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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Sep 27. 2016

첫 만남_Ⅰ

그의 택시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유유, 내년에 서른이지?"

"응."

"그럼......."

"......??"

"서른 되는 기념으로 나랑 결혼하자!"

"......"

"하-, 삼백 번째로 프러포즈를 거절당하는구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

"그런 거 아닌 기념으로 나랑 결혼할래?"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그래, 하자!"




유유와 만난 지는 3년 정도 됐는데요.

그 사이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프러포즈 폭격을 엄청나게 했거든요.

그리고 올해 초 드디어!

유유가 결심을 했습니다.

해주었습니다, 가 맞는 건가요? 흠......


언뜻 보면 거의 반강제로 조르는 것 같은데 말이죠.

하지만 그건......

음.......

네.

조른 거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크흡.


그런데 저희,

처음 만나 시작할 때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3년 전에도 여전히 진중했던 유유와

3년이 지난 후에도 대책 없이 무대뽀인 저.

잠시 저희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려 합니다.




2013년 12월 15일 불타는 금요일의 밤.

금요일의 화염으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이태원.

오후 9시 카페 'ANDO'에서 저희는 처음 만났어요.


첫 만남은

카페 옆자리에 앉았는데 우연히 시선이 맞닿아서......

커피를 들고 오다 그만 부딪혀서......

이랬으면 참 로맨틱했을 텐데.

이런 드라마 같은 한 장면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친구가 많지 않은 편인데, 그 몇 안 되는 인연 중에 굉장히 에너제틱한 친구가 있어요.

이 친한 친구가 종종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재밌는 일들을 벌이곤 하거든요.

타고난 집순이인 데다 부지런하지도 않은 저는, 일을 벌이기는커녕 친구가 하는 이벤트에 얼굴 비치는 것도 겨우겨우 하는 정도였는데요.

이 친구가 이번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맞아, 외로운 솔로들을 위한 파티를 생각했더라고요.

아무나 갈 수 있는 건 아니고,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 솔로인 사람들만 초대한 거죠.


원래 몸이 굼뜨고 게을러서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 외에는 잘 안 가는데요.

12월인 데다 금요일이었잖아요.

밖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요.

보름만 지나면 또 한 살 먹어서 서른셋이 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얼마 남지 않은 서른둘을 즐겨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파티를 가기 싫지만 한 번 가보겠다, 생각한 것처럼 썼지만요.

온 힘을 다해 엄청 무지막지 꾸미고 치장하고 찍고 바르고 갔답니다.

계절을 잊은 채 헐벗고 가서 추웠던 건 안 비밀, 그래도 오징어인 건 비밀!이에요.


파티에 들어서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벗어나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데 유유가 다가와

'성함이......'

그럼 제가 어멋, 하며 사랑이 시작......


그런 거 아닙니다.


저를 초대한 친구와 유유가 친한 사이여서 파티 시작 전에 서로 소개를 해줬어요.

유유는 친구 둘과, 저는 아는 동생과 함께여서 다 같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됐죠.

그래서 가볍게 얘기를 나누게 됐는데요.

유유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저도 이 사람이다, 느낌이 팍! 와서......


이런 것도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얘기 나누다가 파티 시작하자마자 저희 다 제 갈 길을 갔어요.

저는 파티에서 다른 남자분과 파트너였고요.

(두고두고 이 일로 유유에게 고통받는 헤아입니다)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 흩어져 재밌게 놀았어요.

하지만!

술이 약한 유유는 파티 시작 전에 조금 마셨던 술 덕에 구석에서 내내 잠만 잤답니다.

그리고 파티는 그렇게 끝이 났지요.


여기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면 아마 다시 볼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초대한 친구가 저희 양쪽 모두에게 간단히 치맥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상한 파티와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통닭집으로 향했어요.

뭐, 여기서도 그냥 재밌게 얘기하고 맛있게 치킨 먹고 기분 좋게 술도 한 잔 하고 그 정도였어요.


그러다 어느새 시간이 늦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어요.

기분 좋게 밖으로 나왔는데 눈이 펑펑 오더라고요.


지하철은 이미 끊겼고 집에 가려면 택시를 타야 했어요.

하지만 금요일 늦은 밤의 이태원.

거기에 눈까지 내리니 어디 택시가 잡히나요.

다 같이 한참을 서서 기다리다, 자리를 옮겨봐도 빈 택시가 없더라고요.

춥기도 춥고 피곤도 하고.

이거 어떻게 집에 가나,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유유가 갑자기 저를 잡아끌어 택시에 태웠어요.

그다음엔 유유도 따라 타더라고요.

그렇게 택시는 출발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여기서 제가 그만 반해버렸네요.


박력?

아니요.

매너?

아닙니다.


그 택시가 글쎄......

.

.

.

.

.

.


모범택시였거든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태워주신 이후로, 어른 돼서는 처음 타봤어요.

이 남자, 나를 걱정하는구나.

안 보는 척하더니 날 보고 있었구나.

세상에, 모범택시까지 태워서 집에 바래다주다니.

아, 눈물이!!!!


그렇게

모범택시 한 대가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나중에야 확인한 바,

당시 유유는 너무 추웠대요.

그래서 이 누님(!)을 어서 보내버리고(!) 집에 가고 싶었다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택시와 모범택시의 차이를 잘 몰랐다고 합니다 고 합니다 고 합니다하하하하하흐어어어.





2013.09.15. 처음 만난 날의 유유와 헤아.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오늘의 우리를 상상도 못하던 때.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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