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노 요코, '어쩌면 좋아'
1998년, 초겨울로 접어들어 얼굴에 닿는 공기가 제법 차가울 즈음, 저는 열일곱이었어요. 마알간 얼굴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끼고, 악관절로 벌써 5년째 치아에는 교정기를 달고요. 매달 동네 미용실에서 "(멋이고 나발이고 1도 모르는) 학생 단발이요"라고 주문한 칼 단발을 휘날리던 볼살이 아주 통통하던 열일곱이요.
제가 다니던 여고는 혼잡한 번화가 한가운데 있었거든요. 그런데 마치 정문이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는 비밀의 문이라도 된 듯, 학교에 들어서면 갑자기 그 번잡한 세상과는 똑 떨어져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한없는 고요와 평화가 감돌았어요.
소란스러울 일이라곤 점심시간 종소리밖에 없던 학교에 어울리듯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던 저와, 그런 저보다 더 소란스럽지 않았던 제 친구. 저희는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고 있었어요. 음악 방송을 하는 날이었는데, 얼른 가서 좋아하던 (지금은 아저씨가 되어버린) 오빠들을 녹화해야 했죠. 날이 이렇게 추운데 학교는 왜 아직 코트를 못 입게 하는 거냐며 친구의 팔짱을 끼고 투덜거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지하철을 향해 걷다 친구가 문득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 곧 있으면 고2야. 시간 진짜 빠르다."
"그러게. 이렇게 두 번만 더 보내면 우리 스무 살이야."
스. 무. 살. 그 말을 내뱉자마자 친구와 저는 서로 눈을 맞췄어요. 스무 살? 스무 살이라고? 맙소사, 저희는 열일곱이었어요. 태어난 날짜를 정교하게 따지면 채 몇 달 차이 나지 않는 한 학년 선배조차 마치 거대한 어른인 것처럼 느껴지던 고1. 그런데 앞자리가 바뀐다니. 그래서 스무 살이 된다니. 그렇게 빨리 어른이라니, 이럴 수가!
그 시절 세상에서 가장 소란스럽지 않았던 저희 둘은 서울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거리에 서서, 그날 태어나 처음으로 누구보다 소란스럽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스-무-사아아아아알, 노오오오오오오!!"
그 날로부터 열아홉 해가 지났네요. 곧 그때보다 산천이 딱 두 번 바뀌는 서른일곱이 다가와요. 하하. 하하하. 맙소사! 스무 해가 지난다고요? 그 시절 밀가루처럼 뽀얗던 피부에 붉게 번지던 수줍은 웃음기는 쫙 빠지고, 대신 구석구석 조금씩 진해지고 있는 칙칙한 주름기만 가득 더해진 얼굴로, 저는 그만 이렇게 다시 소리 지르고 싶어졌어요.
"서-른-일-고오오오오옵, 노오오오오오오!!!"
열일곱이던 제게 스물은 완벽한 어른이었어요.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나이, 술집에 갈 수 있는 나이, 운전면허를 따서 운전도 할 수 있는 나이,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나이. 아, 그런 어른의 나이. 하지만 막상 스물이 되니 스물한 살의 선배 어른이 있었고 그보다 진짜 어른은 스물네 살, 졸업생 선배였어요. 다시 스물네 살이 되니 서른이, 서른이 되니 서른다섯이 대단한 어른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서른다섯을 넘기니 자, 그럼 어른이란 대체 언제쯤 되는 것인가 하는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어요. 결국 어른의 나이를 더 이상 헤아릴 수 없어 셈하는 것을 멈춰야 했죠.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매해 나이는 쉬지도 않고 꼬박꼬박 먹었지요.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낯설고 두려운 일인지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씩 세상 풍파에 깎이고 상처 입으며 변해가는 자신을 마주한다는 건 얼마나 또 무서운 일인지요. 이미 열일곱의 해사한 그 얼굴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그런, 길에서 하루에도 열다섯 번은 마주칠법한 보통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라니. 그럼 마흔의 나는? 쉰의 나는? 열일곱에서 스물로, 또 서른을 거쳐 서른여섯을 지난 저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흔들리기만 할 뿐이에요. 네, 그것은 늘 낯선, 그야말로 어른의 세계입니다.
어른의 삶이란 대체 뭘까요. 자신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 세금을 낸다는 것. 가정을 꾸리는 것. 타인을 배려하고, 희생할 수도 있는 것. 때로는 이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기도 하는 것. 대의를 위해 자존심쯤 버릴 수도 있는 것. 다툼과 분쟁에 슬기롭고 현명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 싫은 사람과도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것. 입에 쓰더라도 몸에 좋은 것은 아침저녁 챙겨 먹을 수 있는 것. 가끔은 혼자 음악을 크게 틀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멋진 바에서 칵테일 한 잔에 고뇌에 빠지는 것. 뭐, 그런 것인가요.
아, 그렇다면 저는 글렀어요. 이 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대체 몇 개나 될는지. 예전에는 그나마 빙긋 웃으며 '아무것도 몰라요' 하면 용서가 됐지만,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죄가 되는 듯합니다. 왜 '로맨스가 필요해'라는 드라마에서 정유미도 그러지 않았던가요. 부끄러워하는 게 부끄러운 나이, 이제 부끄러워하는 것이 애교로 통하던 나이는 지났다고. 그래서 저는 이제 무엇으로도 부끄러움을 피해갈 수 없는 어른의 세계에 내팽개쳐져, 매일 눈만 멀뚱히 뜨고 서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 정말 모르겠어요.
네. 그러다 만났어요, 사노 요코 씨. 아쉽게도 비록 얼굴은 마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글을 마주하고서야 저는 비로소 "오예!" 하고 두 팔을 벌려 마음 편히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저도 살아갈 수 있는, 제게도 품을 내어주는 어른의 세계를 발견했거든요. 이건 마치 호기롭게 배 한 척을 몰고 집을 떠난 탐험가가 36년의 항해 끝에, 드디어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꿀이 흐르는 미지의 대륙에 닿은 기분이랄까요.
'어쩌면 좋아'는 사노 요코 씨가 육십 대가 되어 쓴 글이에요. 환갑잔치의 이미지 때문인지 저는 아직도 육십 대 하면 청장년 기를 넘어 노년의 어른이 떠오르지요. 하지만 웬 걸요. 사노 씨는 아주 생기가 넘칩니다. (글을 쓰며 떠오른 건데 뒤태만 보면 저보다 더 아리땁고, 앞태만 보면 저보다 더 에너제틱한 저의 어머니 이여사도 올해 환갑이시네요;;) 모든 것에 능수능란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늘 따뜻함과 자연스러움이 넘쳐흘러요. 사노 씨뿐인가요. 그녀의 주변 모두 하나같이 밝지요. 쿨함은 또 어떻고요. '쇼미 더 머니'가 래퍼들보다 더 스웩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요.
나이 듦이나 병이 드는 것, 혹은 죽음마저도 모두 특별하거나 슬픈 것이 아니에요. 사노 씨에게도 이웃들에게도, 하물며 그녀의 고양이에게도 말입니다. 제가 서른여섯 살은 뭘 해도 이미 너무 늦은 거 아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환갑을 넘긴 사노 씨는요. 한밤에 '엉덩이구이온천'을 찾아 홀로 모험을 하기도 하고, 축구장을 뛰어다니는 잘생긴 남자에게 설레기도 해요. 또 오래된 기모노를 해체하여 새로 옷을 해 입거나, 맛있는 음식을 친구들과 나눠먹으며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죠. 그리고 그 일상의 틈 사이로 여전히 젊음이나 나이 듦, 혹은 삶과 죽음 같은 주제들에 대해 고민을 합니다.
이런 사노 씨를 보고 있자면, 환갑이나 육십 대를 타이틀로 한 삶이 지금의 제 삶과 다른 것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의 일상은 종종 저보다 활기차고, 그녀의 고민은 제 것과 몹시도 닮아있거든요. 육십 대도 그런데, 까짓 다가올 사십 대쯤이야 한창이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어쨌든 저, 사노 씨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처럼, 자신만의 가치와 즐거움을 지닌 그런 육십 대를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이 드는 건 아무래도 친해지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나이라면 들어도 좋겠다 싶거든요. 매일 어쩌면 좋아 싶은, 그런 어른이라면.
위 틀니를 뺀 사람은 모두 야릇한 인상이 된다. 윗입술이 아랫입술에 밀려들어가서 입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움푹 들어간 곳에서 짙은 주름이 방사선 상으로 퍼져 나온다. 엉덩이에 난 구멍 같다.
거울을 보고 "거짓말, 이게 아냐?"하고 흠칫하는 순간을 제외하고, 혼자 있을 때 나는 도대체 몇 살일까.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면 세계는 어릴 때와 다름없이 나와 함께 있다. 예순 살이든 네 살이든 '내'가 하늘을 보고 있을 뿐이다. 별안간 거미집이 얼굴에 달라붙었을 때 놀라는 마음은 일곱 살 때나 마흔 살 때나 지금이나 다 같아서 그냥 내가 놀라는 것이다.
도대체 몇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걸까. 혼란스럽기는 아홉 살 때보다 더하고 바닥은 더 깊어질 뿐이었다. 인간은 조금도 똑똑해지지 않는다.
노망 들면 본인은 편하구나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도 안 된다. 멍하고 있는 네 살의 여든여덟 살은 의지할 곳 업는 고아나 마찬가지다. 나이를 모르기에, 자식을 못 알아보기에, 계절을 모르기에, 모르기 때문에 계속 실존 그 자체에 대한 불안에 떤다.
'죽는 것은 늘 타인'인가? 살아있는 인간에게 절대로 확실한 것은 죽는 것뿐이다.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있지만 죽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러고 보니, 내 친구의 아흔일곱 먹은 어머니가 내게, "요코 씨, 나 이제 충분히 살았어. 저승사자가 언제 데리러 와도 좋아. 하지만 오늘이 아니라도 좋아" 했었지.
나는 후네처럼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달까지는 갈 수 있어도, 후네처럼 죽지는 못한다. 달까지 가기 때문에 후네처럼 못 죽는다. 후네는 소란 떨지 않고 죽었다.
아주 먼 옛날, 사람도 어쩌면 후네처럼, 후네 같은 눈을 하고, 소란 떨지 않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 고양이 죽었어요" 하고 아라이 씨에게 보고했더니, "결국" 하고 아라이 씨는 예사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승리는 동등하게 빛난다. 그러나 패배는 제각각 다른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브라운관 속에 이 아름다운 남자만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그리로 시선이 가고 나도 모르게 눈이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작은 햇살이 비쳐 들어온다. 하지만 그뿐이지요. 그때그때의 기쁨. 사람은 어떤 불행이 닥쳐도 작은 기쁨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작은 기쁨을 많이 발견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비결임에 틀림없다.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전철 안에서 미인 앞에 선다. 그 정도로 괴로운 인생인 거지요. 그런 거지요.
내가 갖고 싶어 하니까, 후루야 씨는 웃으며 "아마추어는 꽃이 피어 있을 때 갖고 싶어 해요"라고 했다. "언제가 좋은데요?" 하고 묻자, "꽃이 끝나고 잎도 마르고 구근만 남았을 때"라고 해서 '그렇군'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에리코 씨와 후루야 씨가 수선을 가지고 와줬다.
꽃과 봉오리가 많이 붙어 있었다. 내가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할 수 없지' 하고 가져와준 걸까. 후루야 씨는 "조용히, 조용히, 꽃이 눈치 채지 않게"라고 말하며 살그머니 조심스럽게 내게 수선을 건넸다.
20분을 더 달리자 무서움이 어둠 그 자체가 되어 나를 짓눌러왔다. 그 무서움은 곰이 튀어나오거나 권총을 든 강도가 튀어나오거나 하는 종류의 무서움이 아니었다. 왠지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만약에 곰이 나왔다면 "아아, 다행이다, 나 무서워" 하며 곰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정도로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무서움이었다.
풍채가 좋았던 어머니는 지금은 오그라들어 뼈만 남았다. 몸이 줄어들어 뼈만 남았는데도 어쩐지 무겁다. 이것은 육체의 무게가 아니라 89년이라는 인생의 무게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말했다.
"내가 태어난 건 말이지- 그래-, 내가 아주 작았을 때였어."
코 짱의 죽음이 나에게 가져온 쇼크, 그것은 지금까지 전혀 느낀 적 없던 외로움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하고도, 오빠가 죽었을 때 하고도 달랐다. 우리는 늙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누구에게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 앞으로 계속 산다는 것은, 내 주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계속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그런 외로움인 거다.
한 달 전에는 바닥을 두드리며 울었는데, 지금 나는 텔레비전의 바보 프로그램을 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잔혹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계속 웃는다.
못생긴 채로 밝게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살아온 나. "못생긴 건 저쪽 보고 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너, 네 얼굴이나 보고 말해라!!" 하고 되받아 쳐 줬던 나다. 수술 후에는 모두 애매모호한 비슷한 얼굴이 된다. 아아, 세계는 이런 식으로 평평해지는구나. 울퉁불퉁함이 있어야 이 세상이 세상다운 건데.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아, 눈알이 얼굴 안에 묻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초롱아귀같이 눈알이 얼굴 앞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하루 온종일 내가 내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한다면 살아갈 수 없겠구나. 옛날 일기를 봤더니, '남자들은 내 얼굴과 어떻게 타협을 해 온 걸까'라고 쓰여 있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이 나이에 남자를 호리는 전쟁터에 나갈 일도 없다. 세상을 옆에서 볼뿐이란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인가. 노년이란 것은 신이 내려주신 휴식이다. 온갖 의미에서 현역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쓸쓸한 일만은 아니다. 폭신폭신하니 기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새끼손가락이 구부러진 것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천릿길도 멀지 않고 간다. 하지만 마음이 구부러진 것을 고치는 사람이 이웃에 있어도 가지 않아"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내 마음이 구부러진 걸 나 자신이 어떻게 안단 말이야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 위대한 사람의 어머니가, 욕정이란 건 몇 살까지 남아 있을까란 질문을 받고, 부젓가락으로 마냥 재를 휘저었다고 한다. 역시 재가 될 때까지란말인가.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걸까. 그렇다면 나는 고목인가. 나는 여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인 걸까. 혹은 사람도 아닌 걸까.
이런 나이가 되어서조차 왜 경주 라인에 남아 있어야 하나. 우린 지쳤다고. 지친 사람은 당당하게 지치고 싶다고.
이제 인류는 장로의 지혜란 것이 없어졌다. 장로는 괴로운 인생을 적어도 40년은 음미하면서 씹는담배 같은 쓴 즙을 계속 빨아야 한다. 그 쓴 즙이 인생의 지혜인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장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 자체가 파괴되어 버린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개인으로 싸워야 한다. 지금 사회에서는 늙은 몸과 마음은 방해물일 뿐이며, 장로라는 것은 너무 오래 살아서 세금만 거덜 내는 존재인 거다.
그럼에도 나는 적어도 현역에서 내려와서 15년쯤은 노인인 상태를 즐기고 싶은데, 하지만 어떤 노인이 되면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동네는 거리와 집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길모퉁이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외침 소리와 냄새와 잡다한 소음이 만들어내는 거다.
나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아득바득 살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아이가 다 자라고 나자 나는 내 할 일을 다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별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면서 밥 먹고 똥 누고 잤다. 깔깔 웃으며, 시선은 하늘보다는 내가 발을 디딘 땅을 향하고, 봄을 알리는 머위 꽃대를 찾으러 가서 감동하고, 도둑처럼 머위 꽃대를 따다가 조림을 만들어 밥에 올려놓고 "맛있어" 하고 감탄했다. 그리고 땅바닥에 딱 붙어 활짝 핀 이름 모를 작은 하얀 꽃을, 쪼그리고 앉아서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다.
그럴 때, 나는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행복하구나, 이런 행복은 태어나서 처음이군, 오늘은 죽지 않아도 되겠다, 하고 생각했다. 살아야 할 이유 없이 살아도 사람은 행복한 거야, 고마운 일이야, 고마운 일이야 하고, 실실 웃었다. 죽음의 계곡을 향해 걸어가면서 실실 웃는 나의 모습에 흠칫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 얼굴은 계속해서 실실거렸다. 나는 행복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