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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 길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속으로

Croatia_DubrovnikⅠ

by hearida

자그레브 공항에서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다시 한 시간을 날아 드디어 두브로브니크에 닿았다.

시간은 어느새 15:35.

살풍경한 공항의 모습에 나는 낯선 곳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나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엄마와 아빠도 지쳤으려나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두 사람의 눈은 천정의 등보다 밝게 빛나고 얼굴에서는 묘한 생기마저 돌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팔에서 이미 겪었지만 엄마와 아빠의 열정과 용기, 체력 모두 나는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대부분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이었다.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 모두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 각자의 짐을 들고 천천히 걸었다.

공항 밖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들의 줄 끝에 서서 우리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아드리아해와 두브로브니크의 빨간 지붕을 보고 싶다면 왼쪽 창가에 앉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주차된 버스에 올라 맨 앞자리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집을 나선 지 30시간이 지나 몸은 녹아내릴 듯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그럴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곧, 간다.
사진에서만 보던 그곳.
나의 낙원으로.


이윽고 버스가 시동을 걸었다.

규칙적인 덜컹거림에 졸음이 쏟아져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뜨자 창 밖으로 조금씩 꿈에 그리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꿈일까.

나는 눈을 비볐다.

저 멀리 보이는 붉은색 도시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두브로브니크, 내 모든 여행이 시작될 곳.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꿈꾸는 대로 될지도 모른다고.

살면서 한 번쯤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는 기적이 찾아오는지도 모르겠다고.


버스는 필레 게이트에서 멈췄고 다들 짐을 챙겨 내렸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둔 숙소의 주인아저씨가 정류장 앞에서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즈음엔 크로아티아가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여행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날 그 버스에 한국 사람은커녕 아시아인은 통틀어 우리 가족뿐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확인 없이도 우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그가 내민 커다란 손을 잡으니 지쳤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인사를 마치고 그는 큰 캐리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앞서 걷기 시작했고 아빠가 그 뒤를 따랐다.

숙소는 올드타운의 윗편, 안쪽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서 조금 걸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긴 비행에 다리를 너무 오래 쉬게 한 탓에 조금 걷고 싶었다.


8월 말의 두브로브니크는 오후 다섯 시가 되도록 더운 열기를 품고 있었지만, 쨍했던 해는 하루의 고단함에 얼굴을 비비며 쉬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짙은 초록의 싱싱한 잎들 사이로 빨간 지붕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시 머리를 숙이자 대리석이 레드 카펫처럼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가자.


엄마가 곁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앞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엄마의 손을 잡고 아빠의 그림자를 밟으며.

구불구불 골목 저편 사람들이 가득한 미지의 길을 향해.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속으로.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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