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닿지 못한 진심의 날들

- 밸 에미치 외, '디어 에번 핸슨' 중에서

by hearida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안타깝게도 그건 상상이 아니다. 가공을 거치지 않은 100퍼센트 천연 유기농 현실이다. 셔먼 선생님이 있지만 선생님은 시간제로 돈을 받는다. 아버지가 있지만 나한테 눈곱만큼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 나라의 반대편으로 이사 가지 않았을 거다. 엄마가 있지만 오늘 저녁에는, 어제저녁에도, 그 전날 저녁에도 부재중이다. 농담이 아니라 곰곰이 따져보면 누가 있을까? 내 앞의 컴퓨터 화면 위에는 이름 하나뿐이다. 에번 핸슨. 나다. 나에게는 그것뿐이다."


- 밸 에미치, 스티븐 레번슨, 벤지 파섹, 저스틴 폴, '디어 에번 핸슨' 중에서



오랜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어제가 생일이었는데, '오늘의 할 일'에 '친구에게 전화하기'를 떡하니 적어놓고는 끝내 하지 못한 일로 별표를 남기고 만 것이 떠올라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어제 해야 할 일이 많아 신랑은 연차까지 내고 함께 움직였거든요. 십 년짜리 보험의 중도해지랑 전세보증보험기간 연장 같은 - 이제 진짜 어른의 세계에 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을 주는 일들을 해치우고, 그 김에 내내 집에만 있는 아기 콧바람 살짝 쐬어주고. 그렇게 어찌어찌 또 한밤중이 되어서야 다 못한 일들이 떠올라 '아차' 하는 날이었어요.


친구 전화를 받자마자 '먼저 전화했어야 하는데 내 정신이 이렇다' 반은 너스레로 대화를 시작했어요. 어제 생일은 잘 보냈냐는 질문에 친구는 그냥 누워서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냐, 하긴 이제 생일도 반갑지 않은 나이다, 부모님과는 통화했냐, 이제 부모님 늙어가는 모습이 너무 잘 보여서 슬프다, 건강은 괜찮냐, 애는 잘 큰다, 그런 말들이 전화기 액정에 표시되는 통화 시간만큼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가 다시 걸겠다며 전화를 끊었어요. 아마 제가 이제 아이가 말을 제법 따라 한다며, 무슨무슨 단어도 할 줄 안다는 말을 하던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 그래그래, 하고 전화를 끊는데 마음 한편에서 혹시 내가 아이 얘기를 너무 많이 했나 그런 생각부터 들었어요. 아닌데, 아이 얘기는 그거 하나밖에 안 했는데. 그럼 말실수한 게 있나 또 지난 대화를 곱씹다, 어, 그것도 아닌데. 이상하다, 우리가 했던 얘기 속엔 이상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다 생각했어요. 내가 묻지 않은 것, 내가 듣지 못한 것에 무언가 있는 건 아닐까. 더 깊이 물었어야 했던 건 아닐까, 더 사려 깊게 귀 기울였어야 했던 건 아닐까.

우리가 함께 보냈던 여러 번의 생일을 떠올렸어요. 가끔은 거하게 취하기도 하고, 여러 명이 모여 왁자지껄하기도 하고, 오만가지 얘기들로 울고 웃기도 했던 그 시절. 너의 마음이 무엇인지 나의 마음이 무엇인지 훤히 보이는데도 그것을 또 부러 꺼내놓고 하나하나 설명하고 첨언하던 그때.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일일이 설명도 못하지만, 설명해도 도무지 친구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제 눈은 흐려진 것 같아요. 글쎄, 돌이켜보니 언젠가 저도 그런 전화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 저는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았는지, 하고픈 얘기는 다 했는지. 통화를 마치고 전보다 더 짙은 외로움을 짊어진 채 서러운 밤을 보내진 않았는지.


어쩌면 못내 다 삼키고 마는 것이 진심의 전부임을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진심을 전하고 싶어 하는 매일. 그러면서도 또 상대의 진심에는 닿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날들.

내일 다시 친구에게 전화해봐야지 다짐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되묻는, 오늘은 그런 밤입니다.


Zurich, Switzerland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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