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네스뵈, '박쥐'
얼마 전 TV 프로그램 《말하는 대로》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저자 채사장이 나왔어요. 제게는 책 보다 동명의 팟캐스트로 더 친숙한 분인데, 그 특유의 톤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깔끔하게 풀어내시더군요. 그런데 그가 한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책을 읽는 습관에 따라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여행을 하는 영혼이고 또 하나는 우물을 파는 영혼이래요. 하나의 책을 읽고 다른 분야의 책을 탐구하는 영혼은 여행하는 영혼이며, 하나의 책을 읽고 그 분야를 더 깊게 탐독하는 영혼은 우물 파는 영혼이라는 거죠. 물론 말의 요지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우물 파는 영혼보다 다양한 것을 접하고 모험하는 여행하는 영혼이 돼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지만, 단순히 책을 읽는 스타일로만 보자면 저는 명백하게 우물 파는 영혼입니다. 그것도 아주 집요하게요.
이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이 사람, '요 네스뵈' 때문이에요. 사실 저는 고등학교 이후로 자칭 타칭 '에쿠니 가오리' 덕후거든요. 현재는 업으로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바둥거리고 있지만, 이전까지 제 생활을 지탱하고 있던 일본어 통번역에 이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녀 때문이라 할 수 있어요. 애초에 대중음악 공부를 위한 유학처로 일본을 선택했지만, 정작 일본어를 알게 되어 가장 행복했던 게 그녀의 책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으니 말 다 한 거죠, 뭐. 여하튼 한 작가를 좋아하면 그 작가를 파고 또 파고든 후, 천천히 그 주변부까지 갉아 들어가는 편입니다.
그러다 최근에 새롭게 파는 작가가 생겼어요. 맞아요, 그게 바로 '요 네스뵈'랍니다. 그 원인이라면, 요 몇 년 독서 리스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추리 소설에 있어요. 예전에도 읽기는 했는데, 최근에는 그 애정이 깊어져서 한 권, 두 권 빠져들기 시작해 결국 유명한 작품들을 일부러 찾아보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요 네스뵈'의 작품들이 추리소설 추천 목록의 상위에 올라있더라고요. 때마침 서점에 신작 『바퀴벌레』가 나와 가득 진열되어 있던 터라 선뜻 집어 읽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었죠. 그리고는 그 뒤를 이어 『스노우맨』과 『레드브레스트』, 『미드나잇 선』으로 이어지게 되었고요, 이제는 어느 서점에서건 그의 이름만 보이면 일단 사고 보게 되기에 이르렀어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 저는 결국, 우리나라에 출간된 그의 모든 책을 다 수집하여 그가 책을 펴낸 순서대로 책장에 정리해뒀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노르웨이어를 배우겠다는 마음은 먹지 않았지만, 노르웨이에 대한 각종 정보를 야금야금 삼키고 있는데요. 더불어 매일 몇 번이고 보석 같은 저의 책장을 지날 때마다 환희에 찬 눈빛으로 그 책들을 바라보는 것이죠. 배고프다고 그냥 꿀떡 삼키지 않고 하나하나 꼭꼭 씹어서 맛보리라 다짐하면서. 그리고 지난달 아주 우울하던 어느 날, 저를 위한 선물로 아끼고 아끼던 그의 데뷔작 『박쥐』의 첫 페이지를 힘주어 넘겼답니다.
박쥐는 뭘까요? 다들 잘 알고 계시나요? 습자지처럼 얕은 지식밖에 지니지 못한 저는 냉큼 컴퓨터를 켜고 '박쥐'라는 두 글자를 검색창에 입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기준에서는 그다지 귀엽지 않은 생명체의 이미지가 무더기로 떠올랐어요. 음, 역시 제 스타일은 아니군요. 클릭을 몇 번 더하니 이런 지식도 얻게 됐습니다. 동양에서는 의외로 복의 상징이었대요. 박쥐의 한자 말 '편복蝙蝠'의 '복蝠'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복福'과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래요. 그 덕분에 기와에 박쥐 문양을 새긴 것은 '복福'이라는 글자를 써넣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으며, 박쥐 두 마리를 그려 놓으면 '쌍복雙福'이 되고, 박쥐 다섯 마리를 그려 놓으면 '오복五福'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박쥐를 마녀나 악마와 연결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해요. 예부터 마녀가 박쥐로 변신해서 집에 들어오는 거라 믿었으며, 박쥐가 집 주위에 모여들거나 날아다니면 재수가 없다고 여겼대요. 또 선이나 악덕을 위한 부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답니다. 박쥐를 가리키는 라틴어 vespertilio는 저녁이라는 뜻의 vesper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첫째로 박쥐가 황혼이나 월야 등 빛과 어둠이 길항하는 시간에만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고요. 두 번째로는 박쥐가 새와 쥐의 중간적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래요.
여하튼 이런 특징으로 인해 박쥐는 부정하며 기분 나쁜 동물로 많이 여겨졌어요. 이러한 이미지는 중세에 이르러 악마의 날개가 박쥐의 날개와 닮은 것으로 묘사되거나, 단테의 『신곡』에 나온 박쥐의 날개를 가진 마왕 사탄의 모습으로 인해 정착되었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저는 또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박쥐는 쥐인가요, 새인 가요. 생각해보니 저는 종종 제 언어생활에 박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용례를 살펴보면 주로 이렇습니다. '이런 박쥐 같은 놈', '박쥐처럼 여기저기 붙는구먼' 등등.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제게 '박쥐'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도 속하기도 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기회주의자의 상징인 거죠. 그리고 그 이미지는 과연 박쥐는 쥐인가, 새인가 하는 어린 시절의 물음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뭐, 어쨌든 제 빈약한 뇌 주머니에 담긴 고급언어를 동원하여 설치류냐, 조류냐 하는 물음을 인터넷 검색창에 날린 바, 바뀐 화면은 제게 이런 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이름에 쥐는 들어가 있으나 설치류는 아니며, 날 수 있지만 조류도 아닌, 박쥐는 바로 포유류 박쥐목에 속한 동물이랍니다. 참고로, 포유류 중 유일하게 날 수 있음. 호오라, 그러니까 박쥐 얘는 정말 이도 저도 아니면서 이도 저도 맞는 척하는, 그러면서 실체는 전혀 다른 요상한 녀석이라니까요.
수많은 정자들과의 경쟁 속에서 난자와 겨우겨우 결합해 태어나기만 해도 벅찬데, 가끔 손에 뭐 하나 재주라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보면 전 정말 부럽거든요. 결합할 때 아무것도 안 쥐고 손을 쫙 펴고 있었던 못난 정자인 저, 허어!! 그런데 『박쥐』가 나오기 전, 요 네스뵈의 행적을 살펴보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어요. 이 사람은 양 손에 갈퀴를 쥐고 온갖 재주를 다 쓸어 담아 태어난 것 같다니까요.
196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벌써 57세를 맞이한 그는, 프로필만 읽으면 영락없는 청년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하고 증권 중개인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 밴드 '디 데레(Di Derre)'를 결성하고 매년 100여 회의 공연을 할 정도의 인기를 얻었는데요. 어느 날 느닷없이 '글을 쓸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그때까지의 모든 일을 중단하고 『박쥐』의 해리 홀레처럼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답니다. 그다음은 보다시피! 해리 홀레 시리즈가 대성공을 거두며 나오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며 각종 상을 수상하고,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네요. 이 사람 심지어 동화까지 쓴다는... 하, 작작 좀 하시죠! 요 씨!
아무튼, 이 책 『박쥐』는 요 네스뵈가 작가로서 내디딘 첫 발이에요. 출판사의 설명을 찾아보니 이런 말이 적혀있네요.
프랭크 밀러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박쥐』는 해리 홀레가 낯설고 더운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에 발을 들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누구 하나 환영해주지 않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역시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한 작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 소설은 퇴고 후에는 절대 자신의 소설을 다시 읽지 않는다는 요 네스뵈가 유일하게 곱씹어 읽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날것 그대로의, 통제 불가능한 느낌이 좋아서’라고 그 까닭을 밝히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박쥐』는 형사 해리 홀레의 탄생기이면서 특유의 불완전하고 거친 느낌이 생생히 담겨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네스뵈는 페터 회, 스티그 라르손, 헤닝 만켈 등의 쟁쟁한 작가들이 거쳐 간 북유럽 최고의 문학상 ‘유리 열쇠상’을 거머쥐었다.
낯선 땅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요 네스뵈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작 중의 해리 홀레로 분扮하여 책에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해리 홀레 시리즈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민첩하고 깡마른 몸. 수사에 있어서는 천재적이지만 권위주의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반항적 언행으로 종종 골칫거리가 되는, 악과 싸우다 악에 물든 매력적인 반영웅 캐릭터'라는 배경 설명을 지닌, 조금은 늘어지고 지칠고 거친 해리에게 익숙하겠지만요. 『박쥐』에서는 아직 창창한 젊음으로 가득한 해리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아직 생기 있고, 패기 넘치며, 미숙하지만 또한 정의롭습니다.
청년 해리 홀레는 노르웨이 여성의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됩니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 낯선 땅에서 사건을 마주하는 동안, 그는 우정을 나누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간결한 이야기 뒤에 오스트레일리아가 기나긴 시간 쌓아온 비극이 자리하고 있고, 결국 그 비극이 해리 홀레의 모든 것을 잡아먹어버려요. 어느 인터뷰에서 요 네스뵈는 "삶은 잔인하지만 아름답다. 나는 늘 사회적 약자들이 품은 슬픔에 매료되곤 한다"라고 말했는데요. 그런 요 네스뵈의 시선이 해리 홀레를 통해 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죠.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연방에 속하는 나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태즈메이니아 섬 등을 국토로 합니다. 현재는 세계 200여 개 나라에서 이민 온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다문화 국가지요. 하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백인과 피부색이 다른 유색 인종은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백호주의'로 유명했다고 해요. 골드러시 이후 중국의 노동자들이 값싼 임금을 바탕으로 대거 유입되었고, 그 결과 백인들의 임금이 저하하자 이런 인종차별정책을 펼친 거죠. 그러니까 현재 '이민의 나라'로서의 오스트레일리아는 1970년대 중반 백호주의를 포기한 이후에 세워진, 채 50년이 안 되는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1970년대 유색 인종의 이민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를 구성하고 있던 건 당연히 백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죠. 백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발을 들이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바로 애버리진, 혹은 어보리진이라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 말입니다.
애버리진 Ab-origin은 From Origin의 뜻을 지니고 있어요.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주민으로 추정되는데, 약 6만 5000년 전에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빙하 시대 해수면이 오늘날보다 크게 낮았을 때 육로를 통해 이주하였다가, 1만 년 전 해빙기 때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다른 대륙으로부터 고립되었고요. 그 덕분에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게 되죠.
하지만 이 평화로운 생활은 1788년 영국 함대가 유형지를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처음 도착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당시 원주민의 수는 30만~75만 정도였다고 해요. 영국은 이들의 영토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애버리진들은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다른 원주민들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강제로 쫓겨나거나, 이주민에게 살해되거나, 외부에서 유입된 신종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는 거죠. 그리하여 현재 그 수는 고작 4만 명에 불과합니다.
19세기의 피비린내 나는 '무력에 의한 화해'부터 현재의 도시화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하긴, 모든 원주민의 문화는 비슷한 경로로 완전하게 무너지고 변화되었죠. 어쨌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원주민의 분열을 막는다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보호구역을 설치하는데요. 땅을 소중히 여기는 애버리진은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고, 1976년에는 토지 소유법을 통해 자치 권리가 향상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아주 흔한 이야기일 수 있어요.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과 새로운 터를 일구기 위해 그 땅에 발을 들인 자들의 다툼. 그리고 그 과정에서 토지를 잃고, 병에 들고, 미개하다는 이유로 배척되거나 노예가 되거나 쫓겨나는 원주민들의 비극.
하지만 애버리진들에게는 여러 대륙에서 흔하게 이루어졌던 그 참혹한 비극 사이에,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 한 줄이 더 있어요. 그것은 바로 '도둑맞은 세대'입니다.
2008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새로운 수상이 된 케빈 러드는 애버리진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함으로써 오스트레일리아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사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1998년 5월 26일부터 'Sorry Day'라는 비공식적 기념일이 있었죠. 아니, 도대체 이들은 누구에게, 왜, 무엇을 사과하는 것일까요?
실상은 이렇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901년부터 73년까지 애버리진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그들의 부모와 분리시켜 백인 가정이나 선교 시설에 수용시킵니다. 72년간 약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합법적으로 고아가 된 거죠.
이 잔인한 정책은 표면적으로 어디까지나 '애버리진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종교 기관에서는 애버리진들의 비문명적인 양육 방식으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하여 그들을 문명화하고, 백인 사회에 편입시키려 하였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애버리진을 멸종될 종족으로 규정하였는데,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백인 사회회에 통합시키는 것이 그 인도적 대안이라 판단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앞서 말한 백호주의에 기인합니다. 유색인종의 이민을 금지하여 백인들의 임금을 보호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야기합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혼혈아들을 노동력으로 전환하려 합니다. 한마디로 강제적인 '백인화'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피부 빛깔이 연한 아이들은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고, 짙은 아이는 고아원으로 보내집니다. 이들은 친부모와의 연락이나 애버리진 언어조차 사용할 수 없었으며, 그 어느 것도 서류화되지 않아 결국 부모를 찾지 못한 채 생애를 마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친부모들에게는 아이의 거처도 언급되지 않았고 어떠한 동의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부모와 생이별한 아이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정부와 양육 기관, 입양 가정에서 애정과 관심을 담뿍 받으며 잘 자랐으면 좋으련만, 예상되는 바 그럴 리가 없겠죠. 해당 아동 다수가 신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와 강제 노역을 당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아이들은 평생 외로움에 시달리며 낮은 자존감과 정체성 혼란 및 우울증, 불신, 자괴감, 분노, 범죄, 알코올 중독 등을 겪게 되고요. 자살률마저 높아 평균 수명조차 짧다고 해요. 그리고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들의 자식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맙니다.
결국 199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권위원회가 연방 정부의 위촉을 받아 진상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는데요. 이 보고서에 원주민 자녀를 가족과 강제로 분리한 원주민 동화정책이 종족 근절이며, 인륜을 어긴 범죄라 규정하고 "그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라"는 내용을 작성하여 제출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 이듬해인 1998년부터 'Sorry Day'가 생긴 것이죠.
더불어 지난 2007년, 생후 13개월부터 부모와 분리되어야 했던 도둑맞은 세대 중 한 명인 브루스 트레보로가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를 통해 이러한 국가 정책으로 인해 그가 평생 겪어야 했던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 등에 대한 보상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후, 브루스 트레보로의 경우와 같은 보상 문제가 국가적 이슈로 대두되었고 지난 2016년에는 주정부에서 이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결정,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상당수의 백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들은 "도둑맞은 세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이들은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구조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네요. 글쎄, 여기서 저는 이상하게 자꾸 일본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마치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근대화하였다 라는 주장과 어째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편히 못 잔다는 속담은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요즘입니다. 멀쩡히 지나가는 사람 차로 받아 날려놓고, 너에게 공중 부양의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그랬다는 말하고 뭐가 다른지 말이죠. 슬프게도 정작 자신들은 이런 억지를 진실로 우기고 우기다 진짜라고 믿어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이건 슬픈 게 아니라 무서운 거겠죠.
한때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넓은 대륙을 자유로이 누비며 그 땅의 주인으로 살던 이들은 이제 삶의 터전과 가족, 정체성, 미래,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애버리진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이면서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아니며, 원주민이면서 원주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이자 또 모든 것이 아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일지도요.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는데요. 만약 그들이 박쥐와 같은 운명이라면, 부디 그들에게 박쥐와 같은 날개가 있기를, 그리하여 훨훨 자유로이 날 수 있기를.
요 네스뵈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이런 애버리진의 피폐하고 끔찍한 현실을 곳곳에서 마주하고, 시간을 거슬러올라 그 배경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예상되는데요. 그는 해리 홀레,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건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곳곳에 남아있는 도둑맞은 세대의 삶과 비극을 여과 없이 참 잘 드러내었어요. 여기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까지 잘 비벼서 참 맛깔나게 무쳐냈어요.
첫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좋았습니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요. 배경도 배경이지만, 우선 추리 스릴러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고 잘 살려낸 것 같아요. 아주 냉정하게 얘기하면 뭐, 『스노우맨』이나 『레드브레스트』만큼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 아닌가요?
사실 요 네스뵈의 문장이 아주 (지루할 만큼) 서사적이고 세밀한 면이 있는 데다, 이야기의 구조도 굉장히 촘촘해요. 덕분에 순수하게 읽는 즐거움을 주는 작가예요. 거기에 더하여 책장에 활자로 적혀있지 않은, 이면에 숨겨진 겹겹의 이야기들을 찾아가느라 쉴 틈 없이 가슴 졸이며 즐거웠던 『박쥐』였습니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씹고 뜯고 맛보시면 어떠할지요.
"이 집 웨이터들은 명왕성 같아요. 주위를 맴돌다 21년에 한 번씩 나타나고, 그때도 맨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지구 어디에서건 사람들은 비슷한 상상이나 환상을 공유하는 것 같네요. 하드 드라이브에 각인된 인간의 본성이라고나 할까요. 서로의 차이가 아무리 커도 머지않아 같은 답을 찾아내죠."
"우리는 원래 있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걸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당신네 젊은 친구들한테 해줄 말이 있어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신비로워요."
"힘이 있어야 해. 사람이나 개나 다를 게 없어. 개는 붙잡아주지 않으면 불행해지거든. 불행한 개는 사람을 물지."
"직감은 단지 경험의 총합이에요. 내 생각에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일, 우리가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고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어요. 우리는 대체로 잠든 무의식을 알아채지 못하고, 무의식은 그냥 거기 머물러 코를 골면서 새로운 정보를 빨아들여요. 하지만 이따금 눈을 깜빡이고 기지개를 켜면서 말을 걸죠. 이봐, 전에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어, 하고. 그리고 그 그림에서 어느 부분이 관련되어 있는지 말해주죠."
"대단하군, 홀리. 그런데 당신의 그 잠자는 생명체가 그림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본다고 확신해요? 당신이 보는 그림은 당신이 서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무슨 말이에요?"
"하늘을 예로 들어봅시다. 노르웨이에서 보는 하늘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는 하늘하고 같아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여기로 내려와 있으니까 당신에 나라를 기준으로 삼으면 거꾸로 서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별들도 거꾸로 보이죠. 당신이 거꾸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혼돈에 빠져서 실수를 저질러요."
해리는 앤드류를 보았다. "거꾸로, 라니?"
"그거죠." 앤드류가 시가를 피워 물며 명쾌하게 답했다.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여기서 보는 하늘이랑 우리가 보는 하늘이 많이 다르다던데요.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으면 노르웨이에서 밤에 보이는 별들이 지구에 가려진다고."
"좋아요, 그럼." 앤드류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어디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요. 요지는, 다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복잡해지기도 하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더는 용납하지 못할 때 처벌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 같아. 아무튼 나도 그러고 싶었어. 처벌받고 채찍질당하고 고문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싶었어. 내 죄를 청산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어. 하지만 나한테 벌을 내릴 사람이 없었어. 내게 발길질한 사람도 없었어."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두려워하니까. 그리고 두려워하는 대상을 증오하고."
"해리, 맡으신 사건은 진전이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해리가 대답했다. "가끔은 제가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답이 가까이 있는데도 흐릿한 형체만 보이는 느낌이 들어요."
"아니면 당신이 거꾸로 서 있거나."
"그럼 어떤 사람을 진실로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거대하고 어두운 숲으로 난 길을 찾기까지 꼭 긴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잘 닦인 길이 곧게 뚫려 있고 가로등과 표지판도 있어요. 그런 사람은 속속들이 다 말해줄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환한 길에 산짐승이 보이지 않으면 덤불에서 나타나니까요."
"그럼 다 알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다르죠. 그리고 숲에 따라 다르고. 어떤 숲은 다른 숲보다 어두워요."
"그럼 당신의 숲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무얼 하든 모두 흔적으로 남아요. 당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모두 당신에게 남아 있어요. 누군가 읽을 수 있도록."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해리. 당신은 내 친구예요. 내 생각에 당신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엉뚱한 곳으로 눈을 돌리진 않아요. 나는 단지 지구 상에서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수많은 외로운 영혼 중 하나일 뿐이에요. 실수를 너무 많이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가끔은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보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겠죠. 그게 다예요. 여기서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해리. 내가 누군지 알아내 봤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젠장,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아는 데는 딱히 관심도 없고."
"왜죠?"
"숲이 아주 캄캄해서 길을 찾지 못하겠으면 애초에 길을 찾는 여행을 떠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니까요. 머지않아 엉뚱한 데서 헤맬 테니까."
"넌 다른 모든 걸 원해." 해리가 말했다. "그런데 결혼의 낙원으로 난 길을 한발 먼저 앞서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양로원에 들어앉아 있으면 결혼선물로 받은 그릇세트가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장담컨대 다이빙대와 풀장 옆에서 사랑을 나눈 장면은 선명할걸."
"물론 정신병자 같지. 하지만 병적인 게 정상이야, 해리. 병적인 부분이 사라지면 위험해져. 그러면 유기체가 싸움을 멈추고 맥없이 쓰러질 테니까. 그런데 망상은 말이야, 해리. 망상을 얕잡아보지 말아줘. 어떤 사회든 망상을 품을 가치가 있어. 당신들의 망상을 예로 들어보자고. 기독교 세계에서 신앙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무리 똑똑하고 독실한 성직자라도 의심이 싹터서 얼마나 괴로운지 솔직하게 논의하잖아. 그런데 의심을 인식한다는 말은 당신네가 평생 의지하기로 선택한 신앙이 망상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 아닌가? 망상을 그렇게 쉽게 버리면 안 되지, 해리. 무지개 너머에 보상이 있을지 모르잖아."
인간의 정신은 깊고 어두운 숲과 같으며 모든 결정은 혼자서 내린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