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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 길

우리의 여름이 거기 있었다

Croatia_Zagreb Airport

by hearida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다시 두 시간을 날아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크로아티아의 땅에 닿은 것이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는 두브로브니크.

모든 것은 그곳에서 시작될 예정이다.

아직 자그레브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두브로브니크로 가야 하는 일이 남았다.


세 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공항은 작았고 구경거리는 커녕 쉴 곳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공항 구석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8월의 끝무렵.

떠나려는 여름과 찾아오는 가을이 겹쳐진 자그레브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색을 띠고 높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 놓인 햇살은 눈부시게 내리쬐고, 반원형의 지구본처럼 생긴 분수에서 튀어 오른 물은 햇살 아래 방울방울 빛나고 있었다.

습기 없이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벌써 알록달록 색을 입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발밑에 놓였다.

한 무리의 소년들은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와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미는 부부는 행여 아이가 깰 새라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벤치 저쪽에는 앳된 여자가 벤치에 누워 책을 읽고, 그 옆 벤치의 노인은 눈을 감고 벌써 달디단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우리도 나무 그늘이 드리운 벤치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셋이 나란히 앉아 공항에서 산 샌드위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런데 맛이 이상했다.

뭔가 부족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당혹스러운 표정의 엄마 아빠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샌드위치에는 어떤 소스도 뿌려져 있지 않았다.

한쪽에 구겨져 있는 샌드위치 봉투를 펼쳐 안을 살폈다.

혹시 미처 꺼내지 못한 게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케첩도 마요네즈도 치즈도 그 무엇도.

결국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열심히 씹었다.

입안에는 밍밍한 맛이, 우리 사이에는 쩝쩝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결국 누구랄 것도 없이 끅끅 웃고 말았다.

이런 일 하나로 이렇게 웃어도 되나 싶게, 별거 아닌데 싶으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터져 멈출 수가 없었다.

벌써 이렇게 추억이 하나 생겨버리다니.



착륙 전 비행기에서 바라본 빠알간 지붕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내내 떨리던 가슴.

이곳에선 왠지 좋은 일들이 가득할 것만 같다.


벅차게 고운 서로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마주 보았다.

서른 하나, 여름의 끝에 나는 서 있었다.

쉰여섯, 엄마 아빠의 여름도 그곳에 있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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