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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Sep 29. 2020

피는 물보다 진하다

주영하, '콩가루 수사단'

학교 다닐 때 나름 수업을 열심히 들었어요. 모든 수업이 잠이 싹 달아날 만큼 재밌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졸음이 쏟아질 만큼 지루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수업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토록 많이 읽고 쓰고 외웠던 것들이 지금은 모두 흔적도 없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것들은 머릿속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네요. 딱히 마음에 짚이는 이유도 없는데, 20년이 넘도록 순간순간 불현듯 생각이 나곤 해요.

예를 들면, 초기의 화석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산성과 염기성을 구분할 때는 '리트머스가 산을 만나면 얼굴이 빨개진다'. 화학에서 '칼카나마알아철니'와 '수헬리베붕탄질산'. 조선의 왕 이름은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특히나 임진왜란의 원인이 내부의 분열을 다스리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었다는 말은 또렷이 기억나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순간 제가 직접 목격하고 겪은 것이기에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저희 가족만 해도 그래요. 내부의 다툼이 외부의 적 앞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똘똘 뭉쳐 하나가 되지요.

언젠가 엄마와 지축이 흔들릴 만큼 거대하게 다퉜던 날, 저희 집 앞에 누군가 쓰레기를 무단투기했어요. 그날이 처음도 아니었던 터라 약이 바짝 오른 저희 가족은 범인을 잡자며 목소리를 높였어요. 조금 전까지 소리 높여 싸우던 것은 잊고 아빠는 집 앞 근처 골목에, 엄마는 거실 창에, 저는 제 방 창에서 보초를 서다 결국 그날 범인을 현장 검거하고 말았답니다. (tmi: 범인은 동네에서 오래된 약국집 둘째 아들이었어요. 멀리까지 나가기 귀찮았다는군요.)




여기 스스로를 콩가루라 부르는 가족이 있습니다. 억척 엄마 오희례, 10년째 은둔형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인 진주, 결혼 세 번 이혼 세 번에 아이 둘만 남은 현주, 강력반 형사인 막내 현호. 이들은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벌어진 틈을 봉합하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현호의 작은 전세방으로 희례와 진주, 현주가 각자의 사정을 지닌 채 들어와 모여 살게 되었어요. 어쩔 수 없이 시작된 반갑지 않은 동거. 서로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붉히는 힘든 매일이 계속됩니다. 언제든 흩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 그게 그들 콩가루 가족이었거든요.

그런데 함께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주의 어린 딸 지우가 어린이집에서 흔적도 없이 실종됩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사건 해결을 위해 의기투합하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과거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마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돼요. 결국 유괴 사건 이후로 그들은 주변의 미스터리한 사건들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엮이며 특유의 촉과 감, 오지랖을 발휘해 콩가루 수사단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줍니다.


1 사라진 작은 콩
현주의 딸 지우가 어린이집 개원일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CCTV에도 어디에도 지우의 모습을 남기지 않은 채, 범인은 몸값 오천만 원을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 가져오게 하는데...
2 베란다와 작은 구두
실력과 미모, 인성을 두루 갖춘 촉망받는 젊은 화가 유지아. 그녀가 아파트 12층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추락해 숨진다. 빨간 구두를 신은 채. 사람들은 자살이라 말하지만 현호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주변 사람들의 악의...
3 웨딩브레이커
결혼식.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야 할 신부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리고 자신을 찾지 말아 달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알고 보니 그 식장에서는 이미 한 달 새 여러 명의 신부들이 곤란을 겪었는데...
4 살인 소설
추리소설 공모전에 만장일치로 한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된다. 그러나 작가는 발표 시일이 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알고 보니 그 무명의 소설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런데 그가 죽은 모습이 그의 작품과 너무도 닮아있다.
5 장미 맨션의 목격자들
동네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그중 한 명은 장미 맨션의 세입자로, 집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녀의 비명을 들은 사람이 없다.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6 독이 든 차가운 술
현주의 전 남편 민호가 일방적인 폭행 가해자라는 누명을 쓰고 유치장에 들어간다. 모든 정황은 민호에게 불리하고 그의 억울함을 믿는 사람은 오직 현주뿐. 누명을 벗을 길은 요원해 보이는데, 피해자는 왜 민호에게 그런 누명을 씌워야만 했던 것일까.
7 엄마의 비밀
엄마 '오희례'가 사라졌다. 삼 남매는 희례가 지난 세월 남편과 자식에게도 숨겨야만 했던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40년 전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과 마주하는데. 과연 오희례가 감추고 있던 진실은 무엇인가.




가끔 표지와 제목에 속을 때가 있어요. 번지르르한 제목과 멋들어진 표지와는 달리 지루하고 그저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은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책장으로 돌아가고 말아요. 반대로 가볍고 별 거 아닌 듯 보였는데, 읽다 보면 술술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은 책이 있어요. 이 책이 그렇습니다.

얼마 전 독후감을 썼던 조영주 작가의 『반전이 없다 』처럼 우리나라에도 좋은 추리소설들이 많아요. 꼭 어려운 단어나 문학의 깊이를 맨 앞에 내세우지 않아도, 좋은 책은 결국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독자가 끝까지 책을 덮지 않고 읽은 후에 만족한다면 다른 미사여구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함부로 가볍게 취급되지 않고 다양한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들이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자신을 바보라 부르는 사람 중에 바보는 없고요. 배우들이 인터뷰에서 '저는 못생겼어요' 하면 코웃음 치다 콧물이 튀어나오기도 해요. 어쩌면 콩가루 집안이라 스스로 말하는 집은 진짜 콩가루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콩가루를 슥- 치워보면 쫀득하고 속이 꽉 찬 인절미가 숨어 있을지도. :)




평생 가족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건만 핏줄은 탯줄처럼 쉽게 자를 수가 없었다. 외면하고 도망칠수록 칡 줄기처럼 다리를 억세게 옭아맸다.
"어떤 작가가 애국에 대해 한 말이 있거든. 이 못난 나라에서 태어나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긍정하는 게 애국이라고. 가족도 마찬가지야. 가족이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사람은 없다고. 아무리 개판이라도 내가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게 가족이야."
"도대체 이렇게 해서 남은 게 뭐냐고요. 복수를 해서 정의가 실현됐어요? 죄지은 사람이 정당한 대가를 받았나요? 봐요, 잘못된 복수가 남긴 건 폭력과 상처 받은 사람들뿐이라고요. 다른 추악한 범죄들처럼요. 그러니까, 제대로 벌 받길 바라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해서 남에게 쏟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족과 싸우는 거라고. 그래서 외부의 누군가가 가족을 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 많은 에너지와 열정으로 맞서 싸운다.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고 호칭이 관계를 규정하지. 부녀회장님, 아줌마, 이모, 누나, 여사님 혹은 저기요...... 그런 호칭들이 무한하게 발전하고 변화할 수 있는 관계를 하나의 정형화된 관계로 변질시켜 버리거든. 그대랑 나, 아직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잖아?"
"이런 말이 있어. 남자들의 살의는 폭력적이고 노골적이지만, 여자들의 살의는 은밀하고 집요하다고. 난 유지아의 죽음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 거 같더라고."
'까도, 내 가족은 내가 까!'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욕해도, 나는 그녀의 울타리 안, 그녀는 나의 울타리 안 사람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진주는 현주가 완전히 사라진 밤거리 속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신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다. 꽃길만이 펼쳐진 듯 그녀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결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축제. 누구나 한 번쯤은 주인공으로 서는 날, 가장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날, 가장 완벽해야 하는 날.
친구 역시 완벽하길 바랐다. 완벽하게, 망치기를.
"이 기사를 우연히 접한 날 저는 가슴을 치고 울었답니다. 소득순으로 나열된 표 가장 아래에서, 그 밑바닥에서 제 동생이 신음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학원 가기 싫다고 툴툴대지 말걸, 또 생선이냐며 반찬 투정하지 말걸, 눈 마주치면서 다녀오겠다고 인사할걸, 그리고 사랑한다 말할걸. 사랑한다 말할걸...... 사는 동안 사랑하는 이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기억은 깊은 회한을 남긴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자신과는 상관없는 타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는 줄 아는데, 막상 겪어보라 그래.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는 법인데."
어떤 상처들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저 나름대로 바래고 모양을 바꿔가면서도 평생 함께해야만 한다. 그러다 눈감는 순간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떠나가는 그런 상처도 있다.
콩가루 집안, 콩가루 가족. 말로는 제 가족을 무시하고 깎아내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제법 애정으로 엮인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엄마가 있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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