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Feb 22. 2016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가 없는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과거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의 내가 없다면.


"당신이 언젠가는 과거를 되찾게 될 거라고 늘 생각해왔지요." 이번에는 그가 심각해졌고 그 때문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지만 이거 봐요, 기.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지난 10년간 위트의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던 기 롤랑.

그는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사라진 과거의 파편을 찾아 거리를 헤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처럼 과거를 잃은 위트도

기 롤랑-이라 불리지만 기 롤랑이 아닌- 자신도 알지 못한다.

과거를 되찾는다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지...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무엇 때문에 이미 끊어진 관계들을 다시 맺고 오래전부터 막혀버린 통로를 찾으려 애쓴단 말인가?


바(bar) 맨, 러시아 망명 귀족, 피아노맨, 식도락 비평가, 카페 주인,  사진작가, 카페 관리인, 경마 기수...

그는 수 많은 사람들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남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려 한다.

자신은 결코 알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는 동안,

기 롤랑은 그들에 의해 매번 새로운 인물로 규정된다.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끝내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 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자신인가.

혹은 타인인가.

아니면 제 존재에 대한 사유인가.

그것도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인가.

그도, 누구도 이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다.


허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생을 제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도

자신을 기억하는 타인도

또 자신이 기억하는 타인도

결국 무(無) 일뿐이라는 것.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 삶의 흔적은,

고작 몇 초 동안 우리들 발자국을 지니는 모래와 같이

그렇게 잠시 스쳐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나의 발걸음이 인도 위에서 울린다. 나는 혼자다. 다시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미라보 가를 내려갈 때마다 느끼는 그 공포감. 누가 나를 알아보고 나를 불러 세워 증명서를 보자고 할 것만 같은 공포감. 목적지를 십여 미터 앞두고 그렇게 된다면 억울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뛰어가서는 안 된다. 규칙적인 걸음으로 끝까지 걸어야 한다.


얄궂은 세월이었다.

그가 잃어버린 시간은.


돈을 써서라도 도망을 가고 싶었던,

많은 이들이 쉽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던,

오직 한 여인만이 존재하던,

그 얄궂은 세월.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습관적으로 그곳을 드나들다가 그 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 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흩어진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종잡을 수 없고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보였기에...... 어떤 것의 몇 개의 조각들,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탐색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어요...... 하기야 따지고 보면, 어쩌면 바로 그런 것이 인생일 테지요...... 이것이 과연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는 어렴풋이 기억의 조각들이 살아돌아옴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겪었던 사실일 수도

누군가의 진실일 수도

그게 아니라면

한낱 꿈이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자신은,

진짜 자신일까.

되고 싶었던 누군가일까.

그런 사람이 있기는 했던 걸까.


반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라 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어느 순간 분명히 사실로서 존재했던 그 사람을...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 우리가 살아온

형태 없이 굳어진 무언가 이기도 하다.


매일 혹은 하루 오후에만도 여러 번, 여남은 마리의 말들이 마장을 따라 질주하며 장애물에 부딪히며 거꾸러지곤 했다. 그리고 그 장애물들을 넘어선 말들은 아직 몇 달 동안 더 보이지만 그것들도 다른 말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때마다 다른 말들과 교체해야 할 새로운 말들이 끊임없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정열이 마침내는 부서져버리고 만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마침내 증발해버릴지도 몰랐다. 혹은 창유리를 뒤덮고 있는 저 수증기, 손으로 지울 수도 없을 만큼 끈질긴 저 증기에 불과한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경마는 계속된다.

매일, 하루에도 여러 번 말들은 거꾸러지고

몇 달마다 달리는 말들은 사라지지만

경마는 계속된다.


세계는 계속된다.

매일, 하루에도 여러 번 사람들은 좌절하고

순간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사라져가지만

세계는 계속된다.


삶은 쉼 없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덩어리는 끈질기게 세상에 남는다 해도

각 개인은 너무도 쉽게 증발해버린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소녀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지워지는

붉은 저녁빛처럼 쉽게 사라지는

우리들의 삶.


과거를 기억할 수 없다 해도

과거는 존재한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은

기억의 유무를 떠나

과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다가올 미래 역시

기억될 수 있을지도 모를

혹은 오롯이 사라질지도 모를

현재로부터 만들어지는 것.


결국,

가장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것이 아닐까...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 조금만 더 달았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