몇 년 전에 버스 종점 동네에서 산 적도 있었는데, 누가 물어보면 '157번 종점에 살아요' 그렇게 대답했죠."


"종점? 막다른 곳까지 가보자, 이런 거?"


"아니, 그런 것보다는... 그냥 맘 편한 느낌. 막차 버스에서 졸아도 안심이 되고, 맘 놓고 있어도 정류장 놓칠 걱정 없이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는... 그런 느낌이요."


- 이도우,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중에서



오래전 이맘때,

참 많이도 좋아하던 누군가를 만나러 '00동 버스 종점'을 찾아가곤 했어요.

그때는 그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만나러 가기까지의 그 설렘이 참 좋아서

버스 종점으로 이어지는 길이 오래도록,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 길만큼 그 친구를 생각하며 두근거리고 싶었거든요.

종점 정류장에서 기다릴 그 사람 모습을 떠올리면 늘 마음이 벅찼어요.


하지만 종점이길 바랬던 그 사람은 종점이 아니었고,

그가 떠나던 날엔 참 많이 울고 참 많이 아파했어요.

늦게 시작한 첫사랑이었거든요.


그 후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헤어지는, 그런 일들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어요.

하나의 사랑이 다음 정류장을 향해 떠나버리면

뿌연 먼지 속에 다시 홀로 남았어요.

둘 곳 없는 마음이 소용돌이치다 길을 잃어 헤매고

결국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때면

자주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달리곤 했어요.

수많은 풍경을 창밖으로 스쳐보내며

누군지도 모를 누군가를 그리고 그려보고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사랑이 왜 이리 힘든 건지

나만 이렇게 상처 받아야 하는지

이 모든 물음의 답이 다 제 탓인 것만 같아 아주 긴 시간 괴로워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정말 기적처럼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지나쳐버릴까 봐 마음 졸이거나 잘못 타서 내려야 하지 않는

익숙한 우리 동네 버스 종점 같은 사람.


그 사람을 만난 후

저는 그제야 드디어 제가 원하던 사람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어요.

화장대가 가벼워진 대신 책장은 더 풍성해졌고

높은 힐에서 내려온 대신 더 높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제가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진심 따윈 없기 때문에

평생 진정한 사랑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모든 마음을 다 놓아버린 그 순간에

기적처럼 종점으로 향하는 버스가 저를 향해 달려온 거예요.


상처가 너무 아파

혹은 외로움이 너무 깊어

마음을 닫고 홀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아요.

하지만 그래도 감히 사랑은 있다고,

당신의 사랑은 꼭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당신을 태워 종점까지 향할 단 하나의 버스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향해 열심히 열심히 달려오는 중이라고요.


그러니 부디,

자신을 탓하며 다가오는 이들을 밀어내지 마시길.

당신은 아직 길 한가운데 있고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뿐,

다만 그뿐이니까요.


기다리는 동안 그저 있는 힘껏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줬으면 해요.

내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줬으면 해요.

그래서 언젠가 단 하나의 사랑이 당신 앞에 서는 날

주저함 없이 그 사랑에 올라탈 수 있도록.


당신의 모든 상처가 빛이 되어

종점에 도착한 사랑을 환히 비추길

그리하여 오래도록 반짝반짝 빛나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Budapest, Hungary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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