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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Jan 10. 2018

반짝반짝, 마음을 전하는 포포 씨

- 오가와 이토, '츠바키 문구점'

 하얀 도화지를 보면 어떠세요? 저는 있죠, 우선 한숨부터 나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어떤 영감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막막해져요. 이 하얀 도화지에 뭘 채워야 할지, 어떻게 그려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설령 뭔가 떠오른다 해도요, 실제로 그려보면 상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바로 좌절해버리고 말아요.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책을 사서 선부터 차근차근 연습도 해보고 전문가한테 배워도 봤는데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림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못 그립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글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져요. 대단한 달필까지는 아니더라도 쓰는 게 겁나지는 않아요. 그게 글씨 그 자체든 문장이 됐든, 어쨌든 두려움보다는 기쁨이 더 앞서서 신나게 써나 갈 수 있어요.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즐겁고요. 그래서인지 저는 유독 편지 쓰는 걸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걸 적어도 저는 아직 찾지 못했거든요.


 그림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지만, 한편으론 제가 못 하는 게 글이 아닌 그림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은 업으로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내보이지 않아도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잖아요. 하지만 글은 다르죠.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어요. 핸드폰 메시지니 카톡이니 메일이니, 빠르고 편한 수단들이 눈뜨면 새롭게 생겨나는 세상이지만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직접 써내야 할 필요가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꼭 편지로 말을 건네고 싶은 상대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소중한 사람에게는 너무 쉽거나 빠른 방법 말고 굳이 수고를 들여 마음을 전하고 싶은 법이니까요.


 아, 그런 때에 만약 제가 글을 잘 쓸 수 없다면 어떨까요. 상상만 해도 벌써 슬프고 고통이 전해져요. 아마 몇 날 며칠 도통 잠도 못 자고 식사도 거르고 눈물로 눈이 퉁퉁 부은 채 발만 동동 구르겠죠. 그러다 우연히 츠바키 문구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저도 주저 없이 그곳을 찾아 문을 두드릴 거예요. 그곳이 어디에 있든 분명.




 츠바키 문구점은요. 일본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즈넉한 고도古都 가마쿠라의 작은 마을에 자리하고 있어요. 동백나무라는 뜻의 츠바키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게 앞에는 커다란 동백나무 한 그루가 긴 세월 그 자리에 서서 문구점을 지키고 있지요.

 아이들의 등하교 시간이 아니면 인적도 많지 않은 그곳에 아직 20대인 젊은 사장 포포 씨가 있답니다. 사실 포포 씨의 이름은 아메미야 하토코라고 해요. 하토코가 바로 인근에 있는 신사 쓰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 유래된 이름이거든요. 하토=비둘기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별명이 포포가 됐다네요. 일본은 비둘기가 구구 우는 대신 포포 하고 운다는군요.


 겉에서 봤을 땐 영락없는 오래된 문구점인데,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사실 포포 씨는 대대로 대필업을 해오던 아메미야 가의 11대 대필가입니다. 어려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 대신 할머니 손에 자라며 가업을 잇기 위한 수련을 계속했다고 하는데요, 할머니는 제법 혹독하게 포포 씨를 가르치셨나 봐요. 그래서 포포는 아직도 할머니라는 호칭보다 선대라 부르는 게 더 편하다는군요.

 또래와 노는 대신 대필가가 되기 위한 수련을 계속하는 건 어린 포포 씨에게는 너무 가혹했을 거예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포포 씨 마음엔 반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대요. 그리고 대필이란 상대를 속이는 일, 거짓말이라 생각하기도 했다는군요. 그런 포포 씨의 물음에 선대는 이렇게 답하셨다고 해요.

 "사기라고 생각되면 사기라고 생각해. 하지만 편지를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사람이 있어. 대필가는 옛날부터 가게무샤(적을 속이기 위해 대장으로 가장시킨 무사 - 옮긴이) 같은 것이어서 절대 양지는 보지 않아. 그렇지만 누군가의 행복에 도움이 되고, 감사를 받는 일이야."
 "그렇지?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어도 제과점에서 열심히 골라 산 과자에도 마음은 담겨 있어. 대필도 마찬가지야. 자기 마음을 술술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문제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대필을 하는 거야. 그 편이 더 마음이 잘 전해지기 때문에. 네가 하는 말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좁아져. 옛날부터 떡은 떡집에서,라고 하지 않니. 편지를 대필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대필업을 계속해나간다, 단지 그것뿐이야."


 어쨌든 포포 씨, 정말 대필업을 싫어했대요. 아마 정확하게는 대필이 아니라 선대의 엄격함이 싫었던 거겠죠. 결국 포포 씨는 그대로 집을 떠나 세계를 떠돌며 선대와 반목을 계속했고, 선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끝내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지요. 결국 선대의 바람대로 펜을 잡고 대필가가 된 거예요. 비록 화해할 수도 손잡을 수도 없었지만, 선대의 정신만큼은 포포 씨에게 그대로 남겨진 거죠. 그리고 대필가가 된 지금에 와서는, 선대가 생전에 주었던 많은 가르침들이 포포 씨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선대는 아름다운 글씨에 철저히 집착해서 죽을 때까지 정진을 거듭한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독선에 빠지는 것은 항상 경계했다.
 아무리 달필이라 해도 말이야, 아무도 읽지 못하는 글씨는 너무 멋을 부려서 되레 촌스러워지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것이 선대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글씨를 써도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슬픈 편지는 슬픔의 눈물에, 기쁜 편지는 기쁨의 눈물에 각각 우표를 적셔서 붙이라고 하던 선대의 가르침이 생각났다.




 솔직히 말하면 저, 처음에는 포포 씨가 이런 작은 마을의 문구점에서 대필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답니다. 그런데 왠 걸요. 포포 씨의 오래된 문구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수술을 앞두고 옛사랑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 긴 결혼생활을 마치고 이혼을 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편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천국으로부터의 편지, 친 자매보다 가까웠던 친구에게 보내는 절연 편지 등등. 저마다 다양한 이야기와 사연을 품고서 말이에요.

 "그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언덕을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 같았다.
 "나 말이에요, 앞으로 남은 인생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살고 싶어요. 거짓말은 종류가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 또 하나는 상대에게 하는 거짓말. 그 여자는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게 말이죠, 용서가 안 돼요. 내가 싫으면 싫다고 똑바로 의사표시를 하면 좋았을걸. 그래서 내 쪽에서 먼저 재단 가위를 든 거예요."
 "재단 가위요?"
 "네, 그래요. 자를 때는 힘껏 자르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조금이라도 이어진 부분이 남아 있으면 의미가 없어요. 깨끗하게 싹둑 자르는 편이 서로 아픔이 적게 끝나죠. 내가 내 손으로 자르는 것은 공평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제삼자인 당신한테 부탁하러 온 거예요. 당신, 프로 대필가잖아요?"


 포포 씨는 일단 수락한 의뢰는 자신의 일처럼 소중히 여겨요. 그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정성을 다해 편지를 쓰지요. 포포 씨가 신경 쓰는 건 단지 글뿐만이 아니랍니다. 문체나 어투, 편지지와 펜의 농담, 우표의 디자인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정말 포포 씨 같은 대필가라면 어떤 편지라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답니다.

 조문 편지는 평소보다 훨씬 연한 색의 먹으로 쓴다.
 먹색을 옅게 하는 것은 슬픈 나머지 벼루에 눈물이 떨어져 옅어졌다는 의미다. 쓰는 동안, 뇌리에 몇 번이고 마담 칼피스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극히 한순간이지만, 내 손과 마담 칼피스의 손이 포개져 함께 붓을 받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봉투 내지로는 겨울 밤하늘 같은 짙은 감색의 얇은 종이를 사용해서, 어둠 속에서 별처럼 희망이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자 했다.
 수분이 빠져서 진해진 잉크는 코튼 종이와 궁합이 좋아서, 결과적으로는 품위 있고 청초하게 마무리됐다. 재색 잉크로 이쪽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슬픈 색은 아니다. 구름 너머에는 분명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우표는 마지막까지 좀처럼 정하지 못했다.
 봉투 겉면이 얼굴이라면 우표는 얼굴의 인상을 결정하는 루주 같은 것. 루주를 잘못 바르면 얼굴 자체의 인상을 망친다. 고작 우표, 그러나 우표. 우표 고르기는 편지 보내는 사람의 감각을 보여줄 기회다.
 백지에 쌀 때 정원에 핀 황금부추꽃 한 송이를 곁들였다. 황금부추꽃의 꽃말은 '이별의 슬픔'이다. 이것을 다시 같은 재질의 종이로 싸서 주소를 썼다.


 하지만 포포 씨가 그 무엇보다 오래 고민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건 바로 마음이에요.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또 보내야만 하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그 편지를 받아볼 사람의 마음. 포포 씨는 그 마음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기고 따스하게 어루만져줘요. 그리곤 사연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본 후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자에 옮겨 담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를 따스하게 지켜봐 주었던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걸 이해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부부로서 해로하지 못한 데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것. 그렇지만 앞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갈 두 사람의 인생을 응원해주길 바란다고 솔직하게 상대에게 전하는 것.
 중세에는 러브레터를 '염서(艶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 소노다 씨가 사쿠라 씨에게 보낸 편지도 염서일까. 거기에는 구석구석까지 소노다 씨의 마음으로 가득하다. 얼핏 평범한 편지로 보이겠지만, 그 빨간 한 방울은 분명 사쿠라 씨의 가슴에도 배달될 것이다.
 그런 아련한 마음을 배달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고 싶었다.
 모양이 가지런한 것만이 아름다운 글씨는 아니다. 온기가 있고, 미소가 있고, 편안함이 있고, 차분함이 있는 글씨. 이런 글씨를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카렌 씨는 절대 퉁명스러운 미인이 아니다. 카렌 씨는 그 꾸미지 않은 마음이 아름답다. 그런 카렌 씨다운, 카렌 씨밖에 쓸 수 없는 글씨를 쓰고 싶었다. 마치 카렌 씨 그 자체인 듯한.
 하지만 아름답게 쓰는 것만이 대필가가 할 일은 아니다.
 물론 축의금 봉투나 표창장, 이력서 등을 쓸 때는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요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계로 쓴 활자 같은 글씨를 아름답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 쓰는 글씨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맛을 더한다.


 물론 편지라고 모든 일을 다 받는 것은 아니에요. 포포 씨, 착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알고 보니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상대에게는 단호하게 쓴소리를 하며 거절도 할 줄 아는 단단한 사람이더군요. 예를 들어, 원고 청탁을 의뢰하는 편집자의 무례한 태도를 마주한 포포 씨는 이렇게 말해요.

 "나는 대필하는 사람이 맞아요. 부탁하면 뭐든 쓰는 일을 하죠. 그러나 그건 곤란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예요. 그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이라고요. 그런데 당신은 그저 응석만 부리고 있을 뿐이잖아요. 정면에서 제대로 상대를 마주 보고 있나요? 요즘 세상에 대필도 시대에 뒤떨어진 직업이지만요, 우습게 보면 곤란해요.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물러터지지 않았다고요! 그런 건 직접 써요!"
 일본에서는 편지를 '手紙(데가미)'라고 쓴다. 중국에서 '手紙'는 화장실 종이를 의미한다. 방금 의뢰받은 내용은 편지가 아니라 화장실 휴지다. 더러워진 엉덩이를 닦아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문구점 위층에서 홀로 생활하는 포포 씨의 일과는 꽤나 단조롭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문총의 물을 갈아요. 그리고 문구점을 청소하고 차를 내려 마시는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죠. 뭐, 사실 작은 마을 초등학교의 문구점이 그렇게 바쁠 리 없잖아요. 하지만 포포 씨의 일상을 따뜻하게 지켜봐 주는 이웃이 있어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중에서도 포포 씨의 가장 친한 친구는 바로 옆집에 사는 바바라 부인입니다. 바바라 부인은 나이는 들었지만 연애가 끊이지 않는 매력적인 분이에요. 무엇보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는 멋진 여성이죠. 바바라 부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연륜이 묻어나는 지혜로 가득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천진한 순수함이 느껴집니다. 그런 그녀는 때로는 밝고 때로는 사려 깊게, 때로는 가족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그렇게 포포 씨와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어요.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목 너머로 별이 반짝거렸다. 그러자
 "내가 말이지, 포포한테 한 가지 좋은 것 가르쳐줄게."
 바바라 부인이 말했다.
 "뭐예요, 좋은 게?"
 "내가 줄곧 외워온 행복해지는 주문."
 바바라 부인이 후후후 웃었다.
 "가르쳐주세요."
 "있지, 마음속으로 반짝반짝, 이라고 하는 거야. 눈을 감고 반짝반짝, 반짝반짝,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말이지 마음의 어둠 속에 점점 별이 늘어나서 예쁜 별하늘이 펼쳐져."
 "반짝반짝, 이라고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응, 간단하지?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이걸 하면 말이지,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전부 예쁜 별하늘로 사라져. 지금 바로 해봐."
 바바라 부인이 그렇게 말해주어서 나는 그녀에게 팔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천천히 걸었다.
 반짝반짝, 반짝반짝, 반짝반짝, 반짝반짝.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마음속 어둠에 별이 늘어나서 마지막에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마법 같아요."
 "그렇지? 이 주문은 아주 효과가 좋으니까 써봐. 내가 주는 선물이야."
 바바라 부인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감사합니다, 하고 나는 별을 보느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바바라 부인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예요?"
 문득 물어보고 싶었다.
 "당연히 지금이지!"
 역시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게요, 지금이 가장 행복하죠."
 바바라 부인을 따라 한 말은 아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혈육인 선대에게는 부드럽게 대하지 못했으면서 이웃에 사는 바바라 부인과는 이렇게 친하게 카망베르 치즈를 먹고 있다. 선대는 선대대로, 만난 적도 없는 펜팔 친구에게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어쩌면 세상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연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부족한 점을 채워주다 보면, 설령 혈육인 가족과는 원만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어디에서 지지해줄지 모른다.


 바바라 부인 외에도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미녀 선생님 빵티도 포포 씨의 좋은 친구예요. 빵티는 빵을 잘 만드는 티처라는 뜻이래요. 스타일도 좋고 씩씩하고 무엇보다 사랑에 용감한 여성이에요. 음, 그리고 표현은 거칠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남작도 있고요. 아, 큐피! 큐피는 포포 씨와 편지 친구예요. 큐피와의 편지를 포포 씨는 매일 고대하고 또 정말 행복해한답니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순간, 톡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잘 다녀오렴.
 마치 내 분신을 여행 보내는 기분이었다. 편지는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다.
 부디 큐피에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그리고 큐피의 아빠, 모리카게 씨도 있어요. 모리카게 씨는 츠바키 문구점 근처에서 카페를 하고 있는데요.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여의고 홀로 큐피를 키우고 있어요. 모리카게 씨와 큐피가 애틋하게 서로를 아끼는 모습에 포포 씨는 새삼 잊고 있었던 선대와의 기억이 되살아나 눈물짓기도 해요. 

 "괜찮아요."
 나를 업은 채 모리카게 씨는 봄밤에 녹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나뭇잎들이 나와 모리카게 씨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죠. 나도 줄곧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느 날 깨달았답니다. 깨달았다고 할까, 딸이 가르쳐주었어요.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 손에 남은 것을 소중히 하는 게 좋다는 걸요. 그리고······."


 이처럼 가마쿠라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또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으면서, 포포 씨는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선대에의 미움을 조금씩 풀어나갈 수 있었어요. 오랜 시간 미워했지만 한편으로는 늘 그리워했던 존재. 포포 씨는 우연한 기회에 늘 엄한 줄로만 알았던 선대도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고민하는 한 사람의 연약한 여자였음을, 또한 포포 씨를 누구보다 사랑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엄하게 키우는 것이야말로 애정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사실이 하토코를 오랜 세월에 걸쳐 괴롭혀왔나 생각하면, 정말로 진심으로 한심해집니다. 언젠가 그 아이와 서로 이해할 날이 올까요?


 그리고 결국에는 선대와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비로소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그로 인해 포포 씨 자신이 어엿한 대필가로서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게 됐어요. 그렇게 츠바키 문구점을 둘러싼 계절이 원 하나를 그리는 동안 포포 씨는 한 뼘 크게 성장하게 되었답니다.

 미안합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서 지금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곧 가마쿠라는 수국의 계절이랍니다.
 그러나 수국은 꽃(정확하게는 꽃받침입니다만)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웃에 사는 바바라 부인이 가르쳐주었어요.
 바바라 부인은 여름이 되어도 수국 꽃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겨울을 보냈답니다.
 그동안 시든 수국은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 시든 모습이 또 그렇게 청초하고 아름답더군요.
 그리고 꽃뿐만 아니라, 잎도 가지도 뿌리도 벌레 먹은 흔적조차도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우리의 관계에도 의미 없는 계절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늘 말했죠.
 글씨란 인생 그 자체라고.
 나는 아직 이런 글씨밖에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내 글씨입니다.
 드디어 썼네요. 




 저처럼 『츠바키 문구점』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은가 봐요. 일본에서는 이미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벌써 속편인 『반짝반짝 공화국(가제_きらきら共和国)』도 나왔고요.  아, 벌써부터 츠바키 문구점과 포포 씨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언젠가 가마쿠라에 가면 츠바키 문구점에 들러 포포 씨와 차 한 잔 꼭 마시고 싶어요. 그때 저는 어떤 편지를 부탁할지 벌써부터 즐거운 고민이네요. 참, 책 뒤에 포포 씨가 정성껏 쓴 편지들이 선물처럼 담겨 있으니 꼭 읽어보시길! :)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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