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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02. 2016

연애의 시작_Ⅱ: 결전의 그날

삼초만 기다려, 하나아 두울 세엣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홀연히 천안으로 떠난 유유.


제 생각엔 그냥 이대로 끝인 것 같았어요.

나이 차이에, 거리도 멀고, 시간도 없고...

저는 상관없지만 유유에게는 큰 고민거리인 것 같더라고요.

그런 고민을 안고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마음을 접어야겠다, 생각하고 잠이 든 다음날.

월요일이 밝았습니다.


저는 그때 단기 프로젝트 때문에 한정적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는데요.

신기하게 연락이 착실하게 잘 오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 먹고, 저녁에 일 끝나고, 밤에 잘 때.

그걸 보니 또 영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고요.

그렇게 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일주일이 또 흘렀습니다.


다시 찾아온 주말.


그다음 주중에 크리스마스가 있었어요.

유유는 토요일에 서울에 올라와 여동생과 가족 선물을 사러 나왔대요.

혹시 저녁에 만날 수 있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쉽게 좋아! 를 외쳤죠. 아이, 참.


영화를 보자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변호인'을 보기로 했어요.


크리스마스의 열기로 가득한 명동.

지하철역 4번 출구로 나오니 저 멀리서 유유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저는 스커트를 입었어요.

없는 여성미를 한껏 꺼내본 거죠.

하지만!

대신에 두꺼운 외투를 입었지요. 음화핫핫!!

근데 이번엔 별로 안 걸었......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왔더니 어느새 10시가 넘었어요.

명동의 거리는 불빛이 꺼져 있었고요.

저희를 받아줄 식당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굶주린 저희는 절망했고요.


그러다 유유가 제가 떡볶이를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냈어요.

저한테 신당동에 갈까? 하더라고요.

그래서 콜! 했습니다.


저 중학생 때 신당동에 엄청 갔거든요.

그때는요.

그때라 쓰고 20년 전이라 읽......

알바하는 오빠들이 후식으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줬는데요.

예쁜 애들한테는 엄청 많이 줬어요.

저는......

딱 정량을 받았습니다.

모자라지 않은 걸 감사해야죠, 네.


신당동으로 가려는데요.

유유가 지하철 역이 아니라 어느 골목으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뭐지?

떡볶이로 유인해서 내 장기를???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앞에서 뾱뾱- 하고 소리가 났어요.

고개를 드니까 눈 앞에 하얀색 레X가 있었어요.


저 진짜 놀랬잖아요.

저는 유유가 차가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제가 운전면허를 네 번 떨어졌어요.

그래서 아, 나 같은 사람은 운전대를 잡아선 안 되겠다, 이렇게 결심했는데요.

뭐랄까, 그래서 차 생각을 아예 안 한 건지.

그냥 유유가 굉장히 학생 같은 이미지라 운전면허도 없을 거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나 봐요.

근데 차가 있으니까 진짜 신기한 거예요.


거기에 유유 키가 185cm로 엄청 큰데요.

제가 155cm라 제 기준에서 보면 거인이거든요.

얼굴까지 큰 거인(유유 때리지 마).

그런데 귀여운 레X를 보니까 뭔가 언밸런스하게 귀엽더라고요.

그래서 그만 '빵' 터졌죠, 뭐.


그해부터 편입을 해서 일이랑 학업이랑 병행해야 했거든요.

통학을 위해 마련했다 하더라고요.


그리고, 음......

레X인 이유는요.

키가 큰 대신 앉은 키도 커서요.

SUV 같은 게 아니면 과속방지턱 넘을 때 천정에 머리가 닿...... (T^T)

이건 우리만 아는 걸로 하죠. 쉿!


생각도 못한 레X의 등장으로 놀라며 차에 탑승했어요.

그리고 신당동으로 향하려는데 또 한 번 놀라게 되죠.

유유가 불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거든요.


기름이 없다. 중간에 설지도 몰라. 그럼 밀어줘, 알았지?


정말 기름이 없었어요.

둘이서 차가 설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겨우 주유소를 찾았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름을 넣고 다시 출발!

드디어 신당동에 도착합니다.

그리곤 유명하다는 떡볶이 집에 갔어요.


하......

제가 떡볶이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진짜 삼시세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거든요.

근데요.

근데 정말요.

정말로요.

맛이 없더라고요.

진짜 없었어요.


그리고 그날, 저희는 처음으로 욕을 커밍아웃했습니다.


000 18X!!!


진짜 맛없었어요오오옷!!!

아오오!!!


툴툴거리며 떡볶이집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때쯤엔 서로 많이 편해져서 얘기도 많이 하고요.

농담도 하고 웃으면서 갔어요.

그리고 저희 집 근처에 도착해서 내리려는데 유유가 따라 내리대요.

집까지 바래다주는 건가, 했어요.

그동안 집까지 누가 바래다준 적이 없어서요.

감사함에 삼보일배라도...... 하는데 유유가 말했어요.


근처에서 술 한잔 할래?


뭐, 저야 술이면 언제든 마다하지 않죠.

이거 자랑일까요?

그런데 유유는 술이 센 편이 아니라 의외였어요.

마침 근처에 단골집이 있어서 같이 갔어요.

가볍게 술 한잔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어요.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요.


그런데 유유가 갑자기 자기 이상형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자기는 느낌이 와야 한다나 어쩐다나.


자, 여러분!

이쯤 해서 한 번 상상해보세요.


여러분은 서른두 살의 솔로입니다.

지금 썸 비스무리한 걸 타는 이성이 앞에 있고요.

12시가 넘어 데이트 같은 걸 하고 집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성이 술을 한잔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자기 이상형에 대해 얘기를 하죠.

느낌이 와야 한다고.

그럼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느낌이 온다고 안 온다고?

내가 이상형이라고 아니라고?

내가 좋다고 아니라고?

뭐냐고?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고!!!!


식탁을 내려다보며 혼자 옹알이하듯 얘기하는 유유.

그런 유유를 저는 물끄러미 바라봤어요.

이러다 제가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오늘이 또 지나갈 것 같았죠.

그럼 또!

그 일주일을 이게 뭔가, 하면서 보내야 하잖아요.


아오, 저는요.

복잡한 건 싫어요.

특히 사람 마음이라는 게요.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중간은 없잖아요.

자기가 누구보다 잘 아는 건데 말을 못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승부를 내기로 했습니다.


유유


제가 불렀어요.


응.


유유가 대답했습니다.


.
.
.
.
.
.
나랑 연애하고 싶어?


그리고 유유는


......(정적)


그때의 시간은 멈춘 듯했고요.

유유는 누가 '얼음'한 것처럼 그대로 굳었고요.

저는 유유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요.


한참 있다(라고 해도 한 5초쯤?) 유유가 대답했어요.


응.


오예!

그렇죠, 이거죠.

이 대답이면 충분하죠.

캬-!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3초만 기다려. 하나아~ 두울~ 세엣~.
그래, 내가 만나줄게. 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유유는 저를 약간 미친 X처럼 쳐다봤지만요.

제가 생각해도 좀 또라이 같지만요.

이제와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이제 유유는 제 남자가 됐는데요.

그거면 됐죠. ㅎㅎ


이렇게!

결전의 그날에 저는 보았노라 말했노라 얻었노라!

유유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오예!



예고: '하나의 약속' coming soon!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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