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이사를 많이 한 기억은 없는데, 찬찬히 세어보니 지금껏 꽤 많은 곳에서 살아왔어요. 금호동 사거리의 작은 언덕배기 위에서, 군자동 어느 골목의 커다란 교회 맞은편에서, 일본 도쿄의 작디작은 기숙사 구석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곱게 내려앉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신혼의 단꿈에 젖어 곰팡이마저 아름답던 낡은 아파트에서,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 매일 소란스러운 지금의 집에서 저는 매일을 살아왔네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곳은 태어나 스물두 해를 보낸 금호동으로, 엄마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신접살림을 꾸렸던 오래된 집이었습니다. 두 사람만을 위한 작은 보금자리가 엄마가 태어나고 뒤이어 큰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이 태어나면서 하나씩 방을 늘이고 늘여, 마지막엔 마치 미로 같이 복잡했던 집.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큰외삼촌과 큰 외숙모와 어린 사촌들, 작은 외삼촌, 그리고 엄마까지 모여 북적이던 그곳의 공기를 머금고 저는 무럭무럭 자랐어요. 저는 종종 마당에 앉아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책을 읽기도 하고, 어떤 날엔 마루에 배를 대고 누워 귤을 까먹기도 했으며, 또 가끔은 빗을 마이크 삼아 거울 앞에서 유행가를 흐드러지게 부르곤 했지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였어요. 엄마는 화장대에 대고 손가락을 통통 튕기며 피아노 치는 흉내를 내던 어린 딸에게 그 이름마저 세련되게 멋지던 커다란 ‘독일형 삼익 피아노’를 사줬어요. 좁은 골목에 아저씨 여럿이 붙어 서서 낑낑대며 피아노를 옮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자그마한 디지털 피아노 정도를 기대하던 저는, 재미 삼아 긁은 복권이 1등에라도 당첨된 듯 그저 얼떨떨했습니다.
그 횡재의 배후에 큰외삼촌이 사촌 동생에게 선물한 작은 피아노가 있었다는 건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어요. 아빠 없이 자라는 딸이 혹여 기라도 죽을까 싶었던 엄마의 애간장이 그 고급스러운 피아노의 건반에 가득 녹아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엄마와 저의 삶에 깃든 첫 사치였어요.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작가 김애란의 삶에 사치가 깃들었을 때, 그녀는 맛나당에 살고 있었습니다. 손칼국수라는 요리가 신성한 노동이 되어 한 가정의 생활을 꾸리고 아이들을 자라게 한 곳. 그리고 그것이 긍지가 되어 어머니의 얼굴을 빛나게 한 곳. 하여 어머니 인생에 다시 못 올 호시절을 맛보게 한 곳. 그러니까 맛나당은 그녀의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어요. 그러나 단지 생활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그 사이사이에 화장품과 그릇, 카펫과 피아노와 같은 사치와 허영이 아름답게 포개어 놓여 있던 곳.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생활과 아름다운 사치를 적당히 머금은 맛나당의 공기를 머금고 김애란은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공기는 그녀의 폐부에 깊이 새겨져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그녀를 따라다녔어요. 상경해 머물 방을 찾던 스무 살의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나 별 무더기가 천장에서 빛나던 어둡고 선득한 방 안에서도.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들여다보거나 혹은 얼굴을 마주할 때도. 기우는 봄에 바다에 남겨진 아이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봄에도. 그리고 그녀는 그 시절의 생각과 마음을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 글로 남기고 또 남겼어요.
2002년부터 17년 동안 김애란이 기록한 삶의 다양한 순간이 담긴 『잊기 좋은 이름』. 사소한 글감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소박한 표현 안에 깊이 있는 울림을 만들어내는 김애란의 능력은 소설과 산문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빛을 발해요. 『잊기 좋은 이름』에서는 자신이 스쳐온 무수한 이름과 풍경과 사건들을 다시 꺼내어 돌아봄으로써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가 어떤 시선으로 삶과 마주해왔는지를 보여줍니다. 등단 이래 작가로서 독자들의 주목과 사랑을 벗어난 적이 없는 그녀는, 어째서 김애란이 우리에게 잊힐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증명했어요.
나를 키운 팔 할의 기대를 배반한 작은 이 할, 나는 그게 내 인생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릴 때까지 내 몸과 마음을 길러준 팔 할, 갈수록 뼈가 닳고 눈과 귀가 어두워져 가는 그 팔 할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어릴 땐 꿈이 덤프트럭 기사였고, 아는 것 적고 배운 것 없지만 '그게 다 식구니까 그렇지'라는 말로부터 멀리 달아나셨던 분, 그렇지만 아주 멀리 가지는 못하신 분. 내겐 한없이 다정하고 때로 타인에게 무례한, 복잡하고 결함 많고 씩씩한 여성. 그리고 그녀가 삶을 자기 것으로 가꾸는 사이 자연스레 그걸 내가 목격하게끔 만들어준 칼국수집 '맛나당'이 나를 키웠다, 내게 스몄다.
한 아이가 작가로 자라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한 권의 책을 채울 만큼의 단어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지 저는 늘 궁금했어요. 수만 권의 책을 읽은 사람도 있겠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밤을 글을 쓰며 보낸 이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김애란은 자신을 키워 낸 팔 할의 대지와 그 대지를 배반하고 그 위에 기어이 싹을 피워내는 이 할의 용기로 작가가 되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자라나는 사이사이, 오해하고 잘못 부르고 때로는 잠시 잊고 있었던 이름들을 하나하나 다시 기억해 글을 썼어요. 그녀가 가만히 이름을 불러내 그들과 속삭이며 마주했던 무수한 햇볕과 빗물, 혹은 따스함과 서늘함이 지나며 고랑처럼 파인 자리에 씨앗과도 같은 단어들이 남았어요. 그리고 그 단어들을 그러모아 결국 단 하나의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고.
나는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도 잘 모르는 소리를 하며 한껏 폼을 잡았다. 하지만 중간에 코르크 마개가 부서진 와인을 따기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원해 합심하는 지인들 곁에 앉았을 때, 아버지가 얹어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善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그 팔 안에서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깨닫고, 배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전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어리석어,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며 살아간다.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뭔가 '그럴' 때, 다만 '그렇다'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이 많아 아름다운 문학을 이따금 상상하면서 말이다.
너를 안고 나는 내 팔이 두 개인 것을 알았다. 나는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듯 '그래, 나는 팔이 두 개였지' 중얼거렸다. 나는 곧 내 다리가 두 개인 것과 내 입술이 하나인 것도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다 정말 내 이름을 알게 될까 봐.
초는 처음이란 말. 그러나 '비로소'란 듯도 있다. 이 겨울은 내가 번번이 맞는 겨울, 당연하되 익숙해지지 않는 겨울. 그러나 '비로소' 맞는 겨울이다. 그 사실이 특별하지 않도록 지구는 기꺼이 한 번 더 돌아준다. 아마 앞으로도 한참은 그런 식으로 돌 것이다.
- 서른,
기쁘게 한껏 부풀어 오르고 보니
곁에 선 부모가 바싹 쪼그라든 채 따라 웃고 있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 '살아낸' 거니 그럴 거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얇은 포스트잇의 찰나가 쌓여 두께와 무게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우리이기 전에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말들. 그리하여 나와 똑같은 무게를 지닌 타자를 상상토록 돕는 말들을 생각했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 아니라 나와 너로 만나는, 그리하여 한 번 더 철저히 '개인'이 되는, 그 개인의 고유한 내면을 깊이 경험해보도록 돕는 문학의 언어를.
연필 쥔 손에 힘을 주면 책에 흐릿한 홈이 파인다. 그 홈에는 내가 어느 문장에 줄 그은 순간 느낀 시간과 감정이 고인다. 그래서 가끔 그 홈이 물고랑 밭고랑 할 때 '고랑'처럼 느껴진다. 나와 나 자신을, 현재와 과거를, 우리와 타자를 잇는 먹 고랑처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이야기도 언젠가 두보의 시구처럼 누군가의 삶과 만나게 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스침이 혹 꽃잎 한 장의 무게밖에 갖지 못한다 해도. 이야기의 이어달리기, 이야기의 배턴터치가 계속되길 빈다. 대부분 연필이 길고 둥근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기울기는 어떻게 구하더라?"
그러곤 그 농담을 끝으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傾瀉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뭔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라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