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Aug 24. 2017

죽음보다 더한 삶이, 여기

- 남궁인, '만약은 없다'

"태생적으로 담이 약해요."


 지난봄 한의원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 옆구리를 쿡, 눌러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상은 했는데 정말이더군요. 네, 저는 담이 작은 여자예요. 그것도 아주 많이 작은 여자. 간이 콩알만 하다 못해 마이크로 단위로 측정 가능한, 저는 그런 여자입니다.


 사실 어릴 땐 다들 그렇잖아요, 겁이 많죠. 저도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학원에서 단체로 놀이공원에 가서 귀신의 집에 들어갔거든요. 근데 하필 입구에서 친구들 손을 놓치고 혼자 남았는데, 옴짝달싹 못하고 하도 울어대서 결국 알바 중이던 귀신 분과 손 꼭 잡고 밖으로 나온 적이 있어요. 뭐, 공포영화 포스터만 봐도 잠 못 들어 밤새 불키고 그런 것도 그냥 애교 수준이죠.

 개인적으로는, 남편이 방문을 열어보지 말라고 했는데 열어봐서 사달이 났던 동화 '파란 수염'이나 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누누이 경고했는데 결국 뒤를 돌아봤던 신화의 주인공들이 이해가 참 안 돼요. 전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하지 말라는 건 안 해야 신상이 편하다 이 말입니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담력이 좋은 사람은 아니겠다 짐작은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요즘 그 정도가 심해졌다는 거예요. 그게, 제법 심각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점점 영화를 보기 힘들어진다 이 말입니다.

 담이 약한 얘기를 하다 웬 영화? 싶겠지만, 최근에 저는 집에서 혼자 영화를 끝까지 본 적이 없어요. 한 편의 영화를 온전히 다 보기 위해서는 무조건 저를 영화관에 밀어 넣어야 해요. 그래서 옴짝달싹 못하게, 일어설 수도 나갈 수도 없도록 그 자리에 묶어두는 수밖에 없지요. 다행히 영화관에서 뛰쳐나갈 만큼 중병은 아니라서요.


 그래도 그럴 때 있잖아요. 영화관에서 놓친 영화를 집에서 다운받아 느긋이 본다거나, 혹은 케이블 TV에서 보고 싶던 영화가 나오면 이때구나 하고 보는 거요. 그런데 막상 보려고만 하면, 결국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구나 싶은 상황에 직면하고 말아요. 그래서 정지를 누르거나, 끝까지 빠르게 돌려보기를 하죠.

 남편과 같이 볼 때는 그럴 수 없으니(음, 그러면 맞을 것 같으니) 혼자 화장실로 도망가 버리거나 옆에서 핸드폰으로 가만히 인터넷 창을 열어 영화 스포를 찾아봅니다. 그래서 결말을 확인하는 거죠. 엔딩은 해피인가 새드인가, 그 혹은 그녀는 죽느냐 사느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에요. 해피엔딩이라면 끝까지 볼 용기가 조금 생기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주요 인물 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용기가 다시 사그라들지요.

 근데 이게 진짜 고민인 건, 공포영화가 아닌데도 그렇다는 데 있어요. 드라마, 코미디, 액션 등등 장르 불문하고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이래요. 음, 사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그렇고요. 이야기가 스민 어떠한 곳이든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어요. 일단 엉덩이에 부리나케 한 번 내빼야 해요. 그래서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고개를 젓지 않고서는 도저히, 한 번에 그 이야기를 소화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자,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영상이야 눈으로 자극이 바로 전달되니 그렇다 쳤는데, 이제 그 병이 책에까지 옮겨오고 말았어요. 특히 소설이 그렇죠.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있잖아요. 발단 후에 전개가 되다가 위기를 겪어서 절정에 달한 후, 드디어 결말을 맞이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위기를 맞기 전부터 책장을 못 넘기겠어요.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넘어설 힘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거죠. 차라리 절정에 다다르면 읽는데 가속도가 붙어 책장이 슥슥 넘어가겠는데, 그 훨씬 전부터 손바닥에 땀이 나서 도저히 배겨 나질 못하겠어요.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이 너무 찹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소설책을 읽을 때면 중간중간 템포가 다른 에세이나 인문학 서적들을 넣어 숨을 고르고 있어요. 기분전환으로요. 가슴이 쿵쿵 뛰면 결이 다른 문장들로 다독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곧 진정이 되고, 다시 위기를 넘길 힘을 얻게 되죠. 그렇게 소설책 앞뒤로도 공기가 다른 책들을 배치해서 읽어요. 이런 방식으로 며칠 전에 '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를 마지막까지 읽었고, 이제 '만약은 없다' 차례였어요. 숨을 좀 내쉴 차례였죠. 분명.


 그런데 저, 지금 너무 힘들어요. 계속 과호흡 상태예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디로든 숨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게 화장실이든, 엄마 등 뒤든, 어디든. 그럴 수가 없으니 넘겨야 하긴 했는데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유독 숨이 찼어요.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이 떨리고, 그래서 자꾸만 숨을 많이 몰아쉬고요. 흐르는 땀을 계속 닦아내야 했어요.

 하지만 이 책은 그래야만 하는 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처에 널린 죽음이, 그러나 꼭 남 일만 같은 그 죽음이, 여기 이리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가장 가까운 죽음은 작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였어요. 외할아버지도 응급실에서 돌아가셨죠. 갑자기 호흡이 힘들다 호소하시는 외할아버지를 위해 구급차가 급히 달려왔어요. 점퍼만 걸치고 손에 지갑 하나만 든 엄마는, 따라가려는 저를 막으며 괜찮으니 집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때 같이 갈 걸, 그게 끝내 한으로 남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도착해서 응급치료를 받고 상태가 안정됐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엄마가 겨우 숨을 돌렸대요. 그런 엄마를 곁에 두고 외할아버지는 큰 숨을 세 번 쉬시고는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렇게 가셨어요. 거짓말처럼, 한 번에, 너무 빠르게.


 죽음은 참으로 낯설었어요. 조금 전까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지니고 있던 누군가가, 온기 없는 육체로만 남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가까운 타인의 죽음은 그렇게 슬프고 어렵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을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일생에 몇 번 겪지 못하는,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한 번은 꼭 겪을, 물음표만이 가득한 그런 것이었어요.


 제게는 그렇게 멀고 낯선 죽음이 그러나 응급실, 이곳에는 그리도 가득하네요. 매일 밤 수없이 실려와, 자신의 앞으로 배달되어 또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응급실에서 죽음은 많고 많은 흔한 것, 그런 것이었어요.

 병으로, 사고로, 사건으로 때로는 자신의 손으로 끝내 목숨을 잃은 육신들. 혹은 죽음에 이르고자 했으나 신체의 일부를 잃고는 기어이 이승에 주저앉아야 하는 절망들. 왔다가는 떠나가는 이들과, 기어이 그곳을 지켜내며 그들보다 더 불행해지겠다 다짐하는 의사와 의료진들. 이 모든 것이 있는 곳, 응급실.


 아, 솔직히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자신의 사멸이란 고개를 돌리고 돌려도 언젠가 기필코 마주해야 하는 숙명이지만, 그러나 그 죽음조차 오늘은 아닐 거라며 끝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마는 저는, 하물며 남의 죽음, 타인의 고통, 누군가의 불행을 끝끝내 고개를 저어 밀어내고 물리치고만 싶어요.

 그러니 사실은 보면 안 되는 것이었어요, 이 책은. 그러나 책장을 편 이상 읽어내야 했고, 읽었으니 전해야만 했습니다. 소설보다 더한 죽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이 여기에 있노라고요.

 내일보다 다음 생이 어쩌면 더 빨리 올지 모르는, 그런 불확실성만이 확실한 이 삶. 그 안에서 영원할 것처럼 이 짧은 생을 살아내는 사람들. 이 생을 좀 더 무게 있게 잘 살아내기 위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응급의료센터의 불빛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되는 거라고, 저는 써야만 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동쪽에서 해가 뜨는 아침에도, 사선에서 힘든 줄다리기를 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예요. 또, 어김없이 어둠이 하늘을 가득 채우는 이 밤에도, 무수한 죽음과 고통이 가득한 응급실의 한 켠에 서서 그것들과 마주하는 이들이 있겠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몸에 생채기 내듯 한 자 한 자 기록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들을 떠올리니 영화나 책의 위기조차 고개 돌려 외면하고 마는 제 자신이 자꾸 바보 같아져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담이 약한 게, 뭐 어때서. 그게 뭐라고 말이죠.

 만약은 없어요. 그것이 한적한 산책길이든, 조용한 내 방 안이든, 급박한 응급실이든. 그 어디든 만약은 없어요. 세상 어디에도 만약의 드리운 곳은 없어요. 죽음의 그늘이 언제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겠죠. 살아있는 자는 나름의 생을 살아내야 할 뿐이니, 그저 하염없이 고개만 주억거릴 뿐.




 슬픔은 그 대상이 하나일 때가 가장 슬프고, 정신적인 공황 또한 원인이 한 가지일 때가 가장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많은 죽음과 슬픔은 때로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게 했다.
 (……) 하지만 내가 너무나 많은 비극을 목격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 글들을 적어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시간 고민해야 했고, 자주 울었으며, 결국에는 쓰기 위해 나의 일부분을 헐어내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 무엇도 잊지 않기 위해 이글들을 써내려 갔다는 것도.
 그를 진료했던 순간을 아무리 복기해봐도 그를 도저히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떳떳하게 살아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명징한 우울과 죽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비참함이 예정되어 있는 나의 운명을 암시하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곧 나는 마음속에서 불처럼 번져나가는 우울과 열망을 느꼈다. 우울은 확실히 다양한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우울은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깊이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깊이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죽음에 관해 쉽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것이 타인의 문제이건 혹은 자신의 문제이건 간에 아무도 그런 일을 가볍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고뇌와 고통과 그를 넘어선 우연이 혼재하는 극적이고 거대한 세계, 그 일부만을 핥으며 공감을 표하거나 어떤 죽음은 응당 왔어야 했다고 지껄이는 짓거리는 전부 미친 짓이다. 스물네 개의 갈비뼈와 폐부가 전부 으스러진 죽음에 관해서, 그리고 전신이 악성 종괴로 죄어드는 죽음에 관해서 우리는, 그 처참한 시체만을 눈앞에서 볼뿐 아무것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죽음이 자신에게 올 때까지도.
 시체는 두렵지 않지만, 죄스러움은 한없이 두려웠다.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나는 잘못했다고, 인간이 인간을 다룸에 미안하다고 덧붙여 매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못이 빨려 들어가던 찰나와, 미련 없이 못을 안고 걸어오던 그의 고독과, 최후의 시선으로 못을 받아들이던 그의 안구 따위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나 믿기 어려울 때, 어떤 광경을 보고 있으나 그 존재가 가늠되지 않을 때,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 생각할 때,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할 때, 그리고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느낄 때, 이 일련의 광경을 한 번씩 떠올려 옆자리에 앉혀본다.
 자살자가 쏟아지는 밤이 있다. 성공할 수 있는 방법과 상황을 고집스럽게 택해 자신이 가진 생의 끝을 정해버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기가 찰 정도로 많이 모여드는 밤이 있다. 내가 서 있는 병원 반경에 있는 모든 우울의 정수를 수집하는 것처럼, 정리되지 않은 자살자의 시신 옆으로 또 다른 자살자의 시신이 쌓이는 밤. 그 틈바구니에서 각자의 시신을 붙들고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부둥켜 오열하는 광경. 죽어가는 사람이나 이미 죽은 시신이 차곡차곡 누워 있는 좁은 공간에 서 있으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이인증離人症과 위화감이 전해진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 복판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 조밀하게 모여 있는 공간. 이곳에 서 있을 때마다 나는 이들에게 벌어진 일들과, 이 공간과 이곳에 서 있는 나까지 통째로 비벼 없애버리는 상상을 한다. 비비고 또 비벼, 문대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짓이겨서 제발, 여기서 벌어졌던 일들만은 되돌리기를. 시간을 돌려 지울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부디 이 지독한 슬픔의 공간이 되기를.
 그런 날이었다. 그 통곡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한 팔이 통째로 삶긴 건설공이 왔고, 그가 남은 팔로 허공을 휘적이는 동안 만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해 뒤통수를 차에 받혀 죽은 가장이 왔고, 또 새로운 통곡으로 결계가 쳐진 공간에 가스를 마신 청년이 들어와 결국 눕지도, 서 있지도, 앉아있지도 못해 숨을 수지도 못할 만큼 가혹하고 악독한 슬픔이 밀려오던 날 내 몸을 바닥에 비비고 짓이겨 꺼버리고 싶던 밤.
 그마저 사라지자 나는 바닥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오직 저주와 암흑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숱한 죽음을 단정 짓는 내 혓바닥을 잘라 내던지고 싶었다. 뽑아 짓이겨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살풍경을 뒤돌아보았다. 깜깜하고 유난한 밤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은 다시 밝아질 수 없어, 밤은 이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제발 이 병病을, 아아...... 여보 사랑해. 어서 눈을 감고 저주받은 병을 버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 사랑해 아아......"
 심박을 관찰하고 있던 나의 귓가에 그 소리는 너무 투명하고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알몸으로 날카로운 창 앞에 선 기분이었다. 시린 바닥에 널린 깨진 유리조각 위를 구르는 느낌으로 전심이 따가워왔다. 아니,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거대한 슬픔 앞에 나는 헐벗은 채 무방비 상태였다. 항거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 압도적인 오열은 수없는 비수가 되어 나의 전신을 꿰뚫었다. 관통된 자리에서 선혈이 흘러 발밑에 고였다. 아아, 나는 슬픔 앞에 너무 무력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목숨은 어떤 일보다도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가치로 받아들여지며, 사람들은 이것이 위협받으면 분개하고, 그런 사실을 널리 알리려 한다. 아무리 많은 비용을 투자한다고 해도 하나의 생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대의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해 1만 명이 외상 환자를 다루는 시스템 때문에 죽는다. 이건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흉부외과 의사나 외과 의사가 부족하다고, 혹은 외상 환자를 다루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고 시위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살아갈 날은 너무 많이 남았으되, 같이 살아가야 할 사람은 이제 중병에 걸려 변해갈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찰나였겠지. 어눌해진 말과 알 수 없는 언어들, 이전까지의 그 사람은 사라지는 병, 그것을 옆에서 목도하면서 사는 삶.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매거진의 이전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말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