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도로보다는, 길을 닮은 삶이기를

- 정기용, '사람 건축 도시' 중에서

by hearida

"할아버지가 보았던 풍경을 아버님이 똑같이 바라보고, 같은 길목에서 나 또한 동일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길도 축음기의 레코드판 같이 충경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코드판은 음을 저장했던 것이 아니라, 음의 지문을 내장하고 있다가 축음기를 돌리면 홈이 파인 흔적을 바늘이 읽어내고 그 소리가 증폭되어 언제나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길은 풍경의 저금통이다."


- 정기용, '사람 건축 도시' 중에서



작년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며칠 전에는 한의원에 갔어요.

아주 어렸을 때 빼고는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쓰디쓴 한약을 받아

집 한쪽에 가득 쌓아뒀네요.


한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저는 천성적으로

담이 작고

변화를 싫어하고

속으로 삭히는 사람이라고요.


하긴, 생각해보면 저는

뭔가 바뀌는 걸 싫어했어요.

급하게 정해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일상이 늘

예측 가능한 상태이길 바랬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도요,

체육이나 음악이나 미술 수업은

교실을 바꾸잖아요.

오죽하면 그런 것도 싫어했다니까요.

뭐, 게을러서일 수도 있지만요.


삶이 언제나

제가 제어하는 대로 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저,

제 인생이 뻥 뚫린 도로이기보다는

오래 드나들어진 길이었으면 좋겠어요.


빨리 달려야 하고

급히 멈춰야 하고

사람은 적고

경적소리만 가득한

그런 도로가 아니라


마주오는 사람과 인사도 하고

길 한구석에 핀 꽃도 보고

손 끝에 닿는 바람도 느끼고

많은 이의 발에 오래도록 다져진

그런 단단하고 포근한 길이었으면.


표지판에 나온 목적지만

무작정 쫓지 않고

저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궁금해하며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부디 그런 길이었으면.


기분 좋은 금요일,

다들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도 담뿍,

담뿍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해요, 항상. :)




Grindelwald, Switzerland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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