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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 길

나는 지금 행복의 한가운데 있다

Croatia_DubrovnikⅤ

by hearida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내내 잠을 설쳤는데 전날은 고맙게도 잠을 푹 잤다.

잠이 너무 달아 조금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엄마 아빠의 들뜬 말소리에 그만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네 시.

같은 여정에 피곤한 건 다르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피로보다 흥분이 앞서는 것 같았다.

잠도 없냐며 타박하는 내게 엄마 아빠는 한시라도 빨리 나가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며 웃었다.

사실 그 마음은 나도 다르지 않아 나도 그만 웃고 말았다.

결국 조금 더 자려던 마음을 접고 다섯 시가 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아빠가 씻는 동안 나는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는 건너편 돌벽에 걸쳐진 채로 징검다리처럼 놓여있었다.

골목 저 편의 끝은 다른 길과 만나 이어지고 있었는데, 벌써 이른 산책을 나선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들은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다 눈을 마주치자 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모르는 서로에게 정다운 인사를 나누는 아침.

충만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꾹꾹 담아 나도 손을 흔들었다.


당신과 나, 우리의 오늘이 안녕하길.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고 일찍 숙소를 나섰다.


인적이 드문 거리.

사람들이 온 세상이 제 것인 양 길을 휘젓기 전에 작은 생명들이 먼저 새벽의 자유를 만끽한다.

문득 부러워졌다.


너는 이 아름다운 곳을 매일 신나게 뛰어다니는구나.


보이는 모든 게 그저 새롭고 신기했다.



계획했던 성벽 투어는 8시부터 시작이었고, 시간은 아직 40분 넘게 남아있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필레게이트로 들어서면 바로 성벽 투어가 시작되는 입구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성 사비오르 성당과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는 그 두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약국 박물관과 잘 알려진 말라 브라카가 있다.



말라 브라카Mala Braca는 1317년에 시작한 유서 깊은 약국으로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제일 오래되었으며 유럽에서는 세 번째로 오래된 약국이다.

이 곳은 앞서 두 곳과 달리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는 데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첫 번째 약국이기도 하니 내 기준에서는 세계 최초의 약국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 오랜 시간 누군가의 아픔에 성실하게 마주했던 곳.

그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충실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하지만 지금의 말라 브라카는 약보다는 수분 크림을 비롯한 화장품으로 더 알려져 있다.

수도사분들이 설마 피부 트러블로 고민하는 속세의 범인凡人들을 속이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인가.

아니면 기도와 축복이 들어간 크림이라 더 효과가 좋은 걸까.

궁금했지만 사지 않기로 했다.

이제 막 한 달간의 여행이 시작되었을 뿐인데 짐을 늘릴 수야 없으니.

할 수 있다면 가져온 짐 그대로 가져가고 싶은데, 들끓는 나의 욕심이 언제까지 제 모습을 감추고 얌전히 숨어있어 줄는지.



다시 거리로 나와 이번에는 성 사비오르 성당St. Saviour Church으로 들어갔다.

1520년 두브로브니크를 덮친 대지진 이후 생존자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세운 성 사비오르 성당은, 그 덕분인지 1667년 두 번째 지진에도 붕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소 왜소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규모가 커서 놀랐다.

그리고 곧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장엄한 공기가 우리를 덮쳤다.

잠시 자리에 앉았다.

기억은 어느새 먼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가톨릭 계열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딱히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가 좋았다.

지금은 이전을 했지만 내가 다닐 때 학교는 명동성당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늘 붐비는 명동 한가운데 자리했지만 신기하게도 학교 안으로만 들어가면 마치 다른 차원으로 들어온 듯 온 세상이 조용했다.


나는 매일 12시면 명동성당에서 들려오던 종소리가 좋았다.

수업 중에라도 종소리가 들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삼종 기도문을 외웠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나 한없는 우울로 가라앉으려 할 때 종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안기듯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또한 오래된 빨간 벽돌 건물과, 뒤뜰에서 가을이면 시릴 듯 노랗게 피어나는 은행나무와,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새벽 등굣길에 종종 오르던 학교 옥상도 좋았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운동장 너머 명동거리까지 다 보였다.

곧 사람들로 가득 넘칠 거리가 그즈음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거리를 한참 바라보다 내려오면 넘칠 듯 찰랑이던 마음이 잔잔해져 조금은 편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성 사비오르 성당 안에서 그때를 떠올렸다.

오래된 과거 어느 날에 나를 위로했던 그 공기와 고요가 지금과 닮아있었다.



무언가의 한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청춘의 한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흘려보낸다.

사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그 가치를 잊고 놓쳐버린다.


나는 지금 행복의 한가운데 있다.

그 행복을 잘 볼 수 있도록

모르고 흘려보내지 않도록

잊고 놓쳐버리지 않도록

눈과 귀와 피부에 스치는 모든 것에 마음을 기울인다.

언젠가 가운데에서 벗어나 지나온 자리가 그리워질 즈음에 이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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