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하지만 그래도, 잘 살아야겠지요

- 백영옥,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중에서

by hearida

"어쨌든 이십 대와 삼십 대에 걸쳐 써놓은 틀린 답을 고쳐가며 다들 자기 몫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무언가 들어낸 자리마다 바닥엔 상처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를 떠날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의 빈 공간에 어떤 상처를 남겼을까. 문득 얼굴이 화끈거렸다."


- 백영옥,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중에서








학창 시절,


필기를 하다 한자라도 잘못 쓰면

주저 없이 한 장을 쭉 찢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찢어낸 페이지가 많아지면

그 노트도 그냥 쉽게 버리고는 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끝이 살짝 깨진 볼펜이나

큐빅 하나가 빠진 머리핀

발끝이 살짝 헤진 양말과

향이 별로였던 반쯤 쓰다 남은 핸드크림까지.


저는,


잘못 쓰여 흠이 생긴

온전치 못한 것들을

참으로 쉽게도 버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을바람을 타고

유난히도 많은 일들이 지나가네요.


바람이 한번 불어올 때마다

낙엽처럼

마음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무수히 써내려 간 오답들과

수없이 그려온 상처들이

잎이 떨어진 나무 가지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지울 수도

찢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삶이라

속절없이 바라만 보네요.


어찌할 수 없으니

눈물도 나지 않네요.


야속한 겨울만

걸음을 서두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잘 살아야겠지요.


무참히 뽑혀 나간 앙상한 가지에

푸릇푸릇 새싹이 돋듯

거친 바람이 휩쓸고 간 메마른 들판에

알록달록 꽃이 피듯


언젠가 그렇게 다시

봄은 돌아올 테니까요.

꼭 기적처럼.


오늘 힘든 누구라도

힘, 내세요.

부디 담뿍,

행복하세요. :)




Istanbul, Turkey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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