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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Apr 13. 2023

올 핫핑크 공주공주 자전거를 탑니다

보조바퀴가 있거든요

나에게 운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우선 트레이닝복이나 요가복같이 운동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체육관이나 스튜디오처럼 정돈된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며 운동하는 것.

그런데 이건 일단 나가기 전에 씻기도 해야 하고, 옷매무새나 머리도 정돈해야 할 것 같고,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시선도 신경 쓰이고... 남 눈치 많이 보는 내게는 여러모로 마음 쓰이는 게 많다. 거기다 정해진 시간에 매번 맞추는 것도 어려워서, 결국 한 번 두 번 건너뛰다가 손을 놔버리는 악순환을 만들고 만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혼자 날 것으로 집에서 운동하는 것.

옷도 목이 다 늘어진 티셔츠에 적당히 틀어 올린 머리에 세수를 안 한 추레한 모습이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운동이 격해져 땀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든 질질 침을 흘리건 아무도 볼 사람이 없는 자유로움이 최대 특징이다. 이 방법의 최대 적은 자신과의 약속이므로 어기기 굉장히 쉽다는 거지만, 이 허들만 잘 넘기면 또 이보다 좋은 운동이 없다.


그래서 요즘 나는 집에서 혼자 운동을 한다. 오래오래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가능하면 운동 자체의 고단함 외에 다른 어떤 신경도 쓸 필요 없는 운동 환경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너무너무 하기 귀찮고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고 힘들어서 그냥 가만히 누워있고만 싶었다. 그런데 약 3주 가까이 매일 운동을 한 결과, 몸의 컨디션이 점점 좋아지는 게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계단도 이제 좀 수월하게 오르고, 스무 개만 해도 어깨랑 허벅지가 터질 것 같던 버피테스트도 요즘은 한 번에 백 개 가까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니 욕심이 생겨서 조금씩 운동을 늘이고 있다. 낮에 틈틈이 유튜브의 스트레칭이나 넷플릭스의 홈트를 보고 따라 하기도 하고, 아니면 음악을 틀어놓고 되는 대로 막춤을 흔든다. 볼 사람이 없으니까 중간에 동작을 삐끗하거나 꼴이 우스워도 개의치 않고 계획한 만큼 해낼 수 있어 좋다.

내가 뭐, 브이로그를 찍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바디프로필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나랑 느낌이 맞는 운동을 하고 있는 그 자체로 즐겁다. 약간의 근력을 붙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조촐하고 소박한 몸이라 참 다행이다.


나 홀로 운동 중이지만 가끔 운동 메이트가 함께 할 때가 있다. 퇴근한 신랑과 같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할 때도 있고, 같은 아파트 엄마랑 아이 등원시키고 계단을 함께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주말마다 들르시는 엄마와 홈트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끼리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엄마와 하는 것은 좀 별로다. 엄청난 잔소리 폭격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리를 더 높여라, 어깨를 펴라, 호흡을 해라... 와, 어지간한 태릉선수촌 감독님보다 더 깐깐하기 그지없다. 엄마의 이런 과도한 잔소리 때문에 내가 공부도 더 안 하고 어? 편식도 안 고치고 어? 말도 더 안 듣고 어? 하다가 맞았다. 마흔두 살이 돼도 엄마에게 잔소리 듣고 얻어맞고... 여러모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싶다.


이 운동 메이트 안에서 가장 젊고 운동 커리어도 빈약하지만, 어마어마한 근력의 루키가 있으니 바로 나의 여섯 살 딸 수뽕이다. 이제 약 54개월 정도를 내 딸로 살고 있는 그녀는,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자이자 몸이 가만있을 때는 입으로 끊임없이 말하는 자이며 조용할 때는 오직 먹을 때뿐인 엄청난 에너자이저이다.

수뽕과 함께 하는 생활은 그 자체로 사실 하드 트레이닝이다. 그녀의 에너지가 어마어마해서 애초에 이사할 때 집 전체에 두꺼운 매트를 두 겹으로 깔았다. 덕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아랫집 분들이 "아이 사는 집 같지 않게 조용하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사실 집에 들어서면 매트 위는 마치 정글 같다고나 할까.

하루는 너무 고단한데 계속 놀아달라 해서 강아지 놀이를 개발했다. 이건 내가 공을 던지고 "주워와" 하면 수뽕이가 신나게 달려와 집어오는 놀이인데, 백 번쯤 했을 무렵 지친 건 계속 달린 그녀가 아니라 앉아서 던지기만 하던 나였다.


수뽕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거실에서 TV를 보며 운동할까 해서 저렴한 스텝퍼 하나를 지난주에 샀는데 사은품으로 아령이 함께 왔다. 상자를 열어 물건을 확인하고 꺼내둔 채 저녁을 준비하러 갔는데, 얼마 안 있어 수뽕이 '엄마' 하고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100cm가 조금 넘는 키에 18kg인 어린 내 딸이 양팔에 1kg짜리 아령 하나씩을 들고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내리라고 하려는데 팔놀림이 너무 가뿐해 보여서 숫자를 세보니 하나, 둘, 셋, 넷...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 서른? 그러다 병난다고 그만하라 하니 가볍게 아령을 내려놓고 이제 스텝퍼에 올라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뭐지, 이 아이?


최근 수뽕은 네발 자전거 타기에 한껏 재미를 들렸다. 수뽕의 자전거는 앞 머리부터 뒤 꽁지까지 온갖 공주가 가득 그려져 있는 올 핫핑크의, 실물을 보면 소스라치게 아름다워 다소 거리를 두게 되는 그런 자전거다.

어느 날 유유랑 둘이 산책 나간 길에 동네 삼천리 자전거에서 발견하고 바로 구입해서는,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 이정재의 등장신처럼 당당하게 타고 들어오길래 경악하고 말았다. 솔직히 내가 보고 있던 자전거는 따로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따님의 취향은 늘 존중하는 바이다. 핑크, 반짝이, 공주, 캐릭터, 뭐, 이런 것들.


여하튼 주말에 유유와 수뽕과 산책을 나갔다. 수뽕은 자전거를 타고 유유는 뒤에 설치한 안전바를 잡고 나는 옆에서 천천히 걸으며 봄날의 기분 좋은 산책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수뽕은 자전거 페달 밟기를 멈추고 내리고 싶다고 했다. 손잡이를 잡고 끌 수 있는 킥보드나 그냥 밀면 정방향으로 나아가는 유모차와 달리, 이 네 발 자전거란 놈은 핸들을 잡는 이가 없으면 뒤에서 밀었을 때 제멋대로 지그재그 가버린다. 그렇다고 손잡이를 잡아끌기엔 높이가 낮아서 한 블록 정도 가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온다.

수뽕이에게 그냥 타고 가자고, 아니면 집에 간다고, 엄마아빠 힘들다고 갖은 회유와 협박과 설명을 이어도 수뽕은 완강했다. 그녀의 허벅지가, 그녀의 종아리가, 그녀의 발바닥이 강렬하게 땅을 원하고 있던 것이다. 땅을 밟고 힘껏 디뎌 달려 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결국 자전거에서 뛰쳐 내린 수뽕은 냅다 뛰기 시작했고, 뒤를 이어 유유도 보디가드처럼 그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겨진 나에게 남겨진 가혹한 선택지는 그저 허리를 굽혀 밀기...

잠깐, 그뿐만이 아니지 싶은데?


사실 1.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탈 것은 거의 못 탄다고 보면 된다. 롤러스케이트, 인라인, 킥보드, 스키, 스노보드 등등부터 자동차 운전도 아이 낳고 겨우 면허 따서 동네 한 바퀴나 도는 정도다. 자전거를 몇 번 배우려 시도해 봤지만 이 비루한 몸뚱이는 페달을 돌리며 두 발을 떼는 순간 옆으로 넘어지기를 반복,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사실 2. 나는 키가 작다.

최근 건강검진에서 157cm라고 했다유유는 비웃었다. 비록 수뽕의 자전거가 성인용은 아니지만 나 정도의 사이즈면 어떻게 구겨서 탈 수 있지 않을까? 옆에 보조바퀴가 있으니 균형 잡는 건 걱정 안 해도 되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안장에 슬쩍 올라보았다. 그리고 두 발을 페달에 올리고 힘을 주어 밟으니 오오! 스르륵, 하고 잘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 마흔두 살이 되어 나는 드디어 느낀 것이다. 이 올 핫핑크 공주공주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기쁨을. 따스한 햇살 아래 봄 꽃 향기를 맡으며 여유롭게 라이딩하는 행복을.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물론  지나가던 아저씨가 가던 길을 멈추고 몸까지 돌리며 유심히 오래 쳐다보긴 했다. 길을 건너던 여학생 두 명이 나를 보고 소곤거리기도 했고. 하지만 그럴 땐 내가 귀여워서 그런 거라 생각하기로 진작에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스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마스크를 쓰면 부끄러움도 조금은 가려진다.

이 날 동네 한 바퀴는 수뽕과 내가 번갈아 자전거를 탔다. 카페와 물건 사는 시간을 제외하고 약 한 시간 반정도 탄 것 같다. 주로 내리막길은 수뽕이 타고 평지와 오르막은 내가 탔는데, 타면서 깨달은 건 운동이 엄청 된다는 거였다. 진짜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체육관에 있는 사이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근육이 불끈불끈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 이러면 따로 허벅지를 조질단련할 필요가 없겠네. 기분도 좋고 운동도 되고 일석이조!

그래서 오늘도 타기로 했다. 너무너무 좋은 라이딩, 마음에 쏙 들어. ㅎㅎ


그래서 말인데, 유유.

나 자전거 좀 사줘.

아동용으로.

보조바퀴 달린 거.

공주랑 핑크는 말고.


수뽕과 나의 올 핫핑크 공주공주 자전거! 사이즈가 딱입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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