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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 길

햇빛 쏟아지는 곳으로

Croatia_PrologueⅡ

by hearida

서른하나였다.


친구들 중에는 서른을 넘어서 진짜 나이 든 어른이 된 것 같아 싱숭생숭하다는 이도 있었지만, 나는 - 적어도 아직은 - 나이로 인해 행동이나 생각에 제약을 받을 만큼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세상은 내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은 하루인 것처럼.

12월 31일과 1월 1일 모두 24시간인 것처럼.

고작 나이 앞자리 하나 달라졌다고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온전한 어른으로 작용하기를, 그럼에도 때로는 아이처럼 순수하기를 바랐다.

노련하고 숙련되기를, 그렇지만 그 안에 여전히 열정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매번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세상의 기준은 그들의 입맛에 따라 자주 변했고 나는 그때그때 변하는 요구들에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따라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자주 멈춰 당황했고, 또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서 있는 사이 모두와 멀어졌다.


급작스레 회사를 관두었다.

회사를 다닐 땐 내가 꼭 나사 같았다.

언제든 교체되고 폐기될 수 있는 하찮은 소모품 같았는데, 회사 밖으로 나오니 이젠 내가 그마저도 쓸모없는 버려진 폐기물 같았다.

그런 두려움과 열패감을 안고 준비 없이 새로 시작한 일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늘 좋지 않은 방향으로.


연애는 파국을 향해 달려갔다.

시작부터 끝을 예상했지만, 때로는 예상과 달리 흘러가는 게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어김없이 예상대로 흘러가는 게 인생이기도 했다.

남들은 쉽게 쉽게 만나 잘들 연애하고 살던데 내게는 왜 이리 어렵기만 한 건지.

어쩌면 이제 내게는 그 흔한 만남조차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모두 자꾸만 사랑에 앞서 나이를, 결혼을 말했다.

나의 결혼 적령기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나는 그저 사랑이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친구들과의 관계도 어긋나기만 했다.

모두 나와 같은 이유로 무너지거나 나처럼 되고 싶지 않아 지쳐가고 있었다.


내 밖에서 부는 바람이 너무 강했다.

나를 지탱하는 문은 이가 맞지 않아 자주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문 앞에서 온 몸으로 그 바람을 막아내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곧 문이 박살날 참이었다.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불어 든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또 어느 순간엔 내 안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풍에 무너져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텅 빈 집을 지키는 지치고 외로운 문지기 같은 내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마치 사건을 가득 실은 트럭이 전속력으로 나를 향해 달려온 것처럼.


나는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튕겨 날아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아타튀르크 공항의 스타벅스였다.


인천 공항에서 자정에 지면을 떠난 비행기는 열두 시간의 밤을 뚫고 날아와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 두 발을 내렸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탈 예정이었다.

시계는 6시 32분을 지나고 있었고 진작에 잠은 깨어 있었다.


무수한 외로움과 짙은 그리움

덧없는 욕심과 끝없는 갈망

채울 수 없는 우울과 깊은 슬픔


옳지 못한 마음들을 여기까지 지고 와버렸구나.


어쩌면 이십 대의 나는 불행을 선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릇된 마음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다그치고 비난하고 미워만 하다 시간을 보내버렸다.

그래서 앞에 놓인 무수히 많은 길 중에 가장 어둡고 캄캄한 길에 들어서 버린지도.


이제 그만 행복을 선택하고 싶었다.

나를 괴롭히던 이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나 햇빛이 닿는 곳에 닿아야 했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할 일은 온 힘을 모아 빛이 있는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디뎌 나아가는 것.

양지로, 양지로.

따뜻한 햇빛을 쐬어주고 행복해도 된다고 쉼 없이 속삭여주는 땅으로.

나는 가야만 했다.


한 달.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보자.

햇빛 쏟아지는 곳으로.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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