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내가 늙어 네가 자란다면

- 백수린, '여름의 빌라' 중에서

by hearida

"살아 있다는 감각과 동시에 찾아오던 이미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 아,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기억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생생할까?"


- 백수린, '여름의 빌라' 중에서



며칠 전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록'을 보는데 김혜자 씨가 나왔어요.

보는 내내 웃다가 또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흐르다가 난리도 아니었지요.

오랜 시간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삶에 성실히 임했던 사람 특유의 과시하지 않는 자신감과 일에 대한 자부심, 자신의 모자람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 단어와 문장에 깃들어 있는 따스함까지.

그야말로 '혜자스러운' 시간이었어요.

왜 나는 저렇게 살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 앞으로라도 그렇게 해보자는 각오, 존경과 부러움 같은 감정이 마구 뒤섞여 조금은 아프게 하지만 대부분 감동하며 봤답니다.

작품이나 일, 자녀와 남편에 대한 멋진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끝나고 나서 유독 가슴에 남는 건 "나이가 들면, 뭔가 조금 슬프다"는 말이었어요.



한때는 젊음이 아주 당연했지요.

아무리 뛰어도 별로 숨이 차지 않고, 오래 걸어도 피로하지 않던 때에.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부드럽고 꽃은 향기로워도 그게 대단하다 여기지 않던 시절에.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치며 실없는 얘기만 계속하다 밤을 꼬박 새운 후 첫 차를 타고 집에 가거나

혼자 새벽 버스를 타고 무작정 떠나 바다 저 편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거나

문 너머 발소리만 들어도 좋아하는 사람인 걸 알아채곤 거울로 얼굴을 급히 살피거나

대차게 차인 후에 건대에서 홍대까지 울며 내내 걷거나

밤새 공부하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 심장이 저릿하던

젊던 어느 날들.


멀리 떠나던 날 공항 유리벽 틈새로 빼꼼 보이던 배웅 나온 친구의 눈물 고인 눈과

원피스에 힐을 차려입고 함께 손을 잡고 전시회에 가던 아직 젊던 엄마와

정신없이 흘러가는 결혼식에서 신랑과 꼭 잡은 손으로 보내던 둘만의 신호나

아직 뒤집지도 못하던 아이의 한없이 보드랍던 살결과 귓가에 속삭이던 옹알이처럼

돌아보면 아름답기만 한 순간들.


그런 기억들은 정말 왜 이리 선명한지.

오늘의 나는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것도 같은데.

요즘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너무 아름답다'는 감동, '살아있다'는 지금의 실감, 그리고 뒤이어 옅은 슬픔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부터 슬픔이 조금씩 나를 잠식하고

자주 나의 나이듦을 부정하거나 거스르고 싶어 져요.

하지만 그런 때에는 늘 아이를 생각합니다.


따사로운 봄에 싹을 틔워 비 오고 더운 여름에 쑥쑥 자라

가을엔 결실을 맺고 추운 겨울엔 깊은 잠에 드는 게 당연한 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 탈이 나는 법이잖아요.

내가 나이 드는 걸 손사래 치고 싫어하고 멀리하면

자꾸 돌이키려 하고 시간을 되돌리려 하면

내 아이는 자랄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늙어 네가 자란다면 그래, 내가 늙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 드는 게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하게도 느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고

우리는 결국 늙어 결국 한 줌의 흙이 되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늘 생생히 되살아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이 있고

또 눈을 감으면 조금 전 일처럼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고

그리고

겨울 지나 기적처럼 봄이 오듯 자연스레

내가 나이 들수록 또 새싹처럼 자라나는 새 생명들이 있으니

아, 다행이다 싶어요.


젊고 늙고 좋고 싫고 기쁘고 슬프고 짜증 나고 보람차고

저마다 지닌 오늘의 기분은 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가진 지금의 이 모든 삶의 현상들을 마음껏 느끼고 누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루가 저물 때 이불속엔 따스함만 가져가 포근히 잠들었으면.


Wien, Austria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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