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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Sep 28. 2016

첫 만남_Ⅱ

내가 널 찜한 것을 세상에 너만 모르게 하라

모범택시의 진실(첫 만남_Ⅰ에 나오는)도 모른 채 뒷좌석에서 심장이 퉁탕퉁탕!

혼자 마시는 김칫국은 왜 이리 달디달던지요. 크흡.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는 저에게 연락처를 물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참 쉽고 빠르게 11자리 번호를 저는 랩처럼 외쳤어요.

연락하겠다는 유유의 말에 발그레해지는 볼을 숨기지도 못했네요.

아, 이 습자지처럼 가벼운 헤아여.


택시는 야속하게도 마하의 속도로 달려 어느새 저희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한밤, 아무도 없는 빈 거리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죠.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를 걸으니 발자국과 함께 걸음마다 눈의 소리가 들렸어요.

유유와 저는 그저 조용히 저희 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뽀독뽀독 뽀독뽀독 뽀드드득.

눈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어요.

그리고 저는 괜스레 부끄러워 뽀얗게 쌓인 눈만 바라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늘에서 저를 위해 족보에도 없는 조신함을 잠시 내려주신 듯.......

감사합니다!!


드디어 아파트 앞에 도착!

헤어질 시간이 됐습니다.

저는 단전 가장 아래 깊숙한 어느 곳에 티클보다 못한 크기로 존재한다는, 전설로만 들릴 뿐 한 번도 현실에서 발현되지 못했던 귀여움이란 놈을 꺼내 장착하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어요.

그런 저를 본 유유의 눈이 잠시 흔들렸던 것도 같아요.

본능적으로.

무서웠나 봐요.


"데려다줘서 고마워."

"아니야, 뭘."

"그럼...... 나 들어갈게."

"응. 잘 가."

"어, ㄴㅓㄷ......"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뒤돌아 성큼성큼 저만치 가버린 유유였습니다.

그 날은 너무 추웠다네요.

추웠대요.




그렇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엄청 설레더라고요.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어요.

혼자 괜히 볼이 빨개지면서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왔어요.

심장 언저리가 간질거리는 그런 기분이요.


침대에서 혼자 앞구르기 뒷구르기 하며 오두방정을 떠는데, 가방이 부르르 떨리더라고요.

놀라 가방을 여러 보니 카톡이 마구 울리고 있었습니다.

모범택시와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린 저희 둘을 두고 친구랑 동생이 카톡을 마구 보낸 거예요.

어머, 웬일이냐. 둘이 어떻게 된 거냐. 너 지금 어디냐.

질문 폭탄을 담은 카톡은 제 앞에서 마구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차게 핸드폰을 들어 올렸어요.

그리고 카톡 창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 유유가 좋아
잘해보겠다!


훗날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유유는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미..... 저리.....?

그래서 그날 집에 갈 때 그렇게 뒷골이 서늘했나 보다고.


근데 사실 뭐, 제가 모범택시 하나만 가지고 제가 저랬겠어요?

저도 나름 이유가 다 있지요.


이쯤에서 투병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저에게는 병이 있어요.

그것은......

뿔테 안경 쓴 호리호리한 남자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병.

불치병입니다.

약이 없어요.

여기에 유머 코드가 맞으면, 이건 뭐......

아, 이곳이 바로 개미지옥이구나, 하고 드러눕는 수밖에 없어요.


아시겠죠?

아직 이때까지는 유머 코드가 확인이 안 되었지만요.

유유는 당시, 호리호리하고 뿔테 안경을 낀 남자였어요.

네, 당시에는요.

2013년 12월에는 그랬어요.


음...... 지금요?

살이 조금 올랐어요.

약간요.

한...... 15kg 정도?


그래서 이제 호리호리하지 않아요.

그때 그 남자는 이제 없어요.

세상에 없어요.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요즘은 종종 유유의 뱃살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해요.

뱃살이 이래 많을 줄 알았으면 참치로 태어날 걸 그랬다, 그렇지?

라고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진심을 담은 정열의 헤드락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신기한 게요.

더 이상 호리호리하고 뿔테 안경 낀 남자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유유의 뱃살마저 귀여운 걸 보니까요.

콩깍지가 씌었나 봐요.

콩깍지가 아무래도 각막 깊숙이 침투한 모양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콩깍지가 풀 장착된 안구로 잘 살고 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평생 안 빠지면 좋겠어요.


여하튼,

카톡으로 친구에게 신신당부한 한 마디는,


내가 유유를 찜한 것을 세상에 (당분간) 너만 모르게 하라!


2014년 1월 강릉, 아직 호리호리하단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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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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