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누가 뭐라고 하든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에서

by hearida

"마라톤을 끝낸 뒤, 결승점 근처의 코플리 플라자 안에 있는, 보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시푸드 레스토랑인 '리갈 시푸드'로 갔다. 거기서 진하고 따뜻한 클램 차우더를 먹고, 스팀드 리틀넥(뉴잉글랜드 지방에서만 잡히는 조개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시푸드 믹스트 프라이를 먹었다. 웨이트리스가 내 마라톤 완주 메달을 보고는 "마라톤 뛰었어요? 와, 용기 있네요" 하고 칭찬해주었다. 용기 있다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은 것은 자랑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용기 같은 것은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누가 뭐라고 하든, 용기가 있든 없든, 풀코스를 뛰고 난 다음에 먹는 풍성하고 따뜻한 저녁식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다.

누가 뭐라고 하든."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에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집에 있는 걸 좋아해요.

형제도 없고 어른들도 일하러 나간 텅 빈 집.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냐는 얘기를 자주 들었지만 저는 그 외로움이 꽤나 마음에 들었어요.


결혼하고 신랑 직장 때문에 낯선 곳에서 첫 살림을 시작했을 때도 주변에선 걱정이 많았어요.

혹여 적적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겠죠.

그런데 저는 온전한 저만의 시간이 많아져 내심 신이 났어요.


사람들은 혼자 있는 그 긴 시간에 뭘 하는지 궁금해하곤 했어요.

지루하지 않냐, 답답하지 않냐고 종종 물었지만 솔직히 저는 그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할 일이 너무 많아 시간표까지 적어둬야 했거든요.


어떤 날은 책장의 책을 다 꺼내요.

한 권 한 권 살피면서 책의 내용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맘에 드는 구절을 다시 되새기기도 하고요.

그리고는 때로는 가나다 순으로, 때로는 분야별로 나누고요.

때로는 크기나 색깔별로 다시 분류해 정리하는 거예요.


다른 날은 음악을 들으면서 가사를 한 줄 한 줄 곱씹어봐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가사를 적어보기도 하고요.

선율을 들으며 그 음계를 추측하기도 했어요.


또 하루는 대체 얼마까지 가만히 누워있을 수 있는지 재보기도 해요.

느닷없이 스트레칭이나 홈트에 도전하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도시, 싫어하는 음식, 하고 싶은 일 등의 리스트를 쉼 없이 적어보기도 했어요.


복잡해 보이는 레시피의 요리에 도전도 하고요.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까지 쓸고 닦고 집안의 가구를 요리조리 옮기기도 해요.

그리고 가끔은 지나간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보기도 하지요.


누군가는 제게 그런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 하기도 해요.

공부를 하거나 자격증을 따거나 차라리 잠을 더 자는 게 낫지 않냐고 말이에요.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이런 행동들이 무가치해 보였던 거겠지요.

뭐, 제가 그런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타인에게는 무가치하지만 제게는 의미가 있는 일들에 많은 시간을 썼던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지만 나를 성장시키고 위로하고 기분 좋게 하는 일에 많은 정성을 쏟았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어쩔 수 없이 그런 시간이 줄어들게 되네요.


요즘은 종일 종종거리며 타인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부모님과 어린아이와 가족들을 돌보고, 주변과 관계 맺음을 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할 일을 하고.

이제 어찌할 바 없이 어른이 되어 제 몫을 하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뿌듯하기도 한데요.

때로는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에 오른 것처럼 끝없이 달려야 하는 매일이 지치기도 합니다.


가끔은 세상에 무가치한 일을 해도 되겠지요.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직 나에게 의미 있는 일들을 해도 좋겠지요.

누가 뭐라고 하든 오직 내게만 위로와 기쁨이 되는 일들을 늘려가는 그런 어른이 된다면 말이에요.

나이 드는 일이 아주 쓰지만은 않겠다 싶거든요.


Chiang Mai, Thailand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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