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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May 26. 2023

먹토는 나의 정체성이 아니다

잠시의 어려움이라는 믿음

삶은 누구에게나 다양한 도전과 시련을 안겨준다. 나 역시 살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고, 대부분은 어떻게든 끝이 났다. 때로는 이겨내고 때로는 무릎 꿇으며 승리의 훈장과 실패의 상처를 마음에 새긴 채 여기까지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길고 질긴 싸움이었던 과식증, 이 먹토의 끝은 과연 어떨까?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물론 전투는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피가 낭자하고 시체가 가득한 격렬함은 지나갔지만, 아직 휴전일뿐 종전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체중이 기준치를 벗어난 날이면 음식은 민감한 레이더로 약해진 나를 캐치해 호시탐탐 유혹한다. 그러면 나는 또 어김없이 실컷 먹고 토해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쉽게 굴복하는 일은 이제 없다. 싸우기도 전에 백기를 들고 항복하거나, 결국 나는 패배자로 끝날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에 빠지지도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비밀을 양지로 꺼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널어둔다. 음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를 잠식하던 어둠은, 빛과 사람들의 시선 아래에서 조금씩 말라 결국 소멸할 테니.




먹토는 자존감을 갉아먹고 내 안의 불안과 자괴감을 증폭시켰다. 절제하지 못하고 폭식하는 자신을 보며 나는 내가 작은 욕구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하찮은 인간처럼 느끼곤 했다. 누구에게도 이 고통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혼자만의 절망 속에 늘 머물러 있었다.

가끔 너무 외로울 때면 '나 요즘 너무 먹어서 토할 것 같다니까' 하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다들 설마 거기에 진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그러니까 작작 먹어'라거나 '먹을 것도 모자라는 데 토할 게 어딨냐'며 장난으로 답을 했다. 그러면 나는 또 '그럼 그렇지' 하며 혼자 돌아섰다.

다들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상태와 현실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구멍이 존재하는지 말이다.


영원할 것 같던 어둠 속에서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하나의 이유만 있지 않았다. 

우선 가장 큰 스트레스였던 회사를 관뒀다. 덕분에 나는 늘 나를 괴롭히던 단체생활에서 벗어났고 불편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단순히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은 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조언이나 의미 없는 가십에서 벗어났고, 어색함을 풀기 위해 생각 없이 떠벌였던 바보 같은 나의 말들과 그러고 나서 뒤따라오는 후회가 사라졌으며, 보기 싫은 진상들로부터 탈출했다. 

그리고 삶을 좋아하는 것들로 꾸몄다. 실컷 음악을 듣고 양껏 책을 읽었다. 나라는 사람과 나의 취향과 나의 꿈을 탐구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글로 사람들에게 응원과 위안을 얻었다. 

부모님과 이곳저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고, 기준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엄마아빠와의 귀중한 추억이 생겼고 더 가까워졌고 우리 사이의 이야기가 더 풍성해졌다.


그러던 중에 유유를 만났다. 지금 현재 나의 행복을 이루는 모든 곳에 그가 있다. 그를 만나고 모두에게 들었던 제일 첫마디는 "안정되어 보인다"는 말이었다. 사실이었다. 태어나 가족과 절친 이외에, 특히 이성, 그중에서도 교제하는 이성과 처음으로 아주 견고하고 신뢰가 가득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나를 평가하지 않았고 늘 편하게 대해줬지만 그럼에도 늘 설렘과 즐거움이 넘쳤다. 있는 그대로 내가 받아들여지는 느낌.

덕분에 유유를 만나고 나는 늘 신던 높은 힐을 벗어던졌고, 진하던 아이라이너를 지웠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입던 옷에서 내가 좋아 입는 옷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나니 진짜 내가 드러났고, 포장이 벗겨진 알맹이의 나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말 그대로 행복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매일 꽃밭일 리는 없어서 힘들고 지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훨씬 찬란한 기쁨이 가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이 없다. 여유 있게 먹고 토할만한 여유가 없다. 아이가 나를 그렇게 두지 않는다. 아이의 눈은 어지간한 CCTV보다 성능이 좋아서 어디에 있든 나를 쫓는다.

물론 여기에 더하여, 사랑하는 이들의 지지 아래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닌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병원에 다니며 불안과 강박과 수면장애를 치료하면서 나는 더 편해졌다. 그 과정에서 폭식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살이 빠졌고, 덕분에 체중에 연연하는 일이 훨씬 줄었다. 스트레스가 줄었고 먹토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선순환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먹토가 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잠시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평화를 얻었느냐 하면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체중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무리 말라도, 여전히 더 마른 개말라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다. 건강하다와 날씬하다는 말은 같지 않고, 예쁘다는 게 비단 외형의 문제는 아닐 것이며, 아름다움의 기준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 체중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놓아지지 않는다.

마흔둘이 되어서도 이럴진대, 그럼 나는 백 살이 되어서도 체중에 목 매야 하는 걸까. 먹토의 공포 아래 늘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 배불리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늘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살아야 하는 걸까.

무섭다. 너무 무섭다. 하지만, 지금껏 나의 삶이 어둠에서 햇살 비치는 쪽으로 조금씩 나아갔듯이 앞으로도 더 따스한 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믿고 노력하려 한다.

갈 길이 멀지만 늘 그렇듯, 중요한 건 지금 내미는 이 한 발일 테니.


맛있게 먹고 잘 소화시키겠다는 다짐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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