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May 11. 2023

체중에 목을 매며 산다

말할 수 없는 비밀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그건, 먹고 토하기(이하 '먹토').


지금은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줄었지만 이십 년에 가까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틈만 나면, 배가 고프면, 너무 많이 먹으면, 살이 쪘다 싶으면, 먹고 일부러 토를 했다. 어떤 날엔 며칠이나 괜찮은 날도 있었지만 때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먹고 토하는 건 체중을 늘리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또한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최선의 수단이기도 했다.


살면서 몸에 안 좋은 것들을 골라골라 꽤 많이도 했었다. 운동은 당연히 안 했고, 술도 많이 마셨고, 잠도 잘 자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풀지 않고 몸에 가득 쌓아두기도 했고, 한때는 골초였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기억에만 남아있다.

하지만 이 '먹토'는 좀처럼 과거에 머물지 않고 자꾸 현생에 고개를 들이민다. 자연사를 목표로 하며 건강에 신경 쓰게 된 요즘, 나의 최우선 목표는 바로 이 '먹토'를 내 인생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거다. 다시는 삶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게 갈가리 찢고 산산이 분해해서 나에게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고 싶다.


건강한 몸, 행복한 삶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사랑하는 거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계단을 오르고 몸에 좋은 걸 챙겨 먹고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체중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지금의 나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제일 필요하다.

하지만 솔직히 생각만큼 쉽지 않다. 여전히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빈 속에 체중을 재고, 100g 200g만 늘어도 좌절하고 만다. 여기서 1kg만 빼면 지금보다 더 예뻐지지 않을까, 2kg만 빼면 옷태가 훨씬 낫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하다. 인터넷을 하다가 무의식 중에 다이어트 광고를 클릭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렇다. 체중에 무뎌지는 건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


지금은 비리비리한 약골의 몸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누가 봐도 기골이 장대한 장군감 같은 체형으로 살았다. 작았던 몸이 중학교 때부터 슬슬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고등학교 가면서 일 년에 5킬로씩 증량해서 졸업할 무렵에는 15kg이 쪄 있었다. 이때는 흰 추리닝을 입으면 '백곰', 갈색 재킷을 입으면 '호랑이', 검은 패딩을 입으면 '흑돼지' 등으로 불리곤 했는데, 내가 봐도 누가 봐도 동글동글 푸짐한 체형이었다.

지금도 나는 늘 그때가 그립다.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에게 살 때문에 자주 놀림을 받곤 했지만, 아주 잠깐 속상했을 뿐 대체로 행복했다. 스트레스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늘 세상이 내 편인 듯 두려움이 없었고, 먹는 게 너무 즐거웠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42kg이 되는 게 평생의 소원인 모태 마름 엄마는 늘 내게 묻곤 했다. “넌 어떻게 그냥 맛있는 게 없고 매번 ‘진짜 맛있’고 ‘정말 맛있’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뿐이야?”라고. 삼시 세 끼에 간식에 야식까지 너무너무 맛있는 걸 먹는 기쁨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던 날들이었다.

당시의 나는 라면 세 개는 거뜬히 끓여 먹고 거기에 밥도 말아먹었으며, 학교 끝나고 피자 한 판을 먹은 뒤에 노래방에 가서 몸을 풀고 후식으로 햄버거(버거킹 와퍼 정도의 사이즈) 하나는 기본으로 먹을 수 있었다. 살찔까 봐 걱정하는 엄마의 눈을 피해 탕수육 대자를 시켜서는 아저씨께 “꼭 30분 뒤에 그릇 가져가셔야 해요!”(배달앱이 없던 시절;) 하는 다짐을 받고 헐레벌떡 먹어댔고, 아이스크림 한 통 정도는 가뿐하게 비웠다.

그땐 잘 체하지도 않았다. 소화도 잘 됐고 피부에는 기름이 좔좔 흘렀고 에너지도 넘쳤다. 먹고 바로 누워서 배를 퉁퉁 치고 있으면 '아, 세상에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있을까' 싶었다.


고등학교 때는 솔직히 대학 가면 살 빠진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기도 했다. 스무 살만 되면 마법사가 요술봉을 흔들어서 살이 쏙 빠질 것만 같았는데. 당연히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 책상에만 앉아 있다가 계속 돌아다니고 운동도 좀 하고 그러니까 약간의 감소는 있었지만 엄청난 변화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늘 나를 날씬하고 예쁜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사랑스럽고 매력이 넘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한눈에 반할 스타일은 아니더라도 조금 겪다 보면 푹 빠지게 될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고 입 밖으로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때 나는 제법 언변이 좋고 잘 웃겨서 곁에 사람들이 많았다. 원래 인간이란 같이 어울리다 보면 어떻게든 서로의 장점을 찾아내는 법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도 내 장점을 알아보리라 늘 믿었다.


이 모든 게 무너진 건 유학을 가면서였다. 그때까지 나를 지탱하던 모든 믿음이 완전히 무너졌다. 회화는 가능하지만 대화는 되지 않는, 말을 해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내 무기였던 언변이나 개그, 재치는 힘을 잃었다. 자꾸 위축이 되고 외로움만 커져갔다.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먹고 또 먹었고, 배가 불러도 입이 자꾸 당겨서 자다가도 일어나 한밤중에 먹을 것을 입에 넣었다. 그랬더니 반년만에 8킬로가 쪄버렸다.

나는 더 이상 통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밝지도 않았다. 조용했고 사람들 뒤로 자꾸 숨었고 늘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이제 내가 사랑하던 매력 넘치는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변한 모습으로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나는 나에게 갇혀버렸다.

그러다 어느 날, TV에서 먹고 토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처음엔 왜 그런 짓을 하나 싶었고, 다음엔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 나도 저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 싶어졌다. 먹은 걸 그대로 게워버리면 먹지 않은 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먹고 토했다.

진짜였다. 그렇게나 많이 먹었는데 살이 찌지 않았다. 체중이 변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신비로운 마법 같은 힘을 얻은 것만 같았다.


먹어도 찌지 않는 법.

스물두 살이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오래 나의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건 신비롭지도 마법도 아닌, 그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귀여운 먹보, 나의 그녀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이전 06화 내시경실의 퇴마사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