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밸 에미치 외, '디어 에번 핸슨' 중에서
오랜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어제가 생일이었는데, '오늘의 할 일'에 '친구에게 전화하기'를 떡하니 적어놓고는 끝내 하지 못한 일로 별표를 남기고 만 것이 떠올라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어제 해야 할 일이 많아 신랑은 연차까지 내고 함께 움직였거든요. 십 년짜리 보험의 중도해지랑 전세보증보험기간 연장 같은 - 이제 진짜 어른의 세계에 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을 주는 일들을 해치우고, 그 김에 내내 집에만 있는 아기 콧바람 살짝 쐬어주고. 그렇게 어찌어찌 또 한밤중이 되어서야 다 못한 일들이 떠올라 '아차' 하는 날이었어요.
친구 전화를 받자마자 '먼저 전화했어야 하는데 내 정신이 이렇다' 반은 너스레로 대화를 시작했어요. 어제 생일은 잘 보냈냐는 질문에 친구는 그냥 누워서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냐, 하긴 이제 생일도 반갑지 않은 나이다, 부모님과는 통화했냐, 이제 부모님 늙어가는 모습이 너무 잘 보여서 슬프다, 건강은 괜찮냐, 애는 잘 큰다, 그런 말들이 전화기 액정에 표시되는 통화 시간만큼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가 다시 걸겠다며 전화를 끊었어요. 아마 제가 이제 아이가 말을 제법 따라 한다며, 무슨무슨 단어도 할 줄 안다는 말을 하던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 그래그래, 하고 전화를 끊는데 마음 한편에서 혹시 내가 아이 얘기를 너무 많이 했나 그런 생각부터 들었어요. 아닌데, 아이 얘기는 그거 하나밖에 안 했는데. 그럼 말실수한 게 있나 또 지난 대화를 곱씹다, 어, 그것도 아닌데. 이상하다, 우리가 했던 얘기 속엔 이상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다 생각했어요. 내가 묻지 않은 것, 내가 듣지 못한 것에 무언가 있는 건 아닐까. 더 깊이 물었어야 했던 건 아닐까, 더 사려 깊게 귀 기울였어야 했던 건 아닐까.
우리가 함께 보냈던 여러 번의 생일을 떠올렸어요. 가끔은 거하게 취하기도 하고, 여러 명이 모여 왁자지껄하기도 하고, 오만가지 얘기들로 울고 웃기도 했던 그 시절. 너의 마음이 무엇인지 나의 마음이 무엇인지 훤히 보이는데도 그것을 또 부러 꺼내놓고 하나하나 설명하고 첨언하던 그때.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일일이 설명도 못하지만, 설명해도 도무지 친구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제 눈은 흐려진 것 같아요. 글쎄, 돌이켜보니 언젠가 저도 그런 전화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 저는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았는지, 하고픈 얘기는 다 했는지. 통화를 마치고 전보다 더 짙은 외로움을 짊어진 채 서러운 밤을 보내진 않았는지.
어쩌면 못내 다 삼키고 마는 것이 진심의 전부임을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진심을 전하고 싶어 하는 매일. 그러면서도 또 상대의 진심에는 닿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날들.
내일 다시 친구에게 전화해봐야지 다짐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되묻는, 오늘은 그런 밤입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