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가끔은 고개를 들어야겠어요

-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

by hearida

"인간의 윤택한 삶이 최종 목표인 과학, 그것도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넘쳐나지 않는 건 이상하다. 어떤 이들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최첨단 과학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적정기술과 그것의 적정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요약했다. 소박하지만 위대한 성찰이다."


-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



아침에 핸드폰을 바닥에 두고 아이 아침을 챙겨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대뜸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려 암호를 열려고 하는 거예요.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언제 배운 건지.


아이를 키우면서 늘 좋은 것만 주고 싶고, 육아서에 나온 것처럼 잘해주고 싶은데요.

어쩔 수 없이 슬금슬금 타협하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사탕이나 젤리, 과자 같은 단 음식들.

스-읍, 하고 눈을 흘기거나 이노옴 하며 혼을 내게 되는 순간들.

그리고 TV 시청 같은 거요.


그래도 되도록 핸드폰은 안 보여주려고 하는데요.

엄마아빠가 손에서 놓칠 않으니 아이도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모양이에요.

그걸 보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언젠가 아이도 제 핸드폰을 갖게 될 날이 오겠지만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데.

요즘은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중학교 올라가서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졌어요.

어릴 때 얘기를 하면 너무 옛날 일 같아 부끄럽지만 그러니까, 라떼는요...;;

삐삐가 나오고, 차에 전화기가 붙어서 나오고, 팔뚝만 한 핸드폰이 나왔어요.

그즈음 지금은 낯선 공중전화 박스 옆에서만 되는 시티폰도 나왔지요.


드디어 보급용 핸드폰이 자리를 잡던 시절.
모토로라에서 나온 계란 모양의 녀석이 제 첫 핸드폰이었어요.

손바닥만 한 크기에 액정은 엄지손톱의 딱 네 배.

보낼 수 있는 문자 수도 무지 적었고 저장할 수 있는 메시지는 100여 개.

사진은커녕 오직 전화만 가능했고 인터넷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 폰을 7년을 썼어요.
중1 때 사서 대학교 2학년 올라갈 때까지.
그 사이 폴더폰이니 가로본능이니 롤리팝이니 점차 새로운 폰들이 나오고요.

사진도 찍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물론 인터넷 불가, 터치폰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렇게 바뀌어가는 와중에도 저는 기껏 통화밖에 안 되는 제 폰이 좋았어요.

하지만 오래 쓰다 보니 폰도 나이가 들고, 거기다 떨어뜨리고 구르고 고난이 많았거든요.
결국 액정이 깨져 문자도 안되더니 어느 날 그렇게 운명을 달리했답니다.
제 나이 스물한 살의 여름이었죠.


그 후 반년을 저는 핸드폰 없이도 잘 살았어요.
아쉬우면 집으로 전화하든지 이메일을 보내든지 할 테니까요.
만나는 사람이야 기껏 가족과 몇몇 동창들과 학교 친구들 정도라서요.

뭐, 정 급하면 만나서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물론 지금은 집 전화도 없고, 학교처럼 매일 볼 수도 없고요.
폰으로 은행일도 보고, 메일도 확인하고, 결재도 하고, 업무도 보고 등등

할 수 있는 일이 훨천배나 늘었으니 예전과 같을 수야 없겠죠.

거기다 음악에 영화에 SNS에 놀거리도 가득 있잖아요.


그래도 요즘 마치 눈에 안 보이면 죽을 것처럼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돼요.

어쩌다 집에 두고 나오면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느낌이에요.

남은 삶 동안 폰 없는 자유를 다신 누릴 수 없을까 봐 겁이 나네요.
솔직히 끊어내지 못하고 눈 앞의 재미에 영영 갇혀 살게 될까 봐 조금 두려워집니다.

핸드폰을 보다 아이의 예쁜 모습을 자꾸 놓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중에 아이가 그런 모습을 배워서, 엄마아빠 말고 핸드폰만 보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 슬퍼지네요.


사실 최근에 잠을 잘 못 잤어요.
낮에 보고 들은 세상의 모든 끔찍한 소식들이 밤이면 저를 덮치는 것 같았거든요.
내일이 오기 전에, 이 밤이 가기 전에 나와 내 소중한 이들에게 그런 비극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래서 벌써 며칠째 밤을 하얗게 새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무수한 비극들을 정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싶어요.

책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들,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 자연에서 비롯된 세상의 울림.
이 모든 것을 잊고 살았기에 그런 무서운 밤을 만나게 된 건 아닐까요.

가끔은 핸드폰이라는 자그마한 네모에서 고개를 들어야겠어요.
저만의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아이의 눈을 더 들여다봐야겠어요.

다시 고운 밤을 찾을 때까지.


비가 내리는 월요일 아침, 잘 보내셨나요?

녹록지 않은 매일이죠.

즐거운 일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더 많은 것 같은 삶이지만요.

그래도 당신의 하루가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바랄게요.

그래서 오늘 밤엔 모두 웃으며 잠들 수 있기를.


Istanbul, Turkey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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