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가을의 물결이, 당신의 마음에 곱게 닿기를

-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중에서

by hearida

"나는 내 속 단어장에서 '추파'라는 낱말을 꺼내 만져보았다. 가을 추, 물결파. 가을 물결. '예쁘구나, 너. 예쁜 단어였구나······' 그런데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내는 눈빛을 추파라고 하다니, 하고많은 말 중에 왜? 그러자 곧 그런 것도 모르는는 듯 바람이 나를 보고 속삭였다. '가을 다음엔 바로 겨울이니까.' 불모와 가사(假死)의 계절이 코앞이니까, 가을이야말로 추파가 다급 해지는 시절이라고······ 귓가를 뱅뱅 돈 뒤 사라졌다. 나는 오래전 추파를 추파라 부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만 웃었다. '아! 만권의 책을 읽어도, 천수의 삶을 누려도, 인간이 끝끝내 멈출 수 없는 것이 추파겠구나' 싶어 흐뭇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 세상이 무탈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중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에는

단어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데요.


며칠 전에 다시 꺼내어 읽다 보니

'추파'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왠지 추파, 하면

꼴불견스럽고 기분 나쁘고

건들거리며 이성에게 치근덕거리는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었거든요.


뭐랄까,

동화 속 마녀가 변한 '노파'나

전쟁에서 적을 '격파'하는 것처럼


추파-

어감이 좋은 단어는 아니었어요.

두고두고 입에 넣고 굴려서 풍선껌처럼 예쁘게 부풀려 꺼내는

그런 말은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추파秋波.


주인공 아름이의 말처럼

예뻐요, 참 예쁜 단어였네요.

가을 물결이었네요.


불모와 가사의 계절,

모든 것이 마르고 얼어붙어 죽은 듯 가라앉는 시간을 앞두고

함께 몸을 녹일 누군가를 향해 물결치는 것.


추파란,

이리도 아름다운 몸짓이었네요.


계절이 변해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는 한

가을의 물결은 멈출 수 없는 것이겠지요.


곧 있으면 발을 동동 구를 만큼

매서운 추위가 올 것을 알면서도


아직 창문을 열면

기분 좋은 초가을 바람에

이 날들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분명

찬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치고 살얼음이 끼는

그런 겨울이 올 거예요.


그러니 우리,

열심히 월동 준비를 해봐요.


어떤 추위가 와도 끄떡없도록

서로의 온기를 향해

끝없는 가을의 물결을 만들어봐요.


부디,

가을의 물결이 당신에게 닿아

바람에 춤추는 갈대처럼

당신 마음도 한없는 기쁨으로 춤추기를.


가을의 물결이 퍼지는 곳마다

행복이 담뿍,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행복하세요, 오늘도. :)





Assisi, Italy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keyword
hearida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팔로워 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