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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8. 2020

이제는 버려야 할

나의 약들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나 구멍이 있다. 대부분은 크기가 작아 기껏해야 발 하나 빠지는 정도인 데다, 다들 그 구멍을 피해 잘 걷는 법도 알고 있어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게는 큼지막한 구멍이 여러 개 있다. 나는 그 거대한 구멍을 피하는 법도 모른 채 멋대로 걸어대다 자주 그 틈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그 구멍 아래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도 모른 채 몇 날이고 견뎌야만 했다. 내 마음에 있는 그 무시무시한 구멍의 이름은 불안과 우울이다.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크게 3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가지고 태어난 천성이고, 또 하나는 유년 시절의 양육환경, 마지막으로 성장하면서의 경험이라고 한다. 솔직히 나는 내 천성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어려서는 무표정하고 내성적이고 말이 없다고들 했지만, 지금은 수다쟁이에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섞이기도 하고 장난도 좋아하니까. 한없이 밝고 개구진 딸을 보면서 내가 무사히 자랐다면 저렇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내 마음의 구멍이 생긴 것은 분명 유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서 길러졌는데 할머니는 감정 기복이 심하고, 분노의 기준이 없었다. 한번 화가 나면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이고 별 거 아닌 일에도 끔찍한 상처를 주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책임을 상대에게 돌림으로써 욕을 먹은 사람이 그럴만한 잘못을 한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할머니 밑에서 나는 세세한 것 하나하나, 자는 방법까지 통제를 받으며 컸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거짓말을 해서 트러블을 피하는 법을 먼저 배웠고, 그런 나 자신에 대한 혐오도 함께 마음에서 자라났다. 무수히 날아오는 비수 같은 말들이 내 안 깊이 뿌리를 내렸고, 늘 내가 못나서 사랑받지 못하는 거라 생각을 했다.


외로움의 극치였던 타지에서의 날들과 인간성을 갉아먹었던 회사 생활이 가뜩이나 큰 구멍을 극단적으로 키웠다. 결국 서른이 되어 회사를 관둘 때쯤 나는 거의 넉다운이었다. 한 걸음 걸으면 구멍에 빠지고, 또 겨우 나와 한 걸음 내딛자마자 다시 구멍에 빠지길 반복했다. 끝내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구도 보기 싫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소리에 더욱 예민해진 것은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원체 귀가 밝고 예민한 성격이었지만, 그즈음부터 남들이 안 들리거나 신경 쓰지 않을 만한 미세한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고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공포. 밤이 되면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를 덮칠 것 같은 공포가 나를 찾아왔다. 결국 밤에도 불을 끄지 못하고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거기다 사람들이 무서웠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안 좋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닐지 의심하게 됐다. 내 앞에서 나를 챙겨주고 웃고 있다 해도 뒤에서는 어떨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나에게 병원에서 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엄마는 종종 말했지만, 나는 정신병자로 몰지 말라며 엄마에게 화를 냈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바쁘거나, 지쳐있거나, 아니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엄마가 무관심했던 결과를 내가 아파서 그런 거라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고 몰아세우곤 했다. 모두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세상 모든 게 다 싫던 때였다.


병원에 가보기로 결심한 것은 남편과의 만남이 1년 정도 되던 때였다. 남편은 이벤트를 하거나 달콤한 말을 남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되려 그 대극점에 존재하는, 지속 가능하지 못할 행동과 입에 발린 말을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대신 그가 행동은 늘 일관되고 말은 솔직했으며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았다. 늘 냉탕과 열탕을 오가는 연애를 하던 내게 그와의 만남은 반신욕을 하는 것처럼 안정과 행복을 주었다.

그는 나의 모든 예민과 불안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했다. 내 모든 '만약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같은 물음에는 그럴 일은 없다, 고 답했다. 그의 애정 곡선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지만 착실히 위로 올라갔는데, 한 번도 아래로 향한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 사람하고 헤어지면 내게 잘못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늘 외부의 누군가에게 나의 문제를 책임 지웠지만 더 이상 그럴 대상이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지금의 행복을 놓기 싫었다. 정말 낫고 싶어서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집 근처 대학병원에 가서 설문지를 작성하고 잠시 기다리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는데, 상담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하는 말을 컴퓨터에 받아 적고 되묻기를 몇 번 반복하고는 "우울증이네요"라고 말했다. 뒤이어 수면장애와 불안장애 등에 관해 설명을 하고 몇 종류의 약을 처방해줬다. 되도록 햇빛을 많이 보고 가벼운 운동을 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 받은 약은 다섯 알이 들어있었다. 나는 약을 먹기 시작하고 얼마간은 거의 잠만 자거나 누워있었다. 몽롱한 기운이 한동안 지속됐고, 입맛도 없었다. 나는 약 때문에 늘 이런 상태로 생활하면 어쩌나 두렵기까지 했는데 다행히 조금 지나자 이런 증상들은 한결 나아졌다.

살아왔던 대부분의 날 동안 오래 자본 적도 없고 쉽게 잠이 든 적도 없었는데 자는 것이 이토록 편하고 좋은 건지 몰랐다. 식칼처럼 날카롭던 신경이 뚜껑을 씌워놓은 듯 느슨해졌고 상대방의 대화를 곡해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약을 먹지 않는 날에는 엄청난 두통과 몸살을 앓았는데, 곧 그것이 금단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은 시작도 끝도 전문의의 상담과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이후로 몸과 마음의 작은 상태까지 병원과 상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상담이 거듭되는 사이 약은 어느새 열세 알까지 늘어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게 그저 불편한 점을 말했을 뿐인데 약이 한 알씩 많아졌다. 물론 위장약이나 두통약도 포함되어 있지만. 사담이지만 그래서 나는 약 부심이 조금 있다. 그럴만한 일이 아닌 건 나도 알지만 말이다. 


병원에 가는 나만의 즐거움 중 하나는 대기실에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대기실의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 여성과 노인이었고 젊은 사람, 특히 젊은 여자는 거의 없었다. 나는 옷도 예쁘게 차려입고 예약 상태를 확인할 때 말도 제대로(?)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정신의학과 대기실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게 특히나 어르신들 눈에는 신기했나 보다.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 매번 보여서 진료를 마치는 날까지 웃음이 나곤 했다.

하지만 다행히 내 주변의 누구도 대기실에서 마주했던 눈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다. 내가 우울증 약을 먹는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마치 한약을 복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그게 별일이냐 했다. 나는 종종 '내가 볼 때 나는 지극히 정상이지만, 만약 내게 사고가 벌어진다면 뉴스에서는 평소 우울증 약을 복용하던 환자가 사건을 저질렀다 할지 몰라'라고 농을 쳤고, 식구들은 서로 그럼 자기가 뉴스에 인터뷰를 하겠다며 손을 들었다.

작은 외삼촌은 자기도 약을 먹고 있다며, 안 먹는 사람은 인생을 쉽게 산 거라 장난을 쳤다. 엄마는 맨날 '아유, 저 미친년이' 했는데 진짜 미친년이었다고 말해 과일을 먹던 모두를 박장대소케 했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신랑은 살이 빠지는 모습을 보고 다이어트 약이 아니냐며, 혼자 먹지 말고 한 알만 달라고 졸라댔다. 친구 영쓰는 '감기약이나 우울증 약이나 아프면 먹는 거지, 젠장'이라고 말하며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실컷 사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늘 나일뿐이었고 바뀐 건 없었다. 약은 내 마음속 깊고 커다란 구멍을 덮어 문을 만들고 길을 내어 그곳에 빠지지 못하게 도왔다. 나는 평탄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는 법과 곡해하지 않고 편하게 상대를 대하는 법을 매일 체험하였고, 어두운 구멍이 아닌 지면 위에서 생활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자꾸 병원으로 향하는 연쇄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신랑의 직장이 있는 지역으로 오면서 생활이 더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와 떨어진 곳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유학 시절과 다른 게 있다면 밤에는 신랑이 칼퇴근을 하고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만나고 싶으면 KTX나 고속버스를 타면 금방 만날 수도 있었다. 적당한 거리가 생긴 것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뀌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너무 깊은 사랑이 더 큰 불안을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엄마가 그렇다. 엄마가 들으면 분명 서운하겠지만 엄마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지 못하고 본인이 더 힘들어한다. 그렇기에 나는 때론 더 침묵하고 아닌 척해야 할 때도 있다. 신랑은 다행히 그런 면에서 훨씬 여유가 있달까. 어쨌든 지금의 나를 보며 과거의 나를 떠올리지도 않고 미래의 나를 준비하지도 않아서 편하다.

편한 일상 속에 아이를 계획하면서 약은 점차 줄여나가다 완전히 끊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를 낳고 일 년 간 모유수유를 하다 보니 약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었고, 애초에 약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상황에 있을 때 나의 우울과 불안은 최고조였는데, 모두가 힘들어 절로 우울해진다는 가사도 임신과 출산, 육아도 나는 너무 좋다. 지금도 집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는 매일이 가끔 피로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행복하고 즐겁다. 천직인가.


가끔 닫혀있던 문이 들썩거릴 때가 있다. 너무 견디기 힘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서랍 한켠에 약은 지니고 있지만 아직 먹을 만큼 문이 활짝 열린 적은 없다. 다시 약을 먹을 마음이 들진 않지만, 언제든 내가 아프면 약을 먹을 수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도 있음을 잊지 않으면 더 용감하게 생과 마주하게 된다. 그냥 사는 게 그렇지, 힘든 날도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에겐 이제 내 의지로 불안과 우울을 이겨낼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좋아하는 일이 있고, 되고 싶은 꿈도 있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한결같은 신랑과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가 있다. 종종 예민해지고 두려움에 잠 못 드는 밤도 있지만, 그보다 무수히 많은 날을 더없이 무탈하게 보낼 수 있어 감사한 매일이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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