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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Jan 14. 2022

어깨를 내어준 나의 그녀들에게

최은영, '밝은 밤'

서른두 살의 천문대 연구원 지연은 남편의 바람으로 인해 6년 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끝내 사과하지 않고 지연의 탓만 하던 전남편도 상처였지만, 전남편을 먼저 두둔하고 걱정했던 지연의 부모는 그녀에게 더 큰 아픔이었어요. 결국 지연은 상처 입어 비쩍 마른 몸으로 희령에 있는 천문대에 일자리를 얻어 내려옵니다.

희령은 지연이 열 살 때 처음 방문한 외할머니 댁이 있던 동네로, 바다와 맞닿은 작은 도시예요. 그녀는 이곳 오래된 아파트 5층에 집을 얻는데요. 이곳에서 우연히 오랜 시간 엄마와 연을 끊고 지내는 외할머니 영옥과 마주칩니다. 영옥은 예전에 살던 집을 떠나 여든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지연의 아파트 10층에서 혼자 살고 있었어요. 지연은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영옥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영옥과 지난 이야기를 나누던 지연은 조심스레 자신의 이혼을 밝히는데 영옥은 그런 지연을 응원합니다. 그녀는 지연의 이혼에 대해 "잘했다"라고 말해준 거의 유일한 어른이었죠. 그렇게 지연은 조금씩 영옥과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지연은 영옥의 집에서 우연히 자신과 닮은 영옥의 엄마, 그러니까 증조모 정선의 사진을 발견해요. 정선과 그녀 곁에 나란히 앉은 여인을 궁금해하는 지연에게 영옥은 천천히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증조모 정선은 그녀의 고향 이름을 따 삼천이라 불렸어요. 삼천은 개성에서 기차로 세 시간 걸리는 곳이었죠. 삼천은 백정이라는 신분 때문에 천대를 받으며 살았는데, 오래 앓던 어머니를 대신해 역전에서 옥수수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느닷없이 증조부가 나타나 그녀에게 함께 개성으로 함께 떠나 혼인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아픈 어머니를 두고 잘 모르는 증조부를 따라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일본군이 동네 젊은 처자를 잡으러 다니던 때였기에 삼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그렇게 삼천은 증조부를 따라 개성으로 가 그날로 혼인신고를 하게 됩니다. 삼천의 나이 열일곱이었어요.

훗날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내내 삼천은 그가 왜 삼천과 개성으로 떠났는지 궁금했는데, 사실 그건 그의 허영심의 힘이 만들어낸 것이었어요.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의 후손으로 신심이 두텁고 넉넉한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던 증조부는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지극히 충동적인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일생을 억울함과 삼천에 대한 노여움 속에 살았지요. 그래도 삼천은 최악의 순간마다 증조부가 자신을 구했다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삼천이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은 개성에서도 금방 알려져 차별은 여전했어요. 삼천의 어머니도 세상도 모두 그녀에게 그저 체념하고 받아들이라 이야기했지만 삼천은 그게 잘 되지 않았지요. 경멸의 시선을 그러려니 넘기지 못하는 삼천의 마음은 늘 생채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을 멸시하던 어느 날, 열아홉 살 삼천은 새비를 만납니다. 역시 고향의 이름을 따 새비라고 불린 그녀는 증조부와는 달리 다정하고 선한 남편을 따라 개성으로 왔지요. 처음 만난 날 작고 야위어 굶주려있던 참새 같은 새비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삼천은, 그날부터 새비에게 자꾸 마음이 기울고, 잃을까 겁이 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새비는 삼천이 백정이라는 말을 듣고도 개의치 않은 유일한 사람이자 자기가  밥을 먹고 맛있다고 해준  번째 사람이었고, 만남 이후 죽을 때까지 삼천과 서로를 의지했던 벗이었습니다.


지연은 희령에 머무는 동안 영옥으로부터 삼천과 새비, 영옥과 새비의 딸 희자, 그리고 지연의 엄마 미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돼요. 그를 통해 지연은 때로는 함께 분노하고,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삶 속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지연은 조금씩 변화하며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어요. 그 과정에서 엄마 미선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서로를 이해하며 상처를 회복하게 됩니다.


'밝은 ' 무려 100년에 걸쳐 4대로 이어진 여성들의 삶을 말합니다. 그들이 지나온 시대의 어두움과 편견 보여주고,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들을 담담히 비추지요. 그와 더불어 서로 상처 주면서도 결코 영원히 돌아설  없는 엄마와 딸의 관계까지 이야기 속에 녹여냅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적혀 있습니다.


신분의 한계로 갖은 시련과 풍파를 겪으면서도 희망을 싹을 뽑지 않았던 정선.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를 살면서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영옥.

평범한 가정에 대한 결핍과 자식을 잃은 상실 속에서도 살아남아 회복의 길로 들어선 미선.

스스로에 대한 기만을 깨닫고 더 이상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연대의 희망을 발견한 지연.

그들처럼 우리도 늘 수많은 희생을 감내하고 많은 책임과 아픔을 견디면서 살아가요.

때로는 극복하고 때로는 굴복하면서도 끝내 버티고 버텨 살아가지요.

그리고 그건 아마도 어둠 속에서도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며, 지친 날엔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었던 벗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새비와 희자와 명희와 지아.

그녀들처럼 나의 삶에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이들을 떠올리며.

덕분에 우리의 밤은 아직 밝다고 믿으며.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만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 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 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다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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