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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May 27. 2020

다정함이 깃든, 기묘한 추리소설

- 조영주, '반전이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손자 나무.

친전은 나무의 하원을 돕기 위해 시간에 맞춰 유치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수많은 아이들 속에서 도통 나무를 찾을 수 없고, 결국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안에서 나오는 아이.

친전을 보자 달려와 품에 쏙 파고든다.

"할아버지!"

자신을 바라보며 환히 웃는 이 작은 얼굴이 친전은 한없이 낯설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이 아이가 세상 단 하나뿐인 자신의 손자 나무임을.


문제는 오직,

안면인식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뿐.




정년퇴직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경력 30년의 베테랑 형사 친전은 현재 장기 휴직 중입니다. 급작스레 찾아온 안면인식장애로 인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다 결국 오인 체포까지 한 것이 원인이었어요. 범인의 얼굴은커녕, 가족과 동료 심지어 자신의 얼굴 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답답한 날들 속에서, 그는 유일한 낙인 추리소설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손자 나무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간 어느 날, 언제나 온 골목이 떠나가라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던 아이가 평소와 달리 풀이 죽어 있었어요. 그러더니 이유를 묻는 친전에게 대뜸 우비 할배를 잡아달라는 거예요. 이제 수사라면 더럭 겁부터 나는 친전이지만, 어린 손주는 할아버지의 마음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보챌 뿐입니다. 결국 손자의 등쌀에 당할 재간이 없던 친전은 우비 할배를 잡아주겠다 더럭 약속을 하고 말지요.


그놈의 우비 할배를 잡기 위한 수사는 이튿날부터 바로 시작됐어요. 유치원에서 탐문을 한 결과, 한 달 전부터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유치원 근처로 매일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친전은 그 길로 유치원 앞 카페에서 잠복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일주일이 되도록 우비 할배는 오지 않고, 친전은 좋아하는 추리소설만 원 없이 읽어 벌써 여덟 권째로 접어들게 되었답니다.


오늘도 허탕인가 싶어 집으로 가려는데, 50년 지기 악우인 김 씨가 대뜸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게 아닙니까. 쓸데없이 오라 가라 한다며 투덜거리며 향한 곳은 얼마 전 천장이 무너져 혼자 사는 노인이 압사당했다는 붉은 기와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당을 넘어 대문 밖까지 쏟아져 내린 책더미 어디에도 무너져 내린 천장의 잔해는 보이지 않자 친전은 노인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돼요. 더구나 노인이 우비를 입고 두 손을 곱게 모아 가슴 위에 포갠 채 발견이 되었다는 사실을 듣자 살인 사건임을 직감합니다.


그리하여 원치 않았던 수사의 길로 다시 접어들게 된 친전. 그는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후배 정의정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파트너가 되어버린 김나영과 함께 그날의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기묘한 사건 현장에서 얻은 사실은 이러했습니다.


책으로 얼굴이 뭉개지도록 얻어맞은 남자.

그의 손바닥 깊이 새겨진 십자 손금과 등 한가득 새겨진 부처 문신.

살인 도구는 책 무더기에서 발견된 몇 권의 책들.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

모두 찢긴 채 반전이 없다.


단서들을 추적하다 보니 이 책들이 모두 한때 추리소설로 유명했으나 IMF로 부도를 맞은 리문출판사와 관련이 있음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명맥을 이은 화이트펄 출판사와 만석출판사까지 범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데요.


이어지는 살인사건. 추가되는 새로운 사실과 그 끝에서 마주한 과거의 추악한 진실. 범인은 대체 누구이며, 그는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그리고 그가 찢어간 반전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지. 과연 친전은 안면인식장애를 딛고 범인과 진실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주인공인 친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저 역시 추리소설을 제법 좋아해 책장에 추리소설 섹션까지 따로 두고 있어요. 그런데 그곳에 놓인 책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작가가 쓴 것들이고, 최근에는 압도적으로 북유럽이 많습니다. 그건 아마 서점의 서가도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자리에 한국의 작가가 한국을 배경으로 쓴 잘 만든 추리소설이 놓인다는 게 우선 몹시 반갑습니다.


이 책에서 친전은 추리소설 마니아로, 단순히 추리소설을 읽는 것을 넘어 고서점까지 드나들며 다양한 시대의 여러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고 수집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이렇게 추리소설의 주인공이 추리소설 마니아이며, 사건의 배경에 추리소설 출판사가 있고, 추리소설이 범죄의 도구로 쓰이기까지 하다니, 이 책 자체가 추리소설 마니아들에게 바치는 한 권의 선물 같기도 합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들으면 알만한 작가와 작품이 책 곳곳에 보물찾기 하듯 등장하는 것이 여간 반가울 수가 없어요.


이 작품에서 추리소설만큼 중요한 키워드인 안면인식장애 또한, 단순히 등장인물이 지닌 흥미로운 장애의 한 요소로 두고 끝내거나 겉핡기식으로만 다루지 않아 저는 참 좋았습니다. 작가가 병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잘 풀어내 주었어요. 덕분에 친전의 심리묘사가 매일 내밀했고, 이야기를 적절하게 긴장시키거나 진행시키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어요.


또 친전도 모르는 새 그의 새로운 파트너가 되어버린 김나영과의 팀워크가 아주 빛났습니다. 이 작품에서 미처 다 밝혀지지 않은 게 많은 김나영인데요. 추후에 시리즈물로 나온다면 그녀의 이야기도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 서로 다른 게 참 많은 친전과 김나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한 팀이 되어가는 모습 역시 앞으로의 케미를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책에서도 자극적인 소재와 잔혹한 이야기들이 많이 보이는데요. 스토리가 탄탄한 데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게 따스함이 깃들어 있어 읽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따뜻한, 기묘한 추리소설이었어요. 모두에게 친절하고자 했던 작가의 다짐이, 그 다정한 마음이 책에 가득 스며 읽는 이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답니다. 다 읽은 후 끝 맛이 개운한, 그래서 또다시 맛보고 싶은 '반전이 없다'였습니다.




언젠가 친전은 헤밍웨이가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읽었다. 제목도 내용도 가물가물한 이 책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부분은 투우장을 나서는 소의 마음가짐에 대한 묘사였다.
투우는 소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어떤 소는 이런 운명을 알고는 싸울 의욕조차 잃어버린다. 투우장 한 곳에 웅크리고는 아무리 투창을 쏘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소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한다. 투우장 한구석으로 숨어들어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후 다시 싸우기 위해 투우장 중앙으로 나선다. 이런 투우장 한구석, 소가 죽기 직전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을 가리켜 케렌시아라고 한다.
"행복한 집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현장은 모두 제각각의 어둠을 안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흙으로 돌아간 부처 이문석.
친전은 이것을 이 세상에 부처는 없다, 누구도 인간은 구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친절해지자.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진다면, 다정해진다면, 내가 누구를 못 알아보든 섭섭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그렇게 살래.
이 소설엔 그런 마음을 가득 담아보았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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