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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Mar 30. 2023

산은 산이요 계단은 계단이라

자연사를 위한 위대한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말은 평생 수행에 정진하셨던 성철큰스님의 법어로 유명하다. 그래서 성철스님이 하셨다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 중국 송나라 때의 승려 청원유신 선사가 남긴 말을 성철스님이 원용한 거라고. 여하튼 이 말인즉, 수도修道가 얕을 때는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듯 혼란스럽지만 득도한 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 작용과 독립해 존재한다고 관망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는 뜻이라는 데 솔직히 몇 번을 읽어도 잘 모르겠다.


자, 그러면 내가 왜 굳이 인터넷으로 검색까지 해가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이리도 길게 썼느냐. 이게 요즘 내가 아침마다 미친 여자처럼 계속 중얼거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고 계단은 계단. 아이고, 나 죽네.




처음 계단 오르기를 시작한 것은 3월의 한 월요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오늘은 반드시 계단을 오르겠다 다짐을 하고, 아이와 함께 집을 나오면서도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9시 15분에 아파트 입구에서 유치원 버스를 태우고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해. 계단, 계단, 계단. 계단을 오르자. 그렇게 버스는 떠나고 결전지인 아파트 우리 동으로 향하는데 이런. 첫 번째 갈등이 시작되고 말았다.


평소에 아이를 보내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같은 동의 친한 엄마가 있는데 집까지 가는 동안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막상 현관 입구에서 헤어지려니 평소보다 그 수다가 훨씬 재밌게 느껴지는 거다. 마치 다이어트 중에 한 입 맛본 치킨 퍽퍽살처럼 달콤한 느낌. 거기다 엘리베이터 안 타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간다면 유난 떤다 생각하진 않을까 신경도 쓰이고.

그래서 그냥 관둘까, 아니면 일단 올라갔다 다시 내려올까, 아파트 입구에서 우리 동 현관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내적 갈등이 엄청났다.


하지만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지나가는 바람도 알고 호랑이처럼 생긴 우리 동네 길고양이도 다 알듯이 이건 그냥 핑계다. 평소에 내가 뭐 엄청 수다를 떨거나 사람 어울리는 걸 즐기는 스타일도 아닌데. 그리고 그냥 운동삼아 걷기로 했다 하면 누가 뭐라 할 텐가. 신경도 안 쓸걸? 게다가 계단 오르기를 결정한 데에는 엘리베이터 사용을 줄이겠다는 나름의 환경친화적인 이유도 있는데 다시 올라갔다 내려오면 안 하니만 못하지. 결정적으로 움직이길 싫어하는 성격상 일단 한 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지 않을 게 뻔하다.

그래서 숨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나 이제부터 운동하기로 했어요 하고 인사하며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쿨하게 운동 잘해요, 하고 돌아서던 그녀. 역시 나 혼자만 생각이 너무 많다. INFJ의 숙명인가.


이렇게 많이 썼는데 아직 계단을 타지도 않았네.

여하튼 천신만고 끝에 계단에 들어서자 두 번째 난관. 요즘 우리 아파트가 내부 도장을 다시 하고 있어서 냄새가 너무 심했다. 이 정도면 그냥 도장 공사 끝나고 시작할까 고민을 하는데 벽에 붙은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공사 완료일은 4월 15일. 음, 그건 너무... 나중이구나. 그냥 참고 올라보자.


자, 드디어 L층에서 시작.

1층

2층

3층

4층

5층까지는 무난했다. 할 만 한데?


6층

7층

8층

9층

10층쯤 되니 힘든 것보다 조금 어지러웠다. 너무 빨리 돌고 있는 건가? 조금 천천히 걸어보자.


11층

12층

13층쯤 되니 숨이 차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닐까?


호흡기에 대단히 민감한 유유가 알면 난리가 나겠지만, 지금 이 계단에 유유가 없으니 냅다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마스크를 벗으니 콧잔등에 송송 오른 땀 위로 선선한 바람이 흐른다. 냄새고 미세먼지고 유해가스고 나발이고 숨차서 먼저 죽겠다. 그리고 솔직히 입으로 헥헥거리니 페인트 냄새보다 마스크 안에서 나는 냄새가 더 지독하다.

하지만 더 지독한 건 내 안의 악마 녀석. 이 정도 했으면 슬슬 엘리베이터를 타도 되지 않냐며 그만 타협하고 쉬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잠시 흔들린 건 사실. 하지만 이 속삭임에 넘어가 첫날부터 중도하차하면 진짜 앞으로 죽도 밥도 안 된다. 조금만 더 해보자.


14층

15층

16층까지 오르니 진짜 힘들었지만

17층이 보이니 다 와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18층에서 진짜 고비와 마주했다.

19층은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엉엉 너무너무너무 힘들었다. 젠장. 다리도 다리지만 숨이 너무 차고 머리도 빙빙 돌았다.

하... 엘리베이터를 부를까. 그놈의 엘리베이터. 무슨 119라도 되는 것 같다.

목 놓아 외칩니다. 엘리베이터. 이 순간에 박진영의 '엘리베이터'가 생각나면 진짜 옛날 사람이겠지? 요즘 친구들은 엘리베이터 하면 뭐가 생각날까? 왜 내 머릿속 생각은 이렇게 고된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걸까.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래도 양심이 있지. 19층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20층에 가는 건 너무... 구려. 진짜 여기서 포기하면 너무 별로다. 그래서 이를 악 물고 허벅지를 부여잡고 힘겹게 힘겹게 한 계단씩 올랐다.


20층.

20층.

20층이다!!!!


기뻐할 겨를도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며 현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왜 틀리는 거야!!! 세 번 틀리고 눈물 한 번 훔치고 겨우 들어가서 일단 운동화를 던져버리고 소파로 직행.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다 귀찮다. 일단 소파에 누워서 10분만 자기로 했다. 그 시간이 10시였던가.

그리고 눈을 뜨니 14시. 무려 네 시간을 잤다. 하루를 다 쓴 기분이네. 이렇게 자고도 고단한 데 나 정말 건강해지고 있는 게 맞을까?




그렇게 오른 지 벌써 보름이 넘었는데 그때마다 깨닫는 것이다. '계단은 계단이고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다.' 수도修道가 얕을 때는 계단이 엘리베이터가 될 수 있고 엘리베이터가 계단이 될 수 있듯 혼란스럽지만 득도하니 계단은 영원히 계단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단은 엘리베이터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걸어도 계단은 쉽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단은 엘리베이터처럼 빠르지 않다. 계단은 아무리 걸어도 계단이다. 편해지지 않는다, 절대. 하, 이씨.


어쨌든 3월의 어느 날 자연사를 위한 나에게는 위대하고 세상에는 뭣도 아닌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걸음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힘내자, 힘! 건강해지는 그날까지, 걸어가 보자!


가장 큰 고비는 19층이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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