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Feb 01. 2017

어쨌든 쉼 없이 노를, 저어간다는 것

-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몇 년 전에 친구와 함께 광화문에 있는 씨네큐브에 갔어요. 마침 『행복한 사전』이라는 일본 영화가 상영중이이더라고요. 마츠다 류헤이에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죠까지 좋아하는 배우들이 줄줄이 나오대요. 그냥 아무 기대 없이 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진짜 재밌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나오는 길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원작을 찾아서 샀는데요. 아무래도 읽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 감흥을 깨기 싫었거든요. 꽤 오랫동안 그랬어요. 오며 가며 책장에 꽂힌 책을 괜히 노려만 봤죠.

 그러다 이번에 드디어, 읽었습니다! 마음먹고 '에라, 모르겠다. 읽어보자.' 그랬죠. 다행히도 읽으면서 내내 '오, 재밌다! 오, 좋다!' 했어요. 역시 괜한 걱정이었네요. 




그래, 무언가에 열중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분명 재능이구나.


 책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거예요. 하나만 파는 것도 재능이라는 것.


 사실 우리는 정말 쉽게 이런 말을 하잖아요. 


"야, 열정을 좀 가져."

"몰입 좀 해봐."

"그거에 빠져야 해."

"완전히 미쳐버려."


 이게 막상 듣는 입장에서는요. 쉽게 미칠 수 없는데 자꾸 미쳐버리라니까 이게 진짜 미치겠는 거죠. 왜냐하면 미치는 것도 재능이니까요. 아무나 마음먹는다고 한 번에 바로 확, 빠져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뭐, 노력이야 할 수 있죠. 하지만 뭔가 열심히 하고 나면 또 쉬고 싶잖아요.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나면, 그다음엔 가족이든 친구든 주변도 살펴야 하고요. 열정적으로 한 가지를 파고들다가도 잠시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것에도 관심이 가기 마련이죠. 저는 그게 되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마치 개인의 게으름이나 모자람으로 치부해버리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절대, 결코 쉬운 게 아니에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누군가는 사교적이고, 또 누군가는 사색적이듯이요. 어떤 이는 하나에 몰입하기 쉬운 반면, 또 누군가는 다양한 것에 관심을 보일 수도 있는 거죠. 안 그런가요?


 다만 그런 생각은 해요. 인생에 오직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시간이 있다는 건요. 그게 일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장소든 말이에요. 아주 짧게나마 그런 경험은 삶에 강렬한 자취를 남기고, 두고두고 그 이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요. 살면서 정말 뭔가 하나에 미쳐버리는, 그런 몰입과 열정의 시간을 어떻게든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죠. 그 당시에는 비록 힘들고 지치더라도 말이에요. 




 저는 20대에 그런 적이 있었어요. 신입생 때 공부하고는 딱 담을 쌓았거든요. 전공이 저랑 영 안 맞더라고요. 이걸 어쩌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 고민을 하다 하다 결국 유학을 갔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하고 싶던 공부인 거잖아요.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온 거죠. 힘들여 멀리까지 왔으니까 어떻게든 해내야겠다는 절박함 같은 게 있었어요. 더구나 주변엔 다 저보다 어린 친구들밖에 없어서 조바심도 났고요. 그래서 진짜 공부만 했다니까요. 유학생의 일탈이나 낯선 곳에서의 로맨스 같은 건 전혀 없이 말이죠.  


난 오직 하나에 미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증명


 그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남는 게 제법 있더라고요. 뭐, 우선 눈에 보이는 건 졸업장이나 자격증 같은 거죠. 그런데 제게 그보다 더 중요한 건요. '내가 어느 한 시기에 오직 하나에 미칠 수 있는 인간이었다'라는 저 자신에 대한 증명이었어요.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거. 그게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저는 제가 한 번이나마 그랬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나는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그게 살면서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하거나, 혹은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줬어요.




 찰나의 순간도 그런데, 심지어 이 책의 주인공들은 무려 15년이에요. 겐부쇼보의 사전편집부원들은 15년 동안 사전 하나를 위해 산다니까요.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잖아요.

 얼핏 보아서는 무기질 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 막대한 수의 표제어와 뜻풀이와 예문은 모두 누군가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쓴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끈기인가. 얼마나 대단한 말에 대한 집념인가.
 아무리 조금씩이어도 진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이 보인다. 삼장법사가 멀리 천축까지 여행하여 갖고 돌아온 두꺼운 불경을 중국어로 옮기는 위업을 달성했듯이. 젠카이라는 스님이 30년 세월 동안 꾸준히 바위를 뚫어 터널을 만들었듯이. 사전도 역시 말이 축적된 책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불굴의 정신만이 진정한 희망을 초래한다는 걸 체현하는 서적이자, 사람의 예지의 결정結晶이다.


 저는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요. 한 15일 동안 거기에 매달리는 것도 정말 길게 느껴지고,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15년 동안 매일 한결같이 출근해서 하나의 목표에 매달려 일한다는 게 상상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것도 하다 보니 15년이 된 거지, 사실 처음엔 언제라고 시기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요. 어떤 가시적인 성과가 바로 보이는 것도 아닌데도 계속 해내는 거잖아요. 아니,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말이에요.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다시 또 절반이 변할 동안 오직 한 권의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내 삶과 젊음과 열정을 바칠 수 있을까. 아,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어찌 보면 사전은 책장 구석에 하나쯤 꽂혀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일상적인 사물이잖아요. 하지만 그 사전이 세상에 없다면 정말 곤란하겠죠. 그러니 누군가 만들긴 해야 하는데, 그게 막상 저라면 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사전을 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세상의 단어를 모두 모아 뜻을 찾고, 그걸 다시 분류해서 한 권의 책 안에 집어넣는다는 게요. 한 문장만 말해봐도 그 안에 단어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 수 있잖아요. 정말 신경 써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죠. 

 그런데 사전이 완성된다한들,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저자의 특색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인기가 있다 해서 대단한 부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문장을 넣긴 넣되, 그것은 최대한 자신의 주관은 빼고 객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정의여야만 해요. 그리고 그걸 다시 사전이라는 한정된 틀 안에 집어넣어야 하는 작업이죠.

 무색무취에 가까운 일이잖아요. 그걸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그게 진짜 대단하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장인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말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 삼각관계에 빠져 보지 않고는 그 쓴맛도 괴로움도 충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말을 바르게 뜻풀이할 수 없겠죠. 사전 만들기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과 사고思考의 지치지 않는 반복입니다."
 하나의 말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면 반드시 다른 말을 써야 한다. 말이라는 것을 이미지화할 때마다 마지메의 뇌리에는 목제 도쿄타워 같은 것이 떠오른다. 서로 보충하고 서로 지탱하며 절묘한 균형으로 선 흔들리기 쉬운 탑. 이미 존재하는 사전을 아무리 비교해도, 아무리 많은 자료를 조사해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말은 마지메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위태롭게 무너져 실체를 무산시킨다.
 사전 원고는 다소 특수하다. 잡지에 싣는 기사나 소설과 달라 집필자의 특성이나 문장의 개성 같은 것은 그리 존중되지 않는다. 사전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간결하게, 적확하게 표제어를 말로 설명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이걸 해내는 원동력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거예요. 자신들은 언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데 꼭 필요한 사전이라는 거대한 배를 엮어내고 있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의미 없이 아침에 일어났으니까 출근하고, 그저 월급이 들어오니까 다니는 회사가 아닌 거죠. 스스로 일에 부여한 자부심이 있고, 또 일을 통해 멈추지 않고 성장해요. 그러니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작업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거죠. 자신은 아니까, 함께 일하는 동료는 알고 있으니까요.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아라키는 혼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 마쓰모토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한정된 시간밖에 갖지 못한 인간이 힘을 다해 넓고 깊은 말의 바다로 저어 나간다. 무섭지만 즐겁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언제까지고 이 배를 계속 타고 싶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책의 중심에 마지메라는 인물이 있는데요. 이 마지메라는 인물은, 이름에서 바로 그 성격을 알 수 있어요. 일본어로 마지메는 성실하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나라로 치면 이름이 이성실인 거예요, 성실이. 뭐, 조금 외골수 같은 면도 있고, 사회성도 부족한 사람이지만요. 이름 그대로 마지메는 진짜 성실하게, 15년 동안 겐부쇼보 사전편집부가 대도해라는 사전을 편찬하는 중심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성실하다고? 아라키는 만족하여 혼자 끄덕였다. 잘 됐다. 사전을 만드는 견실한 일은 성실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저는 내심 부러웠던 게 뭐냐면요. 이 성실한 사람이 예를 들어서,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사실 마지메가 처음부터 사전편집부에 있지는 않았거든요. 원래는 영업부원이었어요. 그때는 이 사람이 지닌 성실하다는 장점이 전혀 먹히지를 않았어요. 영업부는 친화력도 좋고 언변도 좋아야 하는데, 마지메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영업부에서는 그렇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스스로도 즐겁게 일을 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자신의 후임을 물색하던 사전편집부의 아라키에게 스카우트된 거죠. 

 마지메는 책을 정말 좋아해요. 오죽하면 지내는 하숙집의 하숙생들이 나가면서 빈 방을 자기 책으로 다 채울 정도죠. 그리고 영업부에 있을 때도 다른 사원들의 캐비닛까지 다 정리할 정도로 정리정돈을 잘하고요. 또 언어를 다양한 시각에서 사고할 수 있는 능력도 있죠. 그런데 이런 재능들이 사전편집부라는 딱 알맞은 장소에서 활짝 꽃 피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저는 너무 부러웠어요. 

"사전편집 작업은 다른 단행본이나 잡지와는 다릅니다. 아주 특수한 세계지요. 인내심 강하고, 꼼꼼한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어에 탐닉하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넓은 시야도 함께 가진 젊은이가 요즘 시대에 과연 있을까요?"


 음, 솔직히 마지메가 그다지 매력적인 남자는 아니거든요. 오죽하면 처음 마지메를 소개받은 사람들은 마지메가 결혼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요. 아무리 사람을 외견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딱 봤을 때 이성에게 인기 있어 보이는 사람은 아닌 거죠. 그런데 심지어 마지메의 아내인 가구야는 실력 있는 요리사인 데다, 예쁘고 사려 깊죠. 

 저는 마지메가 가구야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사전편집부에 들어간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사전이라는 배를 엮으며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요. 왜냐하면 가구야 역시 요리에 푹 빠진 사람이거든요. 닮은 사람끼리 통하는 것처럼 장인이 장인을 알아본 거죠. 언어와 사전에 대해 끝없이 탐구하는 마지메는 요리에 몰입하는 가구야와 서로 그 열정의 온도가 같았고, 덕분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 결과 사랑의 결실을 맺어 부부가 되고 서로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요. 이러니 부럽지 않을 수 있나요.

가구야는 웃으면서 말했다.

 "요리를 먹고 난 소감으로는 복잡한 말이 필요 없는 것 같아요. '맛있다' 한 마디나 다 먹고 났을 때의 표정만으로 우리 요리사는 충분히 보답받았다고 느끼거든요. 그런데 수업修業을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답니다."
가구야가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다. 기시베는 젓가락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난 10대 때부터 요리사 수업의 길에 들어섰지만, 마지메 씨를 만나서 비로소 말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마지메 씨가 '기억이란 말이다'라고 하더군요. 향이나 맛이나 소리를 계기로 오래된 기억이 깨어날 때가 있잖아요, 그건 말하자면 모호한 채 잠들어 있던 것을 언어화하는 거라고 해요." 가구야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고 말을 계속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었을 때 어떻게 맛을 언어화하여 기억해 둘 수 있을까. 요리사에게 중요한 능력이란 그런 거란 걸 사전 만들기에 몰두한 마지메 씨를 보고 깨달았답니다."




 제가 되려 이입이 된 건 니시오카나 기시베 같은 인물들이에요. 두 사람 모두 사전편집부에서 마지메와 함께 일하는 동료였는데요. 마지메가 사전편집부에 특화된 재능을 갖춘 인물이라면, 니시오카나 기시베는 아주 일반적이죠. 사회성이나 일에 대한 마음가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에 마지않아요.

 그래서 이들은 마지메를 처음 봤을 때는 이해하지 못해요. 사전이 뭐 대단한가 싶고, 일을 그렇게 미치도록 해야 하나 싶고요. 그래서 마지메를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마지메의 그 열정에 감화돼요. 그러면서 다양한 감정에 부딪힙니다. 부러움, 질투, 자격지심, 좌절 같은 거요.

 온천처럼 콸콸 솟아나는 괴로운 감정의 원천을 더듬다 보면 참으로 한심한 결론에 도달한다. 요컨대 질투다. 나는 마지메만큼 사전에 대한 열의도 없는 주제에 시샘을 뿌리칠 수 없다. 일에서 뒤처진 느낌이 들어 도저히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하면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것밖에 없다고 작정하고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릴 수 있을까? 니시오카는 알 수 없었다.
 니시오카는 사전에 매료된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먼저일을 일이라고 생각하긴 하는지부터 궁금했다. 월급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자비로 자료를 구입하기도 하고, 마지막 전철을 놓친 사실도 모르고 조사를 하느라 편집부에서 자는 날도 있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광적인 열기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그러나 니시오카는 그게 사전을 사랑하는 것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랑하는 것을 그렇게 냉정하고도 집요하게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건가? 그건 얄미운 원수의 정보를 마구 모으는 것 같은 집념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몰두할 수 있는지, 수수께끼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보기 괴로울 때조차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내게도 마지메의 사전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니시오카는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분명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세계가 눈에 비치겠지. 가슴 터질 것 같은 빛을 띤 세계가.

 

  니시오카로 말씀드리자면, 되려 사회 생활면에서는 이 사람이 마지메보다 한 몇 배는 위예요. 그런데 사전편집부는, 그런 니시오카의 사회성보다 마지메의 독특함이 더 빛을 발하는 곳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니시오카가 일을 설렁설렁하는 건 아니에요. 니시오카 역시 그 나름대로 사전편집부를 아끼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지메를 부러워하기도 하고요. 자격지심에 시달리기도 해요. 사전 따위, 하고 무시하고 싶지만 니시오카도 사실은 사전을 많이 사랑하거든요.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고 좌절하기도 해요. 하지만 결국 자신이 지닌 재능을 바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주게 되죠.

 니시오카는 마지메를 사전 천재지만 요령이 없고 자신과는 전혀 통하는 데가 없는 괴짜라고 생각해 왔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학생 시절에 마지메와 같은 반이었다면 분명 친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마지메의 말이기 때문에 니시오카는 위안이 됐다. 요령이 없어 거짓말도 빈말도 못하고 진지하게 사전을 생각하는 능력밖에 없는 마지메의 말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나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사전편집부의 쓸모없는 인원'이 절대 아니었다.
 그걸 깨달은 기쁨. 솟구치는 긍지.
 중요한 것은 좋은 사전을 완성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걸어 사전을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회사 동료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서포트할 수 있는가, 이다.
 누군가의 열정에는 열정으로 응할 것. 니시오카는 지금까지 겸연쩍어서 피해 왔던 일을 '그렇게 하자'라고 마음먹고 나니 의외로 후련하고 가슴에 설렜다.


 기시베도 아주 평범한 회사원이었어요. 그녀에게 일은 일일 뿐이고 회사는 회사일 뿐이었는데요. 어쩌다 사전편집부에 오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한다는 건 인간의 정신 구조상 무리일지도 모른다. 기시베는 한숨을 쉬었다. 회사 측 의향이며 자기 안에 생겨난 익숙함과 타성. 그러잖아도 여러 가지 타협해야 할 일이 많은데 직장의 인간관계에도 즐거움이 없다니. 무엇에 의지하여 일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뭔가 무겁다. 기시베는 주눅이 드는 걸 느꼈다. 사전편집부에 오게 되면 사전을 좋아해야 하는 걸까. 애착과 열의를 갖고 사전 만들기에 전념해야 하는 걸까.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건 없겠지만, 내게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마지메 씨와 커뮤니케이션을 잘할 자신도 없고, 파일을 만들어서까지 사전편집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도 다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기시베도 처음에는 마지메를 만나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그와 섞일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다는 박탈감을 느껴요.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마지메 역시 한때는 자신처럼 방황하고 어리숙했던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감을 얻게 돼요. 그리고 마지메뿐 아니라 거래처 사람들 같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들의 일에 대한 열정을 마주하며, 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재정의합니다. 결국 그녀 역시도 사전편집부에서 큰 몫을 해내는 사람으로 성장해요.

 마지메 씨는 말에 얽힌 불안과 희망을 실감하기 때문에 더욱 말이 가득 채워진 사전을 열심히 만들려고 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사전편집부에서 잘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되도록 불안을 떨치는 방법을 알고 싶다. 가능하다면 마지메 씨와 서로 말도 통하고, 기분 좋게 회사 생활을 하고 싶다.
 많은 말을 가능한 한 정확히 모으는 것은 일그러짐이 적은 거울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일그러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비추어 상대에게 내밀 때, 기분이나 생각이 깊고 또력하게 전해진다.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울고 화를 낼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건 의외로 즐겁고 소중한 일일지도 모른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편한 쪽으로 흘러가도록 안일하게 살며 일을 해 왔을 뿐이니.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 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기시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기시베는 《대도해》 편찬을 통해 말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진실한 의미로 손에 넣으려 하고 있는 참이었다.
 뭔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 기시베는 문득 먼 옛날 생물이 탄생하기 전에 지구를 덮었다고 하는 바다를 상상했다. 혼돈스럽고, 그저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던 농후한 액체를. 사람 속에도 같은 바다가 있다. 거기에 말이라는 낙뢰가 떨어져 비로소 모든 것은 생겨난다. 사랑도, 마음도. 말에 의해 만들어져 어두운 바다에서 떠오른다.


 이 책의 묘미는 마지메처럼 독특한 사람이 아니라, 니시오카나 기시베 같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해요. 평범하지만 저마다의 장점과 열정이 있는, 선한 사람들이요. 자신들이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바뀌어가는 과정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었고요. 또 보통의 인물들이 이 사전편집부 안에서 점차 일에 애정을 갖게 되고, 또 조금씩 몰입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성숙해가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비록 이 거대한 배를 엮는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작은 일부분으로나마 자신이 한몫을 해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어떤 영웅담보다 더 멋지더라고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는 건 다른 이들에게 보이거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제게 굉장히 필요한 거였거든요. 물론 거기에 몰입과 열정이 더해지고, 또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주변과의 관계가 굉장히 따뜻하게 묻어나서 읽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았습니다.




중요한 건, 끊임없이 노를 저어 가고 있다는 것


 우리 모두 인생을 항해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배는 거대한 유람선일수도 있고 나룻배일수도 있고, 저마다 다르지만요. 어쨌든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요. 사실 그렇다고 해도 어쩌면 항해의 마지막 날에 바다의 끝에 다다를 수 없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중요한 건, 우리가 끊임없이 노를 저어 가고 있다는 거예요. 햇빛 쨍쨍 나는 날이든, 비바람 불고 태풍이 몰아치는 파도 한가운데 있든, 혹은 달빛 아래 잔잔히 흘러가는 것이든. 어느 순간에도 이 배를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묵묵히 노를 저어가기를.

 사전 편찬에 끝은 없다. 희망을 싣고, 넓은 바다를 가는 배의 항로에 끝은 없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