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Apr 25. 2023

내시경실의 퇴마사들

악귀를 쫓으려면 수면제를 내놔라!

매년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 늘 사는 지역의 대학병원에서 검진을 받는데, 올해는 회사에서 클릭에 게을렀던 유유놈(!) 덕분에 둘이 손잡고 서울까지 가게 되었다. 검진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이따 뭐 먹을지 고민도 하고, 예전에 유유랑 서울에서 데이트하던 이야기도 도란도란 나누며 병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둘이 오붓하게 나들이하는 기분이 들어 신나게 병원에 들어갔는데 이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신분증을 안 가지고 온 거다. 세상에! 전날부터 유유 신분증이며 검사 키트며 이것저것 다 챙겨놓고 정작 내 신분증은 어디다 빼먹고 왔는지 모르겠다. 진짜 이놈의 정신머리!

그래도 다행히 검진은 받을 수 있었다. 대신 검진 결과 서류를 떼려면 다시 신분증을 들고 내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걸 까먹냐는 유유의 비웃음을 한껏 받으며 터덜터덜 여자 탈의실로 떠났다. 그리고 닥친 두 번째 시련. 양말을 벗다가 탈의실 옷장 열쇠 겸 검진 대기용 팔찌를 옷장 안에 넣고 닫아버린 거다. 한참 문 앞에서 혼자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조용히 접수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저, 팔찌를 옷장 안에..."라고 얼버무리며 최대한 불쌍하고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더니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이 웃으며 "종종 그러세요" 하고 열어주셨다. 다정한 사람, 감사합니다.

난 뭐가 문젤까 생각하며 검진복으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신고 나와 검진실로 향하는데 안내해 주시던 간호사 분께서 조용히 귓속말을 해주셨다. "저... 신발 거꾸로 신으셨어요." 내려다보니 왼쪽 오른쪽 바꿔 신어 밖으로 툭 튀어나온 귀여운 내 엄지발가락들이 빼꼼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길바닥에서 급히 벗다가 자빠질 뻔하고, 정말 주접이 풍년인 아침이었다.

하... 나이 드니 주책이 느는구나 싶다가 아니네, 나 원래 그랬네 하고 기억해 버렸다. 나란 사람, 달리는 지하철 문에 얼굴도 껴보고, 계단 위에서 아래까지 액션 영화처럼 무릎으로 내려온 적도 있고, 맨홀 뚜껑에 힐 굽이 뽑힌 적도 있고. 그래, 원래 내 인생이 시트콤이었지. 이렇게 생각하자 부끄러움이 조금 가시고 내가 초심을 잃지 않은 인간이라는 데에 조금 자부심까지 느꼈다.


여하튼 여러 난관을 헤치고 겨우 건강검진이 시작되었다. 시력 검사, 청력 검사, 뇌파 검사, 피검사부터 복부 초음파에 뭐에 이것저것 받았는데 괜찮았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간 갓 잡힌 생선처럼 여기저기 뒤적여지고 누르고 뒤집히고 살펴봐지고 그러긴 했지만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마지막... 그것만 빼고. 그러니까 그거... 그...

위 내시경!

물론 이번이 첫 내시경은 아니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받아봤고 늘 잘 넘겨왔다. 다만, 이제까지는 늘 수면으로 받았을 뿐.

얼마 전 '나 혼자 산다'에서 팜유 패밀리가 수면으로 내시경 받은 게 화제가 되었는데, 나도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거 보고 수면 내시경 받는 게 꺼려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야 뭐, 누굴 때리고 욕하는 것도 아니고 헛소리 좀 하는 거면 감당할 수 있다. 기억 못 하니까 되려 더 좋다. 아픈 것보다야 부끄러운 게 훨씬 낫지.

사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비수면으로 내시경을 받는다. 엄마도 아빠도 유유도, 절친 강여사마저 모두 비수면을 선택한다. 시간도 돈도 후유증도 덜해서 좋다고 하는데 나는 늘 그들을 비웃었다. 안 아프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괜히 센 척 하기는, 바보들. 그럼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야, 그거 뭐 아프다고. 숨 몇 번 들이쉬면 끝나."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위 내시경 전에 상담 창구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복용하고 있는 약 때문에 문제가 좀 생겼다. 그러니까 내가 현재 먹는 약이 있는데, 이 약을 먹으면 수면 내시경을 했을 때 경련이 일어날 수 있어 수면은 안 된다고. 그러면서 비수면은 어떠냐고 했다.

"다음에 받겠습니다."

일어서려는 나. 그리고 다급히 나를 잡는 그녀의 손.

"비수면, 하나도 안 아파요. 금방 끝나요."

"아니요, 다음에 받을래요."

다시 일어서려는 나. 놔주지 않는 그녀.

"다음에 받으시면 더 번거로워요. 그냥 오신 김에 받으세요. 진짜 금방 끝나요."

"근데 저... 비수면은 한 번도 안 받..."

"오늘 받아보세요."

그렇게 몇 번의 실랑이 속에 패배한 나는 결국 가스제거제를 먹고 조용히 대기실에 앉아 있게 되었다. 급히 인터넷으로 비수면 위내시경 후기를 찾아 약 열일곱 건 정도를 정독하였다. 그리고 엄마와 통화그까짓 거 뭐 무섭냐며 숨 몇 번 쉬면 끝난다고 하심, 유유와의 통화위로나 노하우 없이 비웃음소리만 들려준 남편놈. 이를 통해 나는 일단 호흡을 잘하고 침을 삼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팁을 얻었다. 2분, 2분만 참으면 된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방으로 들어가니 우선 목 안에 마취제를 뿌려주었다. 그리고 옆으로 누워 자세를 잡고 준비하니 드디어 내 앞으로 다가온 내시경 그놈.

"꿀꺽하세요, 꿀꺽."

씹으면 씹히는 과자도 아닌데 꿀꺽한다고 어디 삼켜지겠는가. 내시경이 들어가는데 일단 목이 너무 아프고 구토할 것 같은 느낌에 불편함도 너무 컸다. 하지만 그래도 처음엔 참을만했다. 다들 얘기한 것처럼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고, 스읍 후우 스읍 하아. 그러니까 선생님이 "잘하고 있어요, 금방 끝나요"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내 고개가 너무 쳐들어져 있었다는 거다. 이게 왜 문제냐면 내시경이 목에 꽂혀 있는 관계로 침을 삼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는 고개를 아래로 해서 침이 조금 민망하고 더러워도 아래로 줄줄 흐르게 둬야 한다. 하지만 내 자존심보다 높은 고개 때문에 침이 내려가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꼴깍꼴깍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끔찍한 사래에 들리고 말았다.

"커 커컥 커커컥 커케겍 웨엑 으어억"

나는 발광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콧물도 줄줄 흐르고 침은 계속 목구멍으로 꼴딱꼴딱 넘어가고 나는 환장하고 미치겠고. 숨이 쉬기 힘들어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공포에 휩싸여 손으로 빨리 이 그지 같은 내시경을 잡아 빼라고 하고 있는데 다들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의 버둥거림이 심해지자 간호사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와서 내 손발을 꾸욱 눌렀다. "괜찮아요"안 괜찮다고, "금방 끝나요"지금 빼라고, 이런 실랑이가 이어졌다. 마치 악령이 든 여자에게 퇴마의식을 진행하는 고소트버스터즈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잠깐 변명을 하자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주사를 맞아도 울지 않는 아이였다. 아픈 것도 제법 잘 참고 수술도 여러 번 했었고 애도 낳아봤다. 그러니까 나는 엄살쟁이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이건, 이 비수면 내시경은! 진짜! 죽을 뻔했다고!!!

나이 마흔둘에 병원에서 눈물 콧물, 결국에 침까지 줄줄 흘리며 울어본 적 있는가? 진짜 추하다. 추한데 분하고 분한데 아프고 아픈데 서럽고 막 그렇다. 겨우 내시경이 끝났는데 어후, 말도 안 나오고 꺼이꺼이 하는데 옆에 간호사 선생님이 아이 달래듯이 어깨를 끌어안고 "오늘 너무 잘했어요, 너무 훌륭해요" 해주셨다. 진짜 병 주고 약 주고 다들 밉다, 미워.

이렇게 힘들게 내시경 했는데 위라도 깨끗했으면 좋을 것을, 결과는 "위축성 위염"이었다. 술과 담배를 매일 엄청나게 한 50대 후반의 남성과 맞먹는 위 상태라고. 이런 말 들으니 더 속상하네. 여러모로 자연사에서 한 발 멀어진 기분이다. 어쨌든 다신 다신 절대 다신 비수면 내시경은 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시경을 안 하고 말지, 진짜 나는 못 해 먹겠다!!!


봄산책이 행복한 내딸아, 너는 이담에 꼭꼭 수면내시경 받아라!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이전 05화 올 핫핑크 공주공주 자전거를 탑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