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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Jul 08. 2020

나는 특수청소부입니다

- 김완, '죽은 자의 집 청소'

 일본에서의 긴 유학생활을 마친지도 벌써 15년이 되어가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공기나 그때의 기분 같은 것들은 늘 질기게 마음에 붙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때로는 어제 일보다 더 선명하게, 오늘보다 더 뚜렷하게.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떠오르는 것은 어느 여름날의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외롭다 외롭다 입버릇처럼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사치스러운 투정이라며 타박을 하셨어요. 그 말이 못내 서러워, 역시 나는 외롭다 외롭다 또 노래를 불렀지요.

 그게 정말 사치스러운 투정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일본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정말 외로웠거든요. 아무도 없었어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지나온 하루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저는 내내 입을 다물고, 그래서 늘 목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 시절엔 자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죽겠다, 죽어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은 게 아니라, 외로움이 짙으면 죽음이 친구처럼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지독한 향수병과 고독이 마음을 좀먹어 조만간 심장 전체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어요. 할 일이 없어 공부를 하고, 그러다 또 손바닥만 한 방을 닦고, 다시 이불보를 가져다 빨고 또 빨아도 하루가 너무 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는 한 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누운 채로 얼마나 있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참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내 좀이 쑤시기 시작한 몸보다, 잡념이 지배하는 머리와 그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이 사람을 괴롭게 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나쁜 생각은 쉴 틈 없이 가지에 가지를 뻗어 이대로 죽는다면 어찌 될까에 이르렀습니다.

 글쎄, 이대로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한동안은 아무도 모르겠지요. 한국의 가족들은 그저 공부로 바쁘려니 할 테고, 기숙사 친구들은 학교 일로 나갔으려니 하겠지요. 기껏해야 핸드폰 문자나 되던 시절. 영상통화도 sns도 없으니 사람들은 저의 부재를 한동안은 모를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며칠이 흘렀겠죠. 그즈음이면 한국에서는 전화가 빗발치고 기숙사 문 밖에선 누군가 문을 두드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나지 않고 그저 기분 나쁜 냄새만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억지로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오겠지요. 그럼 그제야 처참한 저의 몰골을, 외로움과 그리움이 좀먹은 저의 몸뚱이를 사람들은 보게 될까요.

 이내 슬퍼할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나온 삶과 닿지 못한 미래를 떠올리다, 제가 남기고 가는 것들에 생각이 다다릅니다. 남이 보기에 부끄럽거나 불편하거나 곤란한 것들. 학창 시절부터 매일 빼곡히 써놓은 일기 속에는 엄마를 원망하는 글도 있고, 친구를 샘내거나 몰래 벌인 나쁜 일도 적혀 있는데. 어느 책 커버 안쪽에는 좋아하는 사람을 몰래 찍은 사진도 넣어놨는데. 다 낡아 구멍이 나려는 속옷은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편해서 아직도 갖고 있는데. 그런 건 누가 치우게 될까요? 엄마? 친구? 아니면 다른 누군가?


 하지만 결국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을 통과하는 것이 조금 고되기는 했지만 잘 살아남아 그땐 그랬지 하며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어요. 저를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다만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제게는 그저 엄마에게 등짝을 맞을만한 지독한 상상에 불과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가난에 못 이겨, 마음의 우울이 짙어, 기댈 곳이 어디에도 없어, 그러다 보니 어찌어찌, 그만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은 누가 치우게 될까요.




 '죽은 자의 집 청소'의 작가 김완은 그러니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불현듯 세상을 혹은 집을 떠나버린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을 치우는 사람. 때로는 사체의 일부가, 핏덩어리가, 혹은 거대한 오물이, 아니면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쓰레기가 남은 집을 아무것도 없던 무無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특수청소부라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일과 관련한 질문들을 건네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결코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그저 누군가 해야 하는 서비스일 뿐이라 말하지요.


특수청소를 하는 것은 남다른 일, 특별하고 어려운 행위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대한 처치일 뿐 그 일 자체가 특별하지 않다.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을 누군가가 대신하는 것뿐. 그래서 세무서가 발행한 사업자등록증엔 이 사업의 업태를 '서비스'라고 표기한다.


 그는 무수한 현장에서 흔적으로 만난, 이미 떠나버린 이들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결심하고도 분리수거까지 깔끔하게 해 놓은 여자의 집에서는 그녀의 착한 마음에 아파합니다. 누군가의 냉동실에서 발견된 쌍쌍바를 통해 떠나버린 전 연인의 존재를 가늠해보기도 하고요. 자살 전 비용을 물어보던 남자와의 통화를 떠올리며 그 마음을 헤아려보기도 합니다. 죽은 자의 집에서 섧게 우는 유족들을 보며 그래도 그가 사랑받은 사람이었음에 안도하기도 하죠. 빼곡히 쌓인 독촉장에서 떠난 이가 겪었어야 할 절박한 심정을 읽기도 하고, 침대 곁에서 발견된 칼 한 자루를 두고 사랑의 징표 일지 배신의 증거일지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건물 청소를 하는 이가 전하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다. 그 착한 여인은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사람이 되어 생을 마쳤다. 억울함과 비통함이 쌓이고 쌓여도 타인에게는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남에겐 화살 하나 겨누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향해 과녁을 되돌려 쏘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죽일 도구마저 끝내 분리해서 버린 그 착하고 바른 심성을 왜 자기 자신에겐 돌려주지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만은 친절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 바른 마음이 날카로운 바늘이자 강박이 되어 그녀를 부단히 찔러온 것은 아닐까?
냉장고 속 음식을 비우고 나서 위쪽 냉동 칸을 연다. 서늘하고 텅 빈 가운데에 쌍쌍바 하나만이 냉기를 품은 채 놓여 있다. 둘이 사이좋게 쪼개서 나눠서 먹도록 만들어진 빙과. 각자 먹을 수 있는 두 개의 빙과가 아니라 굳이 쌍쌍바를 골라서 나눠 먹으려던 애틋한 마음이 나를 흔든다.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자는 일을 하면서 감정이 동요하지 않도록 늘 마음을 다잡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쌍쌍바만은 냉정함을 지키고 바라볼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작고 사소한 것에 더 크게 흔들렸던 것 같다.
자살을 결심하고 그 뒤에 수습할 일까지 염려한 남자. 자기 죽음에 드는 가격을 스스로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건 남자. 도대체 이 세상에는 어떤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연이 있기에 한 인간을 마지막 순간으로 밀어붙인 것만으로 모자라,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이 짊어져야 할, 죽고 남겨진 것까지 미리 감당하라고 몰아세울까?


 그는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서글프게 지나온 현장을 적어내요. 책을 읽는 내내 그가 혹시 자신이 지운 흔적을 그대로 자신의 마음에 옮겨 담아 자꾸만 꺼내보는 것은 아닐까 싶어, 하지만 그 마음을 위로할 방법이 없어, 자주 책장에 새겨진 글자만 쓰다듬곤 했습니다.

 다행히도 작가는 종종 피아노를 친다고 해요. 피아노에서 나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소리가 온갖 피로와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식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피아노로 이끌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연주가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합니다. 그가 청소를 하며 떠난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또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 없는 집을 깨끗이 하는 것이 누군가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을 위해 하는 연주는 오래도록 아름답게 그의 마음에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내 감정은 피아노 건반처럼 밝고 어두운 것, 기쁘고 서글픈 것으로 온통 뒤섞여 있다. 언젠가 어머니처럼 나에게도 아버지의 좋았던 기억만 떠오르는 날이 찾아올까? 자연의 섭리처럼, 청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밤의 장엄함처럼, 모든 왜소한 것이 사라지고 오직 사랑의 기억만이 나를 감싸는 그런 시간이 정말 찾아와 줄까?




 무언가 강렬한 것이 전면에 드러날 때, 정반대의 것이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N극과 S극이 그렇듯, 해와 달이 그러하듯, 죽음을 떠올리면 꼭 그만큼 강하게 삶도 떠오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늘 죽음과 맞닿아 삶을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떠나간 사람의 등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그의 글을 읽으며 삶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는 것은 그러니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매일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떠나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으레 죽음을 떠올리면 나이가 들어 늙어진 후의 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생각해보면 그보다 앞서 떠나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요. 언젠가 저도 어떤 이유로든 이 세상을 떠날 거예요. 그때 제 뒤로 남겨지는 것들을 작가와 같은 마음을 지닌 누군가가 모두 기꺼이 버리고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부끄러움도 거리낄 것도 없이 훌훌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어차피 떠나고 나면 남은 것이 무엇이든 어쩔 수 없겠지요. 떠난 후의 흔적은 남은 자들의 고민으로 남겨두고 살아서는 그저 지금을 어떻게 잘 살아낼지나 생각해볼 일이 아닐까 싶은, 오늘은 그런 날입니다.



스위치를 찾아 전등을 켜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음에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태초에 빛이 있기나 했는지, 가로등이 없는 심야의 지방도로 위를 비추는 자동차 전조등의 세계처럼 시야가 좁아졌습니다. 목구멍은 바람이 소금 사막을 스치듯 바삭거립니다. 문득 내가 해저를 느리게 유영하는 심해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냄새의 진원지는 실낱 같은 빛이 비치는 곳. 물고기는 어둠 속에서 그 희붐한 빛을 향해 천천히 헤엄쳐 가야 합니다. 모래에 감춰진 산호나 심해 곳곳에 좌초된 난파선의 뾰쪽한 잔해에 찔리지 않도록 가능한 한 느리게 나아갈 것.
내 시선이 오랫동안 가난에 물들어 무엇을 봐도 가난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일까? 어떤 날은 죽은 이의 우편함에 꽂힌 채 아래를 향해 구부러진 고지서와 청구서마저 가난에 등이 휜 것처럼 보인다.
혼자 죽은 채 방치되는 사건이 늘어나 일찍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고독사 선진국 일본. 그 나라의 행정가들은 '고독'이라는 감정 판단이 들어간 어휘인 '고독사孤獨死' 대신 '고립사孤立死'라는 표현을 공식 용어로 쓴다. 죽은 이가 처한 '고립'이라는 사회적 상황에 더 주목한 것이다. 고독사를 고립사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죽은 이의 고독이 솜털만큼이라도 덜해지진 않는다. 냉정히 말해서, 죽은 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 편에서 마음의 무게와 부담감을 덜어보자는 시도이다.
문 앞에 오래 머물면 마치 거대한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어떤 것도 반사하거나 담아내지 않는 암담한 거울. 하지만 이 막막한 문은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내가 처한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불가의 면벽수행 같은 것일까? 막막함은 때론 내면의 눈을 뜨게 한다. 지금 나는 무슨 생각에 골몰하는가. 지금 마음은 어떤 빛깔인가.
이 집을 치우며 지독한 고독을 보았다면 그것은 결국, 내 관념 속의 해묵은 고독을 다시금 바라본 것이다. 이 죽음에서 고통과 절망을 보았다면, 여태껏 손 놓지 못하고 품어온 내 인생의 고통과 절망을 꺼내 이 지하의 끔찍한 상황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젊은 나이에 미쳐서 스스로 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한 불행한 남자를 보았다면, 마치 인생의 보물인 양 부질없이 간직해온 내 과거의 불행함을 그 남자에게 그대로 전가하고는, 나는 결백하답시고 시치미 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라보듯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이 지하 방에 관해 알게 된 유일한 진실이다.
자기가 보고 싶고 희망하는 세계만 만나려는, 편견 가득한 청소부의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해도 딱히 부정할 재간은 없다. 하지만 그 믿음을 마음 한켠에 고이 묻어두고 이따금 생각나면 보러 갈 작정이다. 그런 믿음이 싹도 피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시들어버리면 나는 이 세계에서 단 하루도 온전히 버틸 자신이 없다.
홀씨 날리는 봄이 그립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 죽는 자가 늘어날수록 활기를 띠는 비즈니스, 그 직업적인 아이러니를 떼어놓고는 이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죄책감이 내가 발을 디디고 선 땅이다. 뒤돌아보면 언제나 죄책감 위에 새겨진 기나긴 발자국이 저 멀리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다. 움푹 들어간 자국이 깊고 선명하다.
금파리가 공중에서 윙윙거리고, 살 오른 구더기가 모퉁이마다 꾸물거리고, 송장벌레와 진드기가 기어다니는 곳에서 '특별함'이라는 왜소하고 부질없는 조각들을 찾아서 줍느니, 태풍이라도 소환해서 남겨진 발자국을 지우고 싶다. 누구도 묻지 않은 죄를 스스로 지우도록, 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나마 용서의 순례 길을 나서야 한다.
- 늘 그렇다면 진짜 힘드시겠어요.
- 글쎄, 바로 그것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생각이 진짜 힘들고 괴로운 것인지... 늘 스위치가 켜져 있는 것 같아요. 언제나 죽음에 관해 생각하다 보니 이것을 단순히 '괴롭다' 또는 '즐겁다'는 감각으로 나눌 수 없는 것 같아요. 전등이 환하게 켜져 있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밝아도 여봐란듯이 쉽게 잠들곤 하잖아요. 제 경우는 이제 스위치를 켜 둔 채 잘 자는 편이 된 것 같아요.
수많은 자살 현장을 오가며 죽은 자의 직업과 자살을 감행한 도구가 때때로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낯선 것을 찾기보다는 자기에게 익숙한 것, 일상에서 가까운 것을 자살 도구로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인내했고, 또 일하는 내내 얼마나 빈번히 죽고 싶은 충동에 빠졌을지 생각해보면 내 마음도 어느새 빛을 잃고 어둑해진다.
지성을 가진 도구의 인간, 호모 파베르가 그 지성으로 자살 도구를 고른다. 참으로 잔혹한 아이러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아이러니는 인간의 생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등을 맞댔을 뿐, 사람의 생명과 죽음은 결국 한 몸통이고 그중 하나를 떼놓고는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다.
밤은 청하지 않아도 기어이 찾아온다. 밝아오는 아침을 누구도 외면하지 못하듯 어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단 하루의 유예도 없이 매일 밤 나를 방문할 것이다. 그것이 자연이 하는 일이다. 때로는 그 무심함에 질리고 때로는 그 변함없음에 안도한다. 그토록 장엄하고 공평무사한 밤이 찾아오면 모든 생각이 작고 부질없다.
수도꼭지의 아이러니는 누군가가 씻는 데 도움이 되고자 만들어졌지만 결코 스스로 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집이라면 그가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가서 군말 없이 치우는 것이 제 일입니다만 정작 제가 죽었을 때 스스로 그 자리를 치울 도리가 없다는 점이 수도꼭지를 닮았습니다. 언젠가 죽은 이가 숨을 거두고 한참 뒤에 발견된 화장실에서 수도꼭지에 낀 얼룩을 닦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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