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 길

여행이란 세상의 뒤편을 바라보는 것

Croatia_DubrovnikⅦ

by hearida

성벽을 내려오니 해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른다.

온몸의 긴장을 풀고 기지개를 켠다.

운동화 위의 먼지를 털고 끈을 고쳐 맨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고 마음의 문의 빗장을 푼다.

억지로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느끼는 대로 부딪혀보기로 한다.

오늘 나의 다짐.




오노프리오 분수Onofrio's Great Fountain가 보인다. 1438년에 지어진 수도시설로, 16개의 수도꼭지에 각기 다른 얼굴과 동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지진과 세월의 여파로 많이 훼손되었다. 지금은 본연의 수도 업무보다 만남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더 충실히 하고 있다.



그 뒤로 펼쳐진 플라차 대로를 바라본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은 사람들이 그 위로 스쳐 지나갔을까. 그들의 무게를 오롯이 지탱하며 스스로를 단련해온 길은 모난데 없이 매끄럽고 윤이 났다.

길 위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젤라또를 입에 물거나 사진을 찍거나 수다를 떨면서 저마다 즐거운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도 그 인파에 섞여 걸음을 옮겼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평생 맞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여기서 보니 걸음이 척척 맞는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살피다 가끔 서로를 돌아보며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상과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한 추측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나눴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늘 삐걱이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함께 다니다 보니 썩 괜찮은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가슴이 뻐근해졌다. 다행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서.



렉터 궁전Rector's Palace으로 향한다. 렉터는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는데, 1358년부터 1808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던 라구사Ragusa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들이 집무를 하며 머물던 곳이다.

플라차 거리와 오노프리오 분수를 만든 이탈리아의 건축가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가 1435년에 건축한 것으로, 1667년 대지진 때 파괴된 것을 17세기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하였다.



건물로 들어서자 안 뜰에 흉상 하나가 눈에 띈다. 찾아보니 선박왕 '미호 프라카트Miho Pracat'로, 사후 전 재산을 공화국에 기부하여 시민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남에게 내어놓을 수 있다는 건 용기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살아보니 가져도 계속 더 가지고 싶고, 또 내 지닌 것을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고 싶은 것을 다만 욕심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인간의 천성인 듯도 싶기에.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계단의 손잡이가 인상적이었다. 오르는 길에 꼭 잡고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일까? 오르는 길은 설레지만 두렵기도 하니까. 나는 손잡이를 꼭 붙잡고 한 걸음씩 천천히 올라갔다.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2층에는 렉터를 지낸 귀족들의 집무실과 응접실, 침실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역대 렉터들의 초상화 및 여러 그림과 라구사 공화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도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아름다움이 담긴 그림에 푹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층 전시실에서 본 사진이었다. 그곳에는 90년대 초 유고 내전옛 유고슬라비아 연맹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 당시 두브로브니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멋진 도시가 한때 전쟁으로 상처 입고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걸까? 사람들의 이기심과 파괴욕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머릿속에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끔찍한 전쟁을 겪은 도시가 다시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여행을 가기 전 어느 모임에서 나는 이곳으로 떠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내게 저절로 얻은 자연과 조상들이 남긴 건축물로 쉽게 돈을 버는 곳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을 입밖에 내기 전에 더 깊이 들여다보고 알아보아야겠다 다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말을 줄여야겠다고. 나의 생각이 전부가 아님을, 나의 판단이 모두 옳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산다.



나는 어린아이가 제 몸만 한 수통을 들고 가는 사진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엄마와 내가 자주 하는 대화를 떠올렸다. 엄마는 종종 너희는 사치스러운 고민을 한다고 했다. 굶주림도, 이 세상이 어떤 고단함을 거쳐 지금에 이른지 모른다고.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세대에게는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다고. 배를 곯는 세대에게는 주린 배를 채우는 게 최대의 사치겠지만, 모두 밥을 먹는데 나만 고기반찬을 먹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는 그게 끔찍한 불행이라고.

우리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늘 첨예하게 대립했다. 엄마에게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딸, 나에게 엄마는 지나간 시대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답답한 어른.

그러나 이 자리에서 새삼 전쟁의 비극과 그로 인해 폐허가 된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자리를 딛고 우리에게 풍요와 생존 너머의 고민을 안겨준 윗세대에게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는 다른 생각, 다른 가치 또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아니라 그럴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지. 그러나 나의 신념에서 한발 물러서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일생을 거쳐 불가능할지도.





여행이란 세상을 바라보던 언제나의 자리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위치에 서보는 것.

그리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뒤편을 바라보는 것.

삶의 앞과 뒤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알아보는 것.

그렇게 그 전부를 사랑하게 되는 것.

싫다며 감았던 눈을 뜨고 마음을 여는 것.

영영 닿을 수 없던 당신에게 가는 다리를 만드는 것.

그 다리로 건너가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하는 것.

결국 우리의 다름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 날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keyword
hearida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구독자 4,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