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Sep 03. 2020

우리, 밤에 이야기 나누어요

- 이도우,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두고두고 떠올리며, 사탕을 굴리듯 입 안에 오래 머금게 되는 문장이 있어요. 저는 그런 문장을 좋아합니다.


책을 읽다 어떤 문장이 마음에 흔적을 남기면 글을 쓴 사람도 그 흔적과 함께 마음에 오래 머물러요. 시간이 흘러 우연히 그 사람의 이름을 다른 책 표지에서 발견하는 날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사고 말지요. '어머, 반가워라. 우리 집에 가서 차라도 한 잔 하며 밀린 얘기를 나눕시다' 같은 마음이랄까요.


오크색 나무와 검은색 철제 프레임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저희 집 책장에는 제가 사랑하는 책들이 가득해요. 그중 위에서 두 번째 줄 왼편에 나란히 놓인 네 권의 책에 '이도우'라는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그 시작은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었어요.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인 공진솔과 라디오 PD 이건의 조금 느리고 잔잔하지만 설레는 사랑을 그린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였어요. 하지만 제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은 따로 있었죠.


"난 종점이란 말이 좋아요. 몇 년 전에 버스 종점 동네에서 산 적도 있었는데, 누가 물어보면 '157번 종점에 살아요' 그렇게 대답했죠."
"종점? 막다른 곳까지 가보자, 이런 거?"
"아니, 그런 것보다는... 그냥 맘 편한 느낌. 막차 버스에서 졸아도 안심이 되고, 맘 놓고 있어도 정류장 놓칠 걱정 없이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는 느낌이요."


유달리 버스를 좋아해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종점까지 가기도 했고, 또 그즈음 헤어진 남자 친구의 집이 버스 종점이라 더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후로 『잠옷을 입어라』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만날 때마다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집까지 함께 했어요. 둘녕과 수안의 성장을 그린 『잠옷을 입으렴』을 읽으면서는 따스함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이 시렸지요.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북현리의 굿나잇책방을 떠올리며 그 마을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함께 책모임을 하며 은섭과 해원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고 말이에요.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지요. 어떤 책은 멋지고, 어떤 책은 재밌고, 어떤 책은 불편한 곳을 건드리고, 또 어떤 책은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이도우 작가의 책은 읽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해요. 그녀의 책을 읽으면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과 친해지고 싶어 져요. 그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저도 어느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그저 함께 웃고 싶다는 바람이 생깁니다.


그런 그녀가 에세이를 썼어요.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를 들고서는 '아, 드디어 그녀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집으로 가는 내내 설렜답니다.

책을 펼치니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적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득했어요. 때로는 사람에 대해, 때로는 기억과 마음에 대해 섬세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속삭이듯 들려줬어요. 중간중간 나뭇잎에 적은 짧은 소설까지 선물처럼 실려 있더라고요. 한 번에 다 읽지 못하고 자주 멈춰서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또다시 읽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도우 작가의 에세이는, 그녀의 소설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날 수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소설이 자란 토양을 만지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수분을 가득 품고 햇살을 담뿍 머금은, 그러다 가끔 구름이 드리워 그늘을 만든 이 땅에서 그 소설들이 자라난 거구나.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토록 따스하고, 가끔 벌레에 이파리가 먹혀도 싱싱함을 잃지 않고 건강한 거구나 싶었습니다.

이 비옥한 대지에서 또 자라날 이야기와 인물들이 무척이나 기다려져요. 언젠가 만나게 될 그들에게, 당신들이 태어나 자란 그 자리에 나도 다녀왔었노라고 속삭이고 싶습니다.


깊은 밤 잠 못 드는 날엔 다시 책을 펼쳐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해요.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상에는 영영 모르고 마는 일들이 있다고... 완전했던 민들레의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나는 본 적이 없고 그 꽃이 잃어버린 무엇도 영원히 모른 채 살아가겠지만, 오래 고개 숙여 애달파하지는 않겠다고. 스쳐가는 시간 속에 머물며 우연처럼 인연처럼 만나는 심상들이 건네는 대답으로 족하겠다고.
길눈 밝은 이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나침반을 갖고 태어났구나 싶었다. 타고난 내비게이션이라 할까. 그리고 자신은 나침반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에서 홀로 조난을 당하는 기분일 때면, 그런 씁쓸함이 들었다..
아마도 잎이 없는 클로버는 '미련 없는, 후회 없고 뉘우침 없는'이란 꽃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빛나는 행운과 행복은 너무나 한순간. 잎이 차례로 떨어질 때는 두렵고 불안하겠지만, 마침내 사라지고 나면 차라리 초조함은 끝나고 미련 없이 놓아버릴 것만 같다.
그건 마치 웃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를 떠나는 이의 뒷모습 같은 것. 간절히 기다렸고 지키려 애썼던 갈망이 내 안에서 끝나버렸을 때, 그 마음을 '클로버 잎이 다 떨어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낡은 질문이지만 다시 한번 인생이란,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삶이 더 가치 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결국은 태어난 성정대로 살아가는구나 싶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가려진 자수의 뒷면을 아까워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며 뒷면을 똑같이 수놓지 않고서는 앞면도 수놓을 수 없는 것이건만.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생각하면서도 뒷면은 여전히 애달프니.
결국 영화 속의 인물들이 소망했던 '따뜻한 곳'은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팠던 기억을 잊어버리거나, 적어도 그 기억과 화해할 때만이 진정 따뜻한 장소와 만날 수 있다는 것. 애증은 고되니 너무 오래 묵히지 않고 자주 바람에 놓아버리며 살고 싶다. 마침내 모든 추억이 아무렇지 않아 따뜻해지도록...
귓가에 소라고둥 소리를 들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로 돌아오라는 먼 해안동굴 같은 속삭임. 그 속삭임은 때로는 기차 소리이기도 하고, 금빛 먼지들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 밤하늘 유성우가 떨어지는 모습이거나 하늘 높이 포퓰러 이파리들이 물결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사라지는 사람은, 그들을 덜 사랑해서만은 아닐 거라고 오래 생각했다. 소라고둥 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고 그걸 이길 수가 없었을 거라고.
누구에게나 숨겨놓은 소라고둥 하나가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모두가 떠나는 것은 아니다. 인연 맺은 사람들과의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과 파도의 속삭임 사이에서 애써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것일 뿐. 묵묵히 주어진 이름을 지키며 사는 이들이 아름다운 순간과 자주 만나며 살아가면 좋겠다. 바다로 가버린 이들은 바다에서 행복할 테니...
애정이 있는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그 말 그대로, 어떤 함의나 간접적인 가시가 없는 담백한 언어를 건네고 싶다. 숨은 뜻을 요령 있게 내비치는 이들이 복잡한 내면을 가진 듯 멋있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고, 함의와 행간은 여전히 흥미로운 문학적 텍스트이지만, 그것이 일상을 잠식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살아갈수록 그 말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인 이들이 곁에 남는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폐허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다. 한때 뚜렷이 있었다가 무너진 곳이고 많은 것들이 빠져나가 비어버린 곳, 큰 물길이 덮어 숨어버린 곳이다. 애초 없었다면 아무렇지 않겠으나, 폐허는 너무나 있었던 장소이기 때문에 폐허라고 불린다.
추억이 없는 따뜻한 곳의 대척점에 실은 쓸쓸하고 아름다운 폐허가 있다.
울타리는 다가오는 걸 막는 장치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울타리가 있는 곳엔 출입문이 있고, 어쩌면 그 문을 내기 위해 빙 둘러 울타리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안에 있는 사람은 타인이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만, 처음부터 울타리가 없다면 어디로 접근해야 할지 안내받지 못할 것만 같다. 서로가 가까워지는 과정은 그렇게 공간을 존중하면서 천천히 한 바퀴 돌아 출입문을 찾는 노력이 아닐까.
저마다 다가가는 걸음의 속도와 보폭이 다르다. 둘이 마주 보고 열 발자국씩 가까워지자 약속해도, 막상 열 걸음 걸은 뒤 재보면 서로 똑같은 거리만큼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더 넓은 보폭으로 다가간 이가 좁은 걸음으로 다가온 이에게 서운해하거나 우정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저마다 할 수 있는 보폭과 속도로 열 걸음을 걸었으면 된 게 아닐까. 그건 그 인물이 가진 재질이기에.
인생은 지는 게임이라고 평소 생각해왔습니다. 기왕이면 잘 지는 게임, 아름답게 지는 게임이라고. 살아가는 건 마침내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닌 것 같아요. 결국 꿈을 이루려고도 아니고. 그저 순간 속에 있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짝이는 한순간, 보석같이 소중하고 귀한 순간과 가끔 조우해 그 속에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고요. 마치 민들레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상상해보듯이, 꿈꾸던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다만 손등을 스쳐가는 걸 느껴보려고.
책을 읽지 않고 살아도 아무런 무리가 없고 어떤 이들은 소설을 읽는 건 시간 낭비 같다고도 말하지만, 저는 소설을 읽지 않으면 한 겹의 인생을, 읽으면 여러 겹의 인생을 살게 될 것만 같습니다. 여러 겹의 인생을 살아보는 일, 그건 세상에 나그네처럼 머물렀다 갈 사람들이 저마다 가질 수 있는 '나의 부피'일 겁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특수청소부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