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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2. 2017

새로운 삶은, 없다

- 레나 모제·스테판 르멜, '인간증발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었어요. 가스레인지에 팬을 올리고 계란을 꺼내러 냉장고로 향했는데, 꽤 오래전 사놓고 먹지 않은 치즈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유통기한과 오늘의 날짜를 셈하는 사이 이미 팬은 달궈질 대로 달궈져 버렸지요. 일단 불을 꺼야겠다 하며 달려갔는데 손에 있던 물기가 톡, 하고 팬 위로 떨어졌어요. 그리고 떨어진 물방울은 팬 위에서 지지직, 하고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요. 네, 증발했어요.

 저는 사람입니다. 제 몸은 고체에 가깝지만, 내부의 약 70%는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액체라고 볼 수도 있는 존재죠. 하지만 그런 저를 달궈진 팬 위에 올린다 해도 아마 전 결코 기체가 되지 못한 채, 그저 까맣게 그을린 덩어리로 남고 말 거예요. 그런데 이 책 제목 좀 보세요. '인간증발'이라니. 인간이 정말 증발할 수 있는 걸까요?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유황 가득한 온천의 수증기 속에서 과거를 깨끗이 씻어 내려고 찾아온 도망자들의 이야기는 책과 영화, 연극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은유에서 증발을 뜻하는 일본어 '죠-하츠蒸発'가 유래되었다.






 이십 대 초반, 일본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요. 그때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종종 그리운 표정으로 '버블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곤 했어요. 거품 경제로도 알려진,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이어졌던 일본의 부동산 불패 신화의 시기 말이에요. 이때는 1년 만에 집 값이 세 배로 뛰기도 하고, 지가는 5년 만에 4배로 뛰기도 했대요. 한 동네에 사는 모두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부자라 느끼던 때였다고 해요. 이 무렵엔 세계 20대 기업 안에 일본 기업이 무려 16사나 되었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거품과도 같은, 실체 없이 말뿐인 성공이었어요. 곧 이어진 경제 위기로 일본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복합적인 불황의 성장률 0%인 경제 침체 시기를 겪게 되지요.

 주가도 지가도 폭락하고, 영원할 것처럼 승승장구하던 대기업들까지 속속 망해갔어요. 그러니 힘없는 서민들은 오죽했을까요. 망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끝도 없이 생겨났습니다. 전 재산을 잃었고, 살 집은 사라졌고, 회사는 무너졌으며, 당연히 취업문도 닫히고 말았죠. 이 시기 일본에서는 연간 12만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고, 약 3만여 명이 자살했다고 해요. 하루 평균 90명이 자살하는 꼴이었어요.



 하루아침에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빚에 쪼들리며,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잃은 사람들. 그들은 종종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곤 했습니다. 혼자 혹은 가족 전체가 감쪽같이 종적을 감췄지요. 이런 사람들의 수가 늘다 보니, 오죽하면 이들을 돕는 이삿짐센터까지 생겼어요. 

 빚을 갚을 수 없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 야반도주를 택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이렇게 야반도주한 사람들의 수가 매년 12만 명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이런 사건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무늬는 이삿짐센터지만 은밀히 야반도주를 돕는 업체들도 늘어났다. '요니게夜逃げ'는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어로'요'는 '밤'을, '니게'는 '도주'를 뜻한다.



 하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비단 경제적인 것뿐만은 아니었어요. 사는 동안 인간의 고통이 어디 돈 뿐인가요. 사랑 때문에, 불가촉천민이라는 출신 때문에, 가족과의 갈등 때문에, 일터에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험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이유는 셀 수없이 많아요. 하지만 입 모아 이야기하는 건 결국, 실패했다는 거예요. 일과 사랑과 가정, 그리고 자신의 삶에.

 "가족과 지인들은 사회에서 도망치는 것을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본 사회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개인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죠."
 과거에 국가 공무원인 경찰관으로 일했던 그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자살과 증발 모두 사회적인 절망의 표현으로 그 원인은 똑같다. 실적, 자기반성, 자기희생을 강요받으면서도 끝없는 경제 위기로 인해 빈곤해지다 보니 일본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는 힘을 휘둘러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모리배나 악덕 사채업자, 일부 고용주들을 비난한다. 또한 그냥 운명이려니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비판한다. "증발이라든지 사무라이 할복 같은 일본 악습 뒤로 숨어드는 일이 이제는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증발을 택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있을 때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알아요. 저도 실패가 싫어요. 실패가 몹시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늘 조바심을 내며 살았어요. 돌이켜보면 저를 무엇보다 공포에 떨게 했던 건, 실패 그 자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보다는 실패한 이들 중 상당수가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다 어떤 식으로든 망가져버리는 모습이 무서웠어요. 하지만 누구나 실패를 하며 산다는 것, 실패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타인의 실패에 그리 오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실패에 대해, 그러니까 제 자신의 실패에 조금 더 관대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건 꽤 오래 살얼음 위를 걷듯 마음을 졸인 후 깨달은 교훈이었지만요.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의 좌절로만 끝나지 않아요. 실패에서 촉발되는 고통 위에 일본은 특유의 독특한 십자가를 하나 더 드리우는데요. 바로 수치심입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 부끄러움은 그저 잠시의 감정이 아닌가 싶지만, 사실 이 수치심은 일본인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에요. 이것이 어찌 보면 '일본 증발'의 가장 큰 요인인 거죠.

 수치심과 증발은 모두 못할 짓이지만 마사오는 이 중에서 그나마 후자가 낫다고 생각해 그 길을 선택했다.
 사카에가 보기에 일본 열도는 '압력솥' 같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려진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다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린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은 과거의 관습 속에서 살아간다고 쓰고 있다. 일본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윗사람들(조상, 부모, 교수, 심지어 일왕)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다. 이 빚을 갚는 것은 체면과 관련된 문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 빚을 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를 당해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질까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행동한다. 빚을 지고 있다는 이 독특한 감정은 의무를 요구한다. 그중 첫 번째 의무는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의무는 너무나도 강력해서 조그만 실수에도 일본인들은 크게 자책한다. 결국 예의를 지키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증발이나 자살을 선택한다. '일본인들은 실패, 수치심, 매정한 거절을 견디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루스 베네딕트가 쓴 글이다.



 자, 그럼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자연으로 회귀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아니더군요. 본디 도망자에게는 한적하고 탁 트인 자연보다 사람 사이에 섞여 고개만 숙이면 존재를 숨길 수 있는 대도시가 안전한 법이죠. 그러나 도시의 양지에는 그들을 받아줄 곳이 없어요. 그들은 사람들 무리가 지어낸 그림자 밑으로 들어가 짙은 어둠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른 세상, 그것은 이 세상 안에 존재한다."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가 했던 말이다 이곳이 바로 증발한 사람들이 비밀리에 찾아오는 곳, 과거를 세탁하고 새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조용한 공간인가?



 지옥을 피해 간 곳이 천국이라면 좋겠지만, 오히려 더한 지옥이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도쿄의 산야山谷나 오사카의 가마가사키釜ヶ崎가 바로 그곳이에요. 아주 오래된 과거부터 부랑자들이 끊이지 않고 찾는 땅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이 곳으로 들어와 무명의 삶을 살게 되죠. 여기에서 그들은 추위와 질병, 굶주림 등으로 고통받고 외로움에 몸서리치다 결국은 서서히 죽어갑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그 시간을 못 견뎌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도 적지 않고요.

 정말 "정상적인" 사회의 시선에서 보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근처로 오는 것도 꺼리죠. 오죽하면 일본 정부는 못마땅한 속내를 슬쩍 드러내어 지명에서 산야라는 이름을 지워버리기까지 합니다. 사회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그게 아니라면 눈에 띄지라도 않기를 바라는 공동체의 은밀한 열망이 발현된 거예요. 

 산야山谷는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곳이다. 기는 산야를 가리켜 도시 속의 도시, 범죄자와 부랑자, 노숙자, 빈민들이 득실거리는 지저분한 소굴이라고 했다. 도쿄의 게토라고 할 수 있는 산야를 지워버리고자 일본 정부는 '산야'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없애버렸다. 하지만 산야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택시기사들은 불길한 산야 쪽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들에 따르면 산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인간, 모두에게 잊힌 인간, 이름 없는 인간'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관심 있는 것은 오사카 남부에 위치한 동네 한 곳뿐이다. 바로 가마가사키釜ヶ崎. 사람들은 줄여서 '가마'라고 부른다. 도쿄에 산야가 있다면 오사카에는 가마가사키가 있다. 과거와 단절한 사람들,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이름마저 없어진 사람들의 은신처.



 하지만, 무엇도 사라지지 않아요. 사회적 지명이 지워진 무명의 땅이 여전히 존재하듯, 사회적 이름을 버린 무명의 사람들 역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은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해요. 하루는 매일 반복되어 끼니를 채울 시간은 다시 다가오고, 계절은 또 돌고 돌아 혹독한 겨울이 가까워지니까요. 결국 그중 누군가는 푼돈의 유혹에 못 이겨 버려진 땅 후쿠시마로까지 흘러가기도 해요. 그들에게 설령 어떤 위험이 있든 한 번 사라졌던 이들이니 사회에서 보자면 문제 될 일도, 또 마음의 부담도 그만큼 덜하다는 계산일지 모릅니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사회를 벗어난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서서히 자살해가는 셈이죠."






 음, 그렇잖아요. 공책에 글씨를 쓰다 마음에 안 들면 쓱- 찢어버린 후에 새 페이지를 펴면 그만이죠. 컴퓨터라면 포맷을 하든가, 게임이라면 리셋하고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고요. 하지만 인생이 실패한다면, 그리고 그게 정말 견딜 수 없이 큰 실패라면요. 과연 우리는 그 실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갈 건가요, 아니면 그 실패에 맞설 건가요? 만약 도망간다면 어디로 갈 거죠? 과연 도망간 인생은 게임을 새로 시작하듯 그렇게 말끔히 새로 써질 수 있을까요?

 "새로운 삶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망친 것이니까요. 그게 다죠. 도망치는 게 떳떳한 일은 아니죠. 돈도, 사회적 위치도 없어지거든요. 오직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내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 현재는 버겁지 않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가볍게 지나간다. (......)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말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일자리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아내가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있지만 그렇게 계속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짐짝 같은 테루오, 무능력한 테루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빨갛게 달군 쇠처럼 내게 와 닿았다. 부끄러워서 외출도 하지 않았다. 다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내 자신이 두려웠다. 형편없는 놈 아닌가? 내 나이 이제 서른 살이다. 숨어버리는 것은 쉽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살면서 지은 수도 없이 많은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꿉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요. 우리의 상상 속에서 그것은 한없는 자유와 달콤함을 주지만, 현실에서 그 삶을 택한 이들이 처한 현실은 그것과는 정반대에 가까워요. 안락함이나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날지도 못하고 땅에 발을 붙이지도 못한 채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하는 삶.

 더럽고 냄새가 나서 비참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의 무기력한 눈빛, 말라비틀어지고 축 쳐진 몸, 절망감이 전해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낮이었지만 우리 앞을 방황하는 사람들은 처참하게 버림받아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들이며 간혹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다. 이들은 가장 밑바닥에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제 지금까지의 물음표들을 깨끗이 지우고, 다시 새로운 물음을 나에게 던져야 할 때입니다. 실패와 수치심을 피해 증발하지 않고 나를 제대로 일으키기 위해,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요. 아울러 현재 그러한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사회나 "보통사람의 시선으로서가 아닌, 이 세상에 속한 일부로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지도 생각해야 해요. 이러한 고민 없이는 곧 "한국증발"이라는 책을 소개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에요.

 웬일인지 그녀는 미소를 짓고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나를 유령 취급하지 않고 바라본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사람처럼 봐주는 게 실로 오랜만이다. 갑자기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인생이 칠판과 같다고 생각한다. 검은색 칠판에 색분필로 내용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꿈을 그리지만 너무나 빨리 지우개로 지워진다. 남아 있는 것은 결국 검은색과 흐릿하게 지워진 기억뿐이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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