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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01. 2016

연애의 시작_Ⅰ: 첫 데이트

아리송해 아리송해

모범택시로 집에 데려다준 다음 날.


푹 자고 일어나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리더라고요.

누구지? 하고 보니까 유유였어요.

소파에서 날듯이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며 세 바퀴쯤 돌았어요.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보세용~" 했죠.


그때가 오후 네다섯시쯤 됐는데요.

내일(그러니까 일요일에) 만날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또다시 발을 동동 구르며 다섯 바퀴 돈 다음에 대답했어요.


좋아, 좋아!!


뭐, 밀당이 필요합니까.

저는요, 좋으면 100m 밖에서도 다 티 나는 편이라서요.

또 굳이 그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거든요.

아, 이 쉬운 여자!


어디서 언제 볼 건지 약속을 정해야 하잖아요.

제가 좋다고 하니까 유유가 그랬어요.

지금부터 동창들과 약속이 있다고.

그런데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그 앞에서 핸드폰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요.

집에 들어오면 전화하겠다 하더라고요.


쿨하게 알았어, 하고 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기쁨을 표현하는 아프리카 부족의 춤사위를 거실에서 한판 벌였죠.

이어서 달려오신 이여사님께 등짝을 크게 맞았지만요.

이때는 아픈 줄도 몰랐어요.

아유, 이 푼수!


그런데요.

맙소사!


전화를 하겠다던 유유는 그날 자정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어요.

친구들 만난다는데 전화를 걸 수도 없고 메시지를 남기기도 그렇고......

재촉하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거예요.


혼자 너무 들떠있었나......


술 먹고 취해서 전화를 못하는 건지, 잊어버린 건지 영 모르겠더라고요.

전날 한 번 봤으니까 알아봤자 뭘 알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유유가 빈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굳이 친구들 만나서 연락 못한다고 양해까지 구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괜히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고 잠도 못 자고 있었어요.


그러다가요.

어머나, 세상에!

새벽 두 시가 다 돼서야 전화가 온 거예요.


친구들하고 지금까지 만났대요.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더라고요.

화가 조금 나긴 했는데 얘기하는 걸 들으니 또 스르르- 녹대요.

아무래도

.

.

.

.

.

쉬운 여자. 하-


근데 한편으로 어라- 하기도 했어요.

뭔가, 고단수의 밀당이 아닐까 의심이 들더라고요.


물론 지금에 와서는 제대로 답할 수 있습니다.

정말 친구들하고 있느라 연락을 하지 못한 거예요.

밀당을 안 하는(못하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복잡한 뇌구조를 지니지 못한 유유랍니다. 크흡!


결국 다음날 종로 3가에서 1시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은 참 추웠답니다.

그즈음 눈이 내리고 얼고 또 내리고를 계속 반복한 탓에 길 곳곳에는 얼음덩어리와 눈무덤이 가득했어요.

그리고 저는 추위를 참 많이 타지요.


하지만!

저는 과감히 사랑하는 패딩을 버리고 코트!

네, 코트를 입었습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니트와 스커트를 입었어요.

그나마 부츠를 신고 그 안에 두꺼운 스타킹을 신은 게 다행이었죠.

왜냐고요?

많이 많이 많이 너무도 많이 걸었거든요, 그날.

그렇게 많이 걸을 줄 알았으면 스키복을 입을 걸 그랬어요.


사실 유유를 봤을 때 무던하고 착하게 보였거든요.

전전날에 처음 봤을 때요.

그래서 만나면 무난하게 차 마시고 밥 먹고 얘기 조금 하겠구나 싶었어요.

일부러 기대를 크게 안 했어요.


그런데요.

만나서 카페에 앉아 얘기를 하니까 진짜 웃긴 거예요.

일부러 심리테스트 같은 것도 준비해왔더라고요.

이때까지 저는 아직 입이 안 풀려서 지닌 개그감에 1%도 못쓰고 있었는데요.

다행히 유유는 긴장을 안 해서 그런지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 가더라고요.


아, 여전히 놀림받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날 저희가 밀크티가 맛있다는 카페에 갔어요.

유유는 그냥 밀크티, 저는 라즈베리 밀크티를 시켰거든요.

음료가 다 준비돼서 유유가 가져와 저한테 주더라고요.

그리곤 맛이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 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말했죠.


라즈베리 향이 나는 게 맛도 좋네.


그랬더니 자지러지게 막 웃더라고요.

알고 봤더니 저 놀리려고 음료를 바꿨더라고요.

저한테 그냥 밀크티를 줬던 거예요.


그래요.

저 능력자예요.

그냥 밀크티에서 라즈베리 맛을 느꼈어요.


뭐랄까, 유유는요.

내숭 파괴자, 가식 처단자.

약간 이런 사람에 가까워요.

데이트 첫날부터 완전히 분해된 헤아였습니다.


저희 많이 걸었다고 그랬잖아요.

정말 종일 종로를 걸었어요.

그리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같이 책도 보고, 유유가 책 선물도 해줬어요.

책을 추천해 달래서 얘기했더니 그것도 사더라고요.

음, 그거요?

유유는 아직까지 안 읽었......


교보문고에서 나와 다시 명동까지 걸었어요.

추우니까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콧물도 질질 나는 거예요.

유유가 그런 저를 신기하게 보며 묻더라고요.


안 추워? 왜 그렇게 얇게 입었어?


너 때문에 입었다, 임뫄!

아오!!


어쨌든 그럼에도 신나게 산책을 계속했어요.

명동성당 들어가서 미사도 구경하고요.

저, 명동성당 바로 옆 여고 나왔거든요.

학교 보면서 고등학교  때 얘기도 하고 그랬죠.


밥때가 돼서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어요.

파스타랑 스테이크를 먹었습니다.

명동이 잘 내려다보이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었어요.

음식을 시키고 화장실에 간 유유를 기다리는데 웃음이 나더라고요.

하루 종일 분위기가 정말 좋았거든요.


아, 유유도 나한테 푹 빠졌구나, 싶더라고요.


오늘부터 1일인가, 꺄-!


정말 주책바가지죠?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습니다.


식사가 나왔어요.

유유가 스테이크를 썰어서 제 앞에 놔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우린 나이 차이도 나고, 집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더구나 나는 직장이 천안인 데다 내년부터 편입해서 학교도 다녀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아. 일주일에 한 번 보기도 힘들 수 있어. 거기다  넌 나이도 있으니 결혼도 생각해야 할 테고. 우리가 사귀는 데 고려할 게 참 많네.


응? 이게 무슨 소리?


갑자기 뒤통수를 턱, 하고 맞은 기분이었어요.

스테이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요.

이 사람 뭐지, 싶더라고요.

그럴 거면 오늘 나랑 왜 이렇게 즐겁게 놀았나, 싶은 게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했죠.

그때부터는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어서 대화에 집중도 잘 안되더라고요.


유유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어요.

그리고 제일 친한 친구 강여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유유가 한 말을 전했죠.

그런데 강여사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생각이 깊은 사람이네.


강여사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제 해석대로라면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 같고요.

내가 너무 단순한가 싶기도 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의 생각은 참 알 수가 없네.


속으로 이랬죠, 뭐.

그렇게 대망의 첫 데이트는 아리송한 말과 함께 찜찜하게 끝났답니다.





만난 지 이 년쯤 지나서 이 얘기를 했는데요.

유유는 이 날을 아주아주 즐겁게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날 우리 진짜 재밌게 데이트했잖아.


자기가 그런 말을 했던 건 깨끗이 잊었더군요.

유유 머리 속에 있는 지우개는 참 요물이네요, 요물.

자기 편한 대로 깔끔히 기억이 정리된다니까요.

아무래도 지우개가 아니라 청소기가 들어있는 것 같아요.

흥!



예고: 대망의 1일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연애의 시작_Ⅱ: 결전의 그날' coming soon!!




2016.09.11. 2017년 추석인사 미리 드립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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