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그 시선의 끝에, 봄이

- 허은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중에서

by hearida

"무엇보다 봄은

당신의 눈길로 옵니다.


눈 밝은 사람의 어떤 시선 때문에

평범한 피사체는 특별해지지요.

오래 바라본 응시의 자리에서 봄은 깨어나고요.

그래서 꽃은,

마음을 두고 자주 보내는 눈길 끝에서 핀다는 것.

다시 믿어보기로 합니다. 이 봄에도."


- 허은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중에서



어제는 오랜만에 연남동에 갔어요.

약속이 있었거든요.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어요.


그런데 지하철에서 나오자마자

잔뜩 흐리던 하늘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죠.

예전에는 그렇게 싫던 비가 어제는 참 좋더라고요.

언제부터였을까요, 비가 좋아진 건.


친구를 기다리면서 근처 카페에 앉아

오래도록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봤어요.

온 세상이 촉촉하게 물드는 모습을요.


그렇게 찬찬히

빗방울의 여정을 따르는 동안

저의 봄도 깨어났습니다.


비의 몸짓을 눈에 고이 담고

비의 소리를 귀에 깊이 담으니

비는 어여뻐지고 봄은 그 뒤를 따라왔네요.


오늘은 날이 좋아요.

하늘도 맑고 바람도 시원한

그런 좋은 날이에요.


수많은 책임과 의무와 할 일들이

우리 등을 떠밀어

이 하루를 서둘러 지나가게 하지만


그래도 잠시, 아주 잠시만 멈춰서

세상과 눈을 맞출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 시선의 끝에 당신의 봄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사랑은 어쩌면 한눈에 빠지는 것이겠지만

또한 사랑은

조금씩 물들어가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주변의 무의미한 것들이

우리의 시선에 물들어

이 삶을 풍성한 사랑으로 채울 수 있기를.


그렇게 봄이 다가와 길게 머물며

우리의 오늘을 따스하게 품어주기를.

부디 담뿍 담뿍 행복하기를.


Dusseldorf, Germany
연남동, 비오는 풍경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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