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Sep 08. 2022

악惡이 댐처럼 터져 마음에 가라앉는다

- 정유정, '7년의 밤'

사형수 최현수. 전직 프로야구선수인 그는 세령댐 보안팀장으로 발령받아 아내 은주와 열두 살 아들 서원과 함께 세령마을로 내려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실수로 어린 소녀를 살해한 후, 그로 인해 아내를 죽이고 댐의 수문을 열어 많은 사람을 사망케 한 미치광이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아들 서원은 그날 이후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쓰고 친척들에게도 버림받는다. 결국 서원은 아버지의 부하직원이었던 승환과 생활을 시작하지만 어디에 가든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버지의 그림자는 서원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서원과 승환이 주민 12명이 전부인 작은 등대마을에 다다르는데. 그곳에서 서원은 발신인 불명의 소포를 받게 되고, 그 안에는 승환이 세령호의 비극을 소설로 적은 문서가 담겨있다.

다가오는 아버지의 사형 집행과 어둠 속에 가려진 그날의 진실. 7년 전 그날 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아버지는 정말 범인이었을까?


이야기는 딸의 죽음에 복수하는 아버지 영제와 가해자이자 사형수인 현수, 그의 아들 서원, 그리고 아들의 동거인이자 소설가인 승환을 축으로 진행된다. 서원이 서술하는 현재 시점과 승환이 소설로 적은 7년 전 과거 시점이 교차되며 박진감 넘치는 구성으로 독자들을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처음 3분의 1은 이야기의 속도가 엄청나서 읽다 보면 순식간에 클라이맥스까지 다다르게 하는 몰입감 넘치는 책이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충돌하며 발생하는 긴장과 말할 수 없는 불안이 덮치는 전개가 압권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삶이 무너져내려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때, 그 끝에서 우리가 끝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선악의 모호함, 인간의 겁약, 집착과 지배, 학대 그리고 애정이 소용돌이치며 그려내는 이야기에 결국 압도된다.


아. 정유정! 위대한 그 이름이여.

얘는 뭐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가 많아 싶겠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취미가 책 읽는 게 거의 다이니만큼 좋아하는 작가가 다소 많아도 이해해주시길.


7년의 밤을 처음 읽었던 때가 떠오른다. 책에 집중이 잘 안 되고 재미없게 느껴져서 읽는 책마다 도중에 덮어버리던 책태기. 그런데 『7년의 밤』의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쉬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천성이 담이 작아 폭력 묘사가 많고 등장인물이 죽어나가는 책(고생하고 실패하는 등등 도 못 봄)은 못 보는데,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읽다 지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중병을 앓고 있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태풍처럼 휘몰아치며 영상을 보듯 생생한 묘사와 다음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 전개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잠시 책에서 눈을 돌려 큰 숨을 들이마시고, 손에 쥔 땀을 닦는 정도였다. 책 속에 들어갈 것 같다는 말이 과장인 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현상을 아주 생생히 경험했다.


『Axt』 편집부에서 펴낸 『이것이 나의 도끼다』에서 정유정 작가는 "나는 소설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 체험하게 하는 소설. 내 소설은 후자에 속한다. 생각할 것 없이 읽는 순간 온몸으로 느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또한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서는 "벌써 알고 있겠지만 내 소설은 후자의 범주에 속한다.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인 후, 실제에선 경험하기 힘든 일을 실제처럼 겪게 함으로써,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어 안전한 현실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다. 돌아간 후로도, 이야기를 통해 던져진 질문으로 인해 심란해하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하는 게 작가로서의 내 바람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책은 그녀가 말하는 '소설 속 새로운 세계에서 경험한 일을 현실로 돌아가 심란해하며 고민케 하는' 그야말로 '체험하는 소설'에 다름 아니다.

이후로도 정유정 작가의 책을 다 읽어보았는데, 인터뷰에서 말한 '본인의 책에서는 파리 한 마리도 자신의 허락 없이 나오지 못한다'는 그 자신감이 납득이 된다. 그건 스스로를 부단히 깎고 단련하고 노력하여 끝내 자신의 궁극에 다다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인간 내면의 악과 본질과 삶에 대한 통찰을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담아 능수능란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야기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정유정 작가. 사랑합니다.

『7년의 밤』 추석 연휴에 한 번 읽어보심이, 강추강추!!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경험이 가르친바, 호의는 믿을 만한 게 아니었다. 유효기간은 베푸는 쪽이 그걸 거두기 전까지고, 하루짜리 호의도 부지기수였다. 고마워하며 사양하는 게 서로 낯이 서는 길이었다.
'고양이는 뭔가를 할퀴어야 하고, 개는 뭔가를 물어뜯어야 하며, 나는 뭔가를 써야 한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트레스는 겁쟁이의 변명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 터지게 싸워 거꾸러뜨려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침이라도 뱉어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는 법'이었다.
"제 안에 있는 걸 누가 만들었는데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밟은 사람이 누군데요. 아버지예요. ㅈ신을 죽이고, 누군가를 죽이고, 스스로 괴물이 된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고요."
"그래서였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쓸고 갔다. 아저씨가 말했다.
"그래서...... 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최현수라는 저 거한의 세상은 어째 이리도 좁은 것일까. 영혼은 수수밭 우물에, 삶은 철창에, 주검은 마티즈 운전석만큼 옹색한 관에 갇혀 있었다.
스스로 부른 운명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다.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너는 아비 목에 수없이 밧줄을 건 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풀어야 한다고, 살인범이 아닌 최현수라는 불행한 인간의 목에서, 우물에 갇힌 채 죽어간 덩치 큰 남자의 삶에서, 내게 승부구를 요구한 포수의 손에서, 내 아버지의 가슴에서.



- 헤아리.다;heari.da

매거진의 이전글 용의자가 너무 많은 "빌라 매그놀리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