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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Jun 22. 2017

문장에 스친 이름, 월레 소잉카로부터

- 월레 소잉카, '오브 아프리카' 중에서

"외부 세계는 백내장의 막을 수백 년에 걸쳐 딱딱해지게 만들어 대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자기 탐닉의 전통을 인정해야 한다. ‘검은 대륙’에 그렇게도 붙이려고 했던 어둠은 사실, 바라보는 자의 눈에 있는 자의적인 백내장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 월레 소잉카, '오브 아프리카' 중에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제가 대가족 품에서 자랐는데 10명의 식구 중에 아이가 저 하나였거든요. 밑으로 첫 번째 사촌동생이 태어나기까지 6년이 걸렸으니까요. 한 마디로 참 심심한 어린이였죠.


그래서 주로 TV를 보거나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요. 화장대 앞에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요. 또 책을 읽고 상상을 하고 글을 썼어요.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가진 책들을 다 흐뜨러트린 다음, 다시 제 마음 가는 대로 정리하는 거였죠. 밖으로 나가 노는 건 어른들이 워낙 걱정하셨어요. 유괴다 뭐다 세상이 너무 험하다고요. 뭐, 선천적으로 움직이길 귀찮아하기도 했어요. 제가 심각한 길치인데, 안 나가서 길치가 된 건지 길치라서 더 안 나갔던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정말 무서울 정도로 방향 감각이 제로랍니다. 허허.


책 읽는 아이를 싫어할 어른들이 많이 안 계실 것 같은데, 저희 집도 그랬어요. 그중에서도 할아버지께서 제가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첫 손주인 데다 막둥이처럼 키우신 탓에 유달리 편애하시기도 했는데요. 아침에 출근하실 때면 꼭 동네 서점에서 책 한 권씩을 사주셨죠. 퇴근길에는 집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셨어요. 그럼 저는 뛰어나가서 할아버지랑 슈퍼에서 과자를 사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 무릎에서 먹었고요. 그리고 주말이면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데이트를 했어요. 주로 광화문의 교보문고나 청계천 고서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책이 한가득 손에 들려있었죠. 그리고는 끊임없이 읽는 거예요. 낮이고 밤이고.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니까 책 대여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신났죠. 그때는 정말 하루에 서너 권씩 읽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특활반(요즘도 이렇게 부르나요?;;;)은 도서부였고요. 고등학교 CA(요즘도 이렇게 부르나요2?;;;)는 고전강독반이었어요. 톨스토이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부원들이 다 같이 겸손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 아름답게 자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해요. 선생님께서는 그런 저희를 보시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다들 다른 부로 가~'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지만 원래 가수면 상태에서 암기력이 더 상승... 한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네요. 뭐, 하여간 이쯤 되면 책벌레라 부르셔도 할 말이 없어요.


덕분에 국어는 따로 공부를 안 했던 것 같아요. 교과서도 책이라 생각하면 정말 재밌게 읽혔거든요. 아,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다른 과목은 해야 하는데 안 했어요. 좀 할 걸... 그래서 다들 당연히 국문과를 가서 국어 선생님을 하거나 글을 쓰겠거니 했죠. 친구들은 저한테 묻지도 않고 당연히 '헤아=국문과'였어요. 하지만 인생은 늘 예상과 다르게 풀리는 데 그 참 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전공만 네 개에 (아르바이트 빼고) 전직만 8번을 넘게 했는데요. 사실 그 이상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중에 국어나 책 관련 일은 없었어요. 오히려 국어와는 전혀 상반된 일들이었죠. 아르바이트로 잠시 국어 강사를 한 적은 있지만요. 뭐, 사실 각 전공과 각 직업끼리도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 뿐이에요. 관심이 가면 일단 덤벼서 하고 보는 불나방 같은 이십 대였다고 나 할까요. 하-! (그립군요)


아마 굳이 일부러 찾아서 할 필요가 없어서였을 거예요. 책은, 국어는, 저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또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요. 늘 곁에 있고 늘 함께 하니까 일부러 탐구하고 배울 필요가 없었어요. 일생을 함께 해왔고 남은 삶도 분명 함께할 것이 틀림없다고 늘 믿었으니까요.


물론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요즘 조금 바뀐 게 있는데요. 더 알아보고 싶어 졌어요. 제 소중한 친구에 대해서요. 지금껏 소설을 주로 읽었었는데, 더 다양한 책들을 만나고 싶어 졌어요. 빨리 많이 읽어왔었는데, 요즘은 사전을 피고 한 자 한 자 꼼꼼히 살피고 그 뜻을 익히고 싶어 졌어요. 천천히 깊게 생각하며 읽고 싶어 졌어요. 요즘은 그래요.


덕분에 슥슥 넘어가던 페이지가 근래에는 한 장 넘어가기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종종 한숨을 쉬고, 읽다가 몇 번을 일어서서 기지개를 켜고 머리를 흔들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그게 그리 나쁘지 않네요. 늘 깔깔 웃으며 재밌게 놀던 친구와 어느 날 술 한잔과 더불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 이후로 그 친구의 진정한 무게를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랄까요. 결코 만만치 않고 때로 지루하기도 하지만 행복으로 가득 찬 요즘입니다.


오늘 훔쳐온 문장의 주인인 월레 소잉카는 아프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예요. 다양한 글을 썼지만 특히 <사자와 보석>, <숲의 춤> 같은 희곡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요. 그는 나이지리아 정부에 반하여 전체주의와 봉건주의에 대항해 싸울 것을 독려하고,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옥고를 치루기도 했는데요. 특히 망명 중에 국가 반역 혐의로 아바차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 선고가 내려지기도 했죠. 다행히 정권이 교체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어요. 최근에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영주권을 찢고 출국하겠다"라고 공언했고, 실제로 트럼프가 당선되자 실제로 영주권을 포기하고 고향 나이지리아로 귀국해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제가 요즘 읽는 책은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인데요. 월레 소잉카는 책에 아주 짧게 등장해요. 오에 겐자부로가 '어쩌다 하와이에 가서 월레 소잉카를 비롯한 작가, 시인들과 함께 숙박하며 가치 있는 토론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장애가 있는 오에의 큰 아들 히카리가 사춘기로 집 안에서 심적 고립을 겪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데 등장했는데요. 그 한 문장을 통해 저는 월레 소잉카와 만나고, 그를 찾아보게 되었어요. 제 좋은 친구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들을 제게 소개하여 주며 저를 확장시켜 주고 있는 거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렌즈로 세상을 봐요. 하지만 그 렌즈가 오래되어 생채기가 나 세상을 왜곡시키게 할 수도 있고, 자신의 눈과 맞지 않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렌즈를 빼면 아주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 세상과 나 사이에 있는 이 렌즈가 제대로 된 것인지 검토하고 확인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죠. 물론 그 확인을 저는 주로 책을 통해 하지만, 누군가는 사람을 통해, 누군가는 일을 통해, 누군가는 또 다른 무언가를 통해 할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더는 고민하려 하지 않던 것들에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의적인 백내장을 잘 치료해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 문장에 짧게 담겨 있던 월레 소잉카라는 이름에서, 그의 문장 하나로, 다시 그의 책으로, 또 그 책의 문장으로 이어진 여행이 이렇게 오늘의 글로 이어졌네요. 저는 다시 또 제 오랜 친구를 탐색하기 위해 가봐야겠어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더위에 지쳐버린 요즘인데요. 아무쪼록 건강 챙기시길 바랄게요. 무엇보다 우리 매일 담뿍, 담뿍 행복하기를. 항상 감사합니다. :)


사람들이 사실상 체념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고 말아 버리는 사회가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존엄성입니다. 존엄성.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재는 존엄성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물이 필요하고 공기가 필요한 것처럼 존엄성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어떤 사람은 공기가 중요하다고 하겠지만, 내 입장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으로 필요한 것은 존엄성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실존은 자기가 좌지우지한다는 그 느낌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음식이나 물이 없으면 인간은 죽겠죠. 그렇죠? 그래도 그 죽음은 존엄한 죽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두려움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자기 소유권, 즉 존엄성이라고도 하는 그 재산을 언제나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 굴복시킨 인간 이하의 존재들은 언젠가는 반항하고 말 것입니다. 반항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반항이 자아실현의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 네이버 캐스트 '우리 시대의 멘토' 월레 소잉카 글 중에서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K-20 in Dusseldorf, Germany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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