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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May 18. 2022

여성의 몸, 전장이 되다

- 크리스티나 램, '관통당한 몸'

전시 강간은 인류가 아는 가장 값싼 무기다.



■야지디족 소녀의 비명 - 이라크 ISIS의 야지디족 테러

야지디족은 이라크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50만 명을 비롯, 독일과 시리아의 난민과 미국 등 각국에 흩어져 사는 이들을 포함하여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의 신앙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 오래되고 신비로운 종교로, 이슬람보다 오래되었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수피 신앙,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를 포함한다'. 이런 이유로 야지디족은 악마 숭배자로 몰려 '과거에 무슬림, 페르시아인, 몽골인, 터키인, 이라크인 등 모든 이웃 종족에게 학살'당했고 ISIS가 저지른 최근의 제노사이드는 야지디족에게 74번째 학살이었다'.

이라크 내 극단주의자 ISIS는 이들을 테러 대상으로 삼아 인종청소를 시도했다. ISIS는 야지디족 남자들을 집단 학살하고 여자들은 전부 성노예로 삼으려 하였는데, 수천 명의 야지디족 여성과 소녀들이 노예가 되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은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그렇게 납치된 야지디족 여성들은 강제 개종되거나 성노예로서 매매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내가 너를 샀으니 너는 내 사바야다. 《코란》에는 내가 너를 강간할 수 있다고 쓰여 있어." 그는 2014년 10월 'ISIS 부활 파트와fatwa(이슬람 종교의 권위자들이 내린 교리나 법에 관련된 견해 및 결정 - 옮긴이) 부서'에서 발행한 책자를 언급하고 있었다. 노예 소유와 포획, 성적 학대에 대한 지침이 담긴 책자였다.
"그러더니 그가 어느 날 또 다른 소녀를 사 올 거라더군요. 저는 조금 편해지겠구나 싶어서 안도했어요. 그 사람이 데려온 소녀는 열 살밖에 안 된 아이였어요.
그날 밤 두 사람이 옆방에 있었는데, 저는 누군가 그렇게 많이 비명을 지르며 엄마를 찾아 울부짖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 자신을 위해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그 어린 소녀를 위해 울었어요."
나는 노예로 팔려 다니며 강간을 당한 여성들에게는 그들이 강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설명하려 애썼다.
"민간인이 야지디 여성을 강간한다면 그건 강간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ISIS에 가입해서 야지디 여성을 강간한다면 그건 테러 행위입니다. 그는 사람도 죽이고 이라크군과 전투도 했을 테니까요." 나는 강간을 기소 혐의에 포함하지도 않는다면 강간에 대해서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 셈인데, 피해자들은 평생 그 피해를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고 다시 설명했다.



■빼앗긴 소녀들 -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에 의한 소녀 납치

보코하람Boko Haram은 서양식 교육Boko을 죄악Haram으로 여긴다. '일자리도 희망도 없는 수많은 청년 사이에서 유수프Mohammad Yusuf의 급진적인 이슬람 신앙을 추종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2010년 유수프의 전 대변인 셰카우Abubakar Shekau가 유수프의 '혁명을 이어받아서, 유난히 폭력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2014년 4월 14일, 나이지리아 북동부의 작은 마을 치복Chibok에 있는 공립 중등학교에 보코하람이 쳐들어와 276명의 여학생을 납치했다. 전 세계는 이 끔찍한 범죄에 분노하며 각종 지원을 약속하였고, SNS에서는 #BringBackOurDaughter, #BringBackOurGirls 라는 해시태그가 3주 사이에 300만 회 리트윗 되었다. 하지만 정작 나이지리아 정부는 이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며 어떠한 구조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세계의 관심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납치된 소녀 중 일부는 석방되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보코하람에 의한 공격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보코하람만의 특징 하나는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 대원들과 강제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내야 하는 신부 값을 치를 수 없는 실직 청년들에게 아내를 제공함으로써 추종자들의 충성을 확보하려는 속셈도 부분적으로 있었다. 또한 칼리프 국가의 미래 성원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소녀들은 무슬림 자녀를 생산할 부화기로 취급되었다.
너무 잔인하게 강간을 당해서 누공이 생긴 여성들도 있다. 누공이란 질과 방광이나 직장 사이의 벽이 찢어져서 소변이나 대변이 새는 것을 말한다. 몸에서 악취가 나기 때문에 막사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한다. 그들을 붙잡아둔 남자들로부터 HIV에 감염된 여성도 있고, 아기를 낙태하려고 하거나 가족에게 강제로 낙태를 당한 여성들도 있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겪고 있는 것들을,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제게는 그 애가 강간을 당했든 임신을 했든 이슬람으로 개종했든 문제 되지 않아요. 그냥 우리 딸들이 돌아오길 바랄 뿐이에요. 아이들의 상태가 어떻든 상관없어요."



■천천히 태우는 제노사이드 - 미얀마 군부에 의한 로힝야족 박해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이다. 로힝야족은 역사적으로 문화와 인종이 다른 데다 불교도가 대부분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로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고 있다. 이들은 주류인 버마족은 물론 소수 민족 사이에서도 배척과 탄압을 받는다. 아토니오 구테후스 UN 사무총장은 로힝야족을 현재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라 표현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수십 년 동안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발급하지 않고 있으며, 교육과 이동의 자유도 주지 않고 결혼조차 허가가 필요한 상황이다. 가장 끔찍했던 2017년의 맹습은 인종청소의 '교과서적 사례'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 이전인 2016년과 2012년, 1992년, 거슬러 올라가 1978년에도 공격은 있었고 이때마다 대규모 살상과 난민이 발생했다.


2014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는 로힝야족의 상황을 '천천히 태우는 제노사이드'라고 표현했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52퍼센트가 강간당했고 여덟 달 된 아기들까지 목이 잘렸다. "로힝야 어린이들이 당한 끔찍한 잔학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UN 이권고등판무관으로서 보고서를 제출한 요르단의 외교관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Zeid Ra'ad al Hussein이 말했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증오를 품었기에 엄마 젖을 찾아 우는 아기를 찌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아기의 어머니가 살해 장면을 지켜보게 하고, 그녀를 보호해야 할 바로 그 군대가 그 어머니를 집단 강간할 수 있을까요?"
세 달 사이에 350곳이 넘는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졌고 70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근래 들어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이주였다. 2019년 9월 발표된 UN 진상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소 1만 명의 로힝야족이 살해됐다. 1300명에 가까운 피해자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된 이 보고서는 "그들의 정체성을 지우고 그들을 나라에서 제거"하려는 정권의 작전에서 머리나 손이 나무에 묶인 채 강간당한 여자들과, 다리 사이로 피가 흐르는 여성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버마에 60만 명이 여전히 '표적으로 남아' 있다고 경고했다. 조사관들은 전쟁범죄에 가담한 100명의 비밀명단을 작성했으며 국제 사회에 고위 장군들의 처벌을 촉구했다.
프라밀라 패튼Pramilla Patten 분쟁하 성폭력에 대한 UN 사무총장 특별대표는 버마군이 '표적이 된 주민들이 달아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계산된 공포 도구'로 강간을 사용했다고 고발했다. 버마 정부는 이런 보고들을 '가짜 강간'이라 일축했다. 라카인의 국경관리 장관인 폰 틴트Phone Tint 대령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여성들은 강간당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외모를 보세요. 강간당할 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세요?"



■무슬림에 의한 무슬림 학살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의 전쟁범죄

'1971년 3월 7일 무지부르 라만Sheikh Mujibur Rahman(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 승리한 방글라데시 건국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은 역사적인 연설에서 동파키스탄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며 여섯 개의 요구사항을 제시했고 거부당하자 총파업을 일으켰다. 파키스탄의 군 지도자 야히야 칸Yahya Khan 장군은 대규모 무력 진압인 '서치라이트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이후 동파키스탄의 독립 문제를 놓고 서파키스탄군과 이를 지원하는 인도군 사이의 전쟁으로 번졌다. 결국 서파키스탄은 승리하여 방글라데시로 독립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과 전쟁범죄가 이루어졌다.


1971년 독립전쟁 시기에 20만~40만 명이라는 충격적인 수의 여성이 파키스탄 군인에게 강간당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벽에 붙은 명판에 따르면 '이 감춰진 고통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전시 강간을 '전쟁의 흔한 부산물'로 여길 만한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강간의 목적은 적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기를 꺾는 것만이 아니었다. 야지디족과 보코하람에 납치된 나이지리아 소녀들, 로힝야족에게서 내가 목격한 것처럼 파키스탄군에게는 강간도 체계적인 전쟁 무기였다.
"개별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정책이고 이념에 근거한 정책입니다." 모피둘이 말했다. "무슬림에 의한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지요. 우리를 열등한 존재로, 적절한 무슬림 아닌 존재로 낙인찍고 우리를 학살한 겁니다. 강간은 불신자들을 정화해야 할 그들의 '의무'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지만 어디에도 이름이 새겨지지 않을 겁니다."



■그날 그곳에 신은 없었다 - 르완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제노사이드

르완다 내에 서로 다른 부족에 불과하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증오가 싹트기 시작한 건 19세기 말 이들을 식민 통치하기 시작하던 유럽의 식민주의자들 때문이었다. '1897년 르완다를 식민화했던 독일인들은 피부색이 더 옅은 투치족을 소작농을 지배하는 전사 종족으로 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르완다를 차지한 벨기에인들은 종족을 공식 신분증에 표시해 이런 구분을 고착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투족 해방 운동이 성장하였고, 1959년 르완다 왕국이 세워졌지만 같은 해 후투혁명이 일어나 투치족 출신의 왕을 폐위시켰다. 이후 벨기에가 공화국이 되고 후투족과 투치족은 크고 작은 갈등을 거듭해왔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요격 사건으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사망했는데, 이로 인해 1994년 4~7월간 투치족 약 100만 명이 학살당한다. 이 사건의 진범은 결국 2012년이 되어서야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진다.


르완다 인구 800만 명 가운데 80만 명이 100일 동안 살해되었다. 나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살인이었고 UN은 창립 이래 최초로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해 UN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UN 르완다 특별보고관은 이 조그만 나라에서 1994년 4월 6일부터 7월 12일까지 25만~50만 건의 강간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하루에 250~500건이 있었다는 말이다. 피해자는 2세부터 75세까지 이른다. 1996년 UN 보고서는 강간이 일상이었고 강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예외였다고 표현한다. 살아남은 거의 모든 여성이 강간을 당한 지역도 여럿 있었다. 강간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작전의 중요한 일부로 마체테와 몽둥이 같은 무기만큼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사라졌던 그 페이지들에는 국제형사재판소가 강간과 성폭력이 '그 자체로 표적이 된 특정 집단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려는 구체적 의도로 자행됐다면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제노사이드를 구성한다'라고 판결한 부분이 담겨 있었다.
"이제 위협이 없으니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강간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무기인 이유입니다. 강간했고 강간을 기획한 그들은, 강간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기 도시에서든 마을에서든 타바에서든 그 여인들을 만나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밤에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으면 그들 안에는 누가 무슨 수를 써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있을 겁니다."




■인종청소의 시작 - 보스니아 전쟁에서 무슬림 학살

보스니아는 보슈냐크인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섞여 있는데 이들은 생김새가 같고 같은 언어를 쓰며 오랜 시간 함께 살아왔다. 다만 보슈나크인은 무슬림, 세르비아인은 정교회, 크로아티아인은 가톨릭으로 종교의 차이가 있으며, 바로 이 민족적이며 종교적인 반목이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의 분쟁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보스니아 전쟁은 유고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1992년 4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벌어졌다. '1995년 데이턴평화협정Dayton Peace Accord을 중재한 미국 외교관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은 보스니아전쟁을 '1930년대 이래 서구 최대의 집단적인 안보 실패'라 불렀다'.

이 전쟁으로 밝혀진 것만 약 10만 명, 비공식적 통계로는 3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그중 40%는 민간인이었고 사망자의 3분의 2는 무슬림으로 알려졌다. 슬프게도 이러한 전쟁 희생자의 대부분은 인종청소의 목적으로 자행된 대량학살로 사망했으며, '비극적인 일은 인종청소가 그들이 의도한 효과를 내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 분쟁에서 민간인에게 가해진 고통의 거대함은 표현이 불가능하다" 유럽의회가 파견한 조사관들이 1993년 2월 발표한 <워버턴 보고서Warburton report>의 내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은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 공동체 전체에 최대치의 굴욕을 가하기 위해 유별나게 가학적인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보스니아전쟁 시기에 57개의 강간 수용소에서 2만~5만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르완다에서처럼 강간의 목적은 세 가지였다. 적의 여성을 욕보이기, 보스니아계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그리고 여성들에게 세르비아계 아기를 임신시켜 인구 구성을 변화시키기.
"보스니아에서는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가해자의 변론 비용은 정부가 지불하지만 우리는 법정 부담금을 우리 돈으로 내야 해요. 그리고 피해자 보상은 여전히 없지요."
"그 일로부터 치유되기란 영원히 불가능해요. 하지만 최대한 빨리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민의 마음으로 잘 들어주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제가 지켜본 바로는 치유에 확실한 도움이 되는 것은 가해자들의 처벌이에요. 그럴 때 피해자는 그 일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고 자기에겐 죄가 없다고 사회의 권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느끼거든요."



■강간 군대 - 소련군의 베를린 사냥

2차 세계대전 말, 이미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독일군은 퇴각을 거듭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 소련군은 기세 좋게 독일의 수도로 진격하는 중이었다. '1944년 1월 스탈린 군대가 동프러시아와 슐레지엔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강간이 시작되었'고 군대가 베를린에 입성한 5월에서는 밤마다 그야말로 '사냥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 군대가 접근하기 전에 미리 자살하거나,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들을 죽인 뒤 자살하기도 하였으며 집단 강간당한 후 자살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전쟁이 끝나자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다.

어째서 전쟁에서 강간은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또 전쟁 후에 어떤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스페인내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한국과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 전쟁에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쿠웨이트에서......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인 강간이 어떻게 전시에는 문제시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


묘석에 새겨진 전투와 해방의 장면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붉은군대가 독일의 수도로 진격하는 동안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량 강간 현상'이라고 표현한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에 따르면 베를린에서는 여성 세 명에 한 명꼴로 많은 여성,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강간당했고, 전체적으로는 '최소한 200만 명'이 강간당했다.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여덟 살부터 여든 살까지 모든 여성이 강간당했다"고 붉은군대의 작전을 지켜본 소비에트 종군기자 나탈리야 게세Natalya Gesse가 말했다. "그들은 강간 군대였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가 항의했을 때 스탈린은 이렇게 대꾸했다. "피와 불과 죽음을 뚫고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간 병사들이 여자와 재미를 보고 희롱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요?"
그 '재미'라는 것은 그 여성들이 결코 극복하지 못할 사건이었다. 베를린 병원들의 기록에 따르면 수천 명이 죽었다. 대개 자살이었다. 많은 여성이 성병에 감염되었다. 강간으로 임신한 여성들은 태어난 아기들을 죽였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사실 요즘까지도 붉은군대의 강간은 러시아에서 금기된 주제이며 붉은군대를 모함하는 서구의 선전으로, 일종의 신화로 여겨진다. 요즘 말로 하자면 가짜 뉴스로 치부된다.
"전쟁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마사 겔혼Martha Gellhorn이 1959년 《전쟁의 얼굴The Face of War》에서 쓴 구절이다. 그러나 전쟁은 다양한 방식으로도 일어나며 어쩌면 죽음이 최악이 아닐 수도 있다.



■데사파레시도스desaparecidos(실종자들) -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1976년부터 1983년까지 7년에 걸친 군부독재 기간은 '추악한 전쟁dirty war'의 시기이기도 했다. 군부에 의해 정치범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라졌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1만 3000명, 인권단체에 따르면 3만 명 이상이 사라졌다고 알려진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납치된 사람들은 고문을 받은 후 총살되거나 암매장, 혹은 화장되었고 비행기에 실려 산채로 바다에 던져진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30퍼센트 정도가 여자였고 임신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때 태어난 아기들은 많은 경우 군부에 협조하는 이들 집에 입양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실종된 이들의 어머니들이 모여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광장에서 매주 목요일 침묵의 행진을 계속했고, 이는 '5월 광장의 어머니회'로 알려짐 전 세계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딸이 감금 수용소에서 출산한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별도로 할머니회를 결성해 빼앗긴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머니회와 할머니회가 과거의 추악한 전쟁을 극복하는 상징이 된 데 비해, 감금된 채 강간당했던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는 외면당해 33년이 지나서야 성폭력에 대해 첫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연방법원 판사 세르히오 토레스Sergio Torres는 이렇게 선언했다. "성적 예속은 고립된 범죄가 아니라 억압과 절멸을 위한 비밀 계획의 일부로 체계적으로 수행되었다."
"여성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구타당했을 때는 아프고 스스로가 아주 하찮게 느껴지지만 강간당했을 때는 자신이 파괴되었다고요. 마치 그들이 자기 안의 무언가를 죽이는 것 같았다고요."



닥터 미러클Dr.Miracle 판지병원Panzi Hospital - 콩고전쟁의 비극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싸움이 콩고로 번지면서 1996~1997년의 제1차 콩고전쟁이 불붙었다. 투치족 주도의 르완다군이 지원하는 로랑 데지레 카빌라Laurent-Desire Kabila의 반군이 콩고의 오랜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정부를 전복시켰다. 하지만 카빌라를 지원했던 르완다의 우간다 정치인들은 점차 독재적으로 변모하는 카빌라 대통령에 회의감을 드러냈고, 이에 카빌라가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뇌물을 주며 파병을 요청하면서 1998년 제2차 콩고전쟁이 터졌다. '아프리카의 세계대전'이라 불린 이 파괴적 전쟁에 아프리카의 9개국이 참전, '대략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고향에서 내몰렸다'.

판지병원은 제2차 콩고전쟁으로 병실과 장비가 파괴되고 약탈된 상황에서 천막을 치고 치료하며 출발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닥터 미러클로 불리는 병원의 창립자 데니스 무퀘게 박사는 처음에는 임산부를 치료하는 목적으로 병원을 운영했으나 병원은 곧 수많은 강간 피해자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에서 강간 피해자를 가장 많이 치료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판지병원은 5만 5000명이 넘는 강간 피해자를 치료'했다.

서로 다른 종족과 서로 다른 편에 속한 민병대에 의해 자행되는 강간은 그 자체로 폭력적으로 자행되기도 하지만 끔찍한 고문과 함께 벌어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기와 어린아이들을 강간하면 초자연적인 힘의 보호를 받아 총알을 맞아도 끄떡없고, 처녀의 피를 약초와 섞으면 투명 인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주술적인 이유로 신생아를 어린아이를 비롯해 채 돌도 되지 않은 아이들의 강간이 심각한 추세다. 아이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영구적 손상을 입은 채 살아가게 된다.


'세계의 강간 수도'는 2010년 분쟁하 성폭력에 대한 UN 사무총장 특별대표실이 콩고를 표현한 말이었다.
"그건 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수법입니다. 피해자의 내면에서 사람이라는 느낌을 빼앗는 것이지요.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걸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의도적인 전략이지요. 남편 앞에서 아내를 강간해서 남편은 굴욕감으로 떠날 수밖에 없도록, 피해자는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피해자는 그 현실을 감당하며 살 수 없으니 지역을 떠날 테고,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지요. 마을 전체가 버려진 곳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사회조직을 파괴하려는 의도이지요."
"사람들은 아기를 강간하면 특별한 힘을 얻는다고 믿거든요."
"시간이 걸리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유일한 길은 불처벌 관행을 끝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침묵이니까요."
"저는 제게 이렇게 묻던 여든여섯 살 할머니를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를 강간하면서 뭘 찾는 거요? 이 축 늘어진 가슴과 말라붙은 몸에서 말이오?'
이게 성적인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적 욕구의 문제라면 그냥 성인을 강간하지 않겠어요? 왜 여든여섯 살 할머니나 조그만 아기들을 강간합니까? 그리고 왜 그걸 공개적으로 하겠어요? 왜 온 마을 사람들 앞에서 질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사람들이 마을을 버리고 떠나게 할까요? 제가 만난 한 소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먹으라고 강요받았답니다. 그녀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어요. 이건 대량살상 무기입니다."



■국가가 공인한 인신매매 - 마닐라의 위안부

일본은 1930년대 들어 전쟁이 장기화되자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등의 이유로 '군 위안소'를 설치하고 '군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제국군이 저지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인된 성폭력과 인신매매 시스템에 따라 성노예로 감금했던 여성들'이었다. 당시 식민지로서 '대다수는 한국 여성이지만 중국과 말레이반도, 버마, 지금의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비롯해 일본에 점령된 국가의 여성뿐 아니라 소수의 유럽 여성'도 이로 인해 희생되었고 그 수만 해도 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좋은 곳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거나 납치 혹은 연행되어 가기도 했다. 이렇게 끌려간 곳에서 여성들은 끔찍한 성노예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 후에도 위안부 여성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채 숨어 살며 고통을 겪어야 했는데, 1990년대에 들어서야 공론화되고 정부 차원의 조사와 일본에의 진상 규명 요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으로 번지며 세계 각국에서 사죄와 문제 해결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전면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2016년 취임한 이래 '여성 혐오의 수장'으로 널리 알려진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대통령'이 이끄는 필리핀 정부는 자국의 위안부 문제에 더욱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본 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일본의 전쟁 기록물에서 위안소와 관련된 정보들을 공개하는 것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인정하고 역사 교과서에 싣는 것, 배상, 여성들에 대한 공식적 사과다. 필리핀 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전쟁범죄로 공식 선언하는 것과 공식 조사, 역사 교과서 기재, 필리핀 곳곳에 역사 알림판을 세워 이 여성들이 겪은 고통을 새로운 세대에 알리는 것, 물질적 지원이었다. 요구 사항이 하나도 충족되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최고 권력자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소재로 농담을 한다면 사람들이 그런 폭력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후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한창이다. 2022년에 탱크와 화기로 무장한 전쟁이 벌어진다니 믿을 수가 없다. 2월 24일에 시작될 당시엔 금방 끝날 줄만 알았던 전쟁이 벌써 3개월에 가깝게 이어지고 있다. 연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참상에 대한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민간인에 대한 살상과 집단 매장, 그리고 강간까지.

전쟁이 벌어지는 땅 위에서 여성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굳이 적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끔찍한 폭력과, 육체의 상처로 정신까지 잠식당해 일생을 고통받는 이야기. 우리의 지난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일본군위안부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미처 몰랐던 것은 그것이 진실의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관통당한 몸』은 30년 동안 분쟁 지역 전문 기자로 활동한 저자 크리스티나 램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시 강간의 실태를 추적하여 쓴 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강력한 전쟁 무기로서 강간이 가지는 위력을 이야기한다. 신체의 훼손을 넘어 살인에까지 이르는 고문과,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자신이 살던 공동체를 파괴하며 삶을 완전히 해체한다.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영아 강간은 물론, 아직 공론화되지도 못한 남성 피해자들은 언제쯤 자신이 당한 상처를 꺼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강간은 성적인 범죄가 아니라 힘을 과시하고 상대를 파괴하는 통제와 권력에 관한 범죄이다. 우리는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고 배운다. 인간을 죽이면 안 된다고 배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파괴할 수 없다고 배운다. 삶의 불공평이 삶에서 모두에게 주어지는 가장 공평한 명제라지만, 이 불공평함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전쟁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를 규탄하며 이제 그만 제발 멈추기를.


나는 강간이 곳곳에 만연하며 그 이유는 국제 사회와 각국의 법정이 가해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ICC)는 설립 후 21년 동안 전시 강간에 유죄판결을 한 건도 내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유죄판결이 내려진 적이 있었지만 그마저 항소로 뒤집혔다.
그러니 총이나 마체테를 든 사람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에서 돈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성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성폭력 상담도, 배상도 없다. 오히려 그들 자신이 비난을 받는다. 신체적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평생의 트라우마와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밤,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어려움, 그리고 어쩌면 자식 없는 삶까지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심지어 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느린 살인Slow murder'이라 불렀다.
강간은 여성이나 소녀에게만 자행되지 않는다. 남성 강간은 훨씬 더 어두운 비밀에 속하기 때문에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편이다.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동성 강간 생존자는 동성애자가 틀림없거나, 그 이후에 동성애자가 된다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어서 이야기하기가 더욱 힘들다.
 그러나 2010년 콩고 동부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에 따르면 분쟁 지역에서 남성의 거의 4분의 1(23.6퍼센트)이 성폭력을 경험했다. 약 76만 명으로 추정된다.
"강간은 전쟁의 도구이거나 무기입니다." 아길라르는 이렇게 선언했다. 피해자를 죽이거나 강간함으로써 나라를 공격하는 방법이며, 여성들은 군사 목표로 여겨집니다.
언젠가 여성들이 회복할 수 있을까요? 내가 그에게 물었다.
"저는 아주 많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만 그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한 여성이 자기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정할 때 그건 자신이 회복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가 되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내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게 놔둘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죠."
분쟁지역 성폭력은 지역적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문제다. 콩고의 한 여성이 말한 것처럼 숲에서 시작돼 계속 타오르는 불과 같다. 침묵을 지키는 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 괜찮다고 말하는 일에 공모하는 것이다.




- 헤아리.다;hea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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