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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Feb 10. 2019

허벅지에서 멈추는 오늘의 책 읽기

에쿠니 가오리 "냉정과 열정사이"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는 한동안 내가 화장실에 갈 때 가져가는 책이었다.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 그 예쁜 얼굴을 찌푸리지 말기를. 당신의 책은 언제라도 손에 쉽게 잡힌다는 의미니까. 실제로 소담 출판사에서 번역하여 출판한 "냉정과 열정사이"는 크기가 작아서 한 손에 잘 잡힌다.  
 
오늘 아이들과 함께 집 앞 공원에 갈 때 시간 보내기용으로 그녀의 책을 손에 들고 간다. 큰 아이는 나노 휠을 타고, 작은 아이는 자전거 배우기가 재미없어 핸드폰 게임하는 아이들에게 바싹 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는 오후의 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내 몸을 호강시켰다. 한강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 식물로 변한 아내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면 인간의 몸이란 식물성을 포기하고 욕망으로 가득 찬 동물성의 육체로 변해가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원죄에 갇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짧게 하며 오후의 봄 햇살을 느낀다.
 
참 좋다. 몸이 볕에 타는 느낌이. 여름과 달리 봄과 가을의 햇살은 투명하고 건조하다. 그래서 여름과는 달리 지치지 않고 에너지를 받는다는 느낌이 있다.
 
남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아오이는 남자 친구의 누나에게  질문을 받는다
"마빈의 어디가 좋아?"
"올바른 것. 그리고 허벅지."
"허벅지?"
"네 굉장히 멋져요."
 
오늘은 이 대목에서 이 책의 읽기가 끝난다. 허벅지에서. 신혼시절 남편의 책갈피에서 앳되고 순하게 보이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히 벤치에 앉아 있는 남편의 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다. 사진 속의 남편은 어리고 허벅지를 감싸는 청바지가 찢어질 듯 근육질의 허벅지에 유연하고 싱그러운 몸을 갖고 있다. 기분이 나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다정히 있는 것을 봐서가 아니라 저렇게 아름다운 허벅지를 가졌던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그 아름다운 시간을 앳되고 순하게 보이는, 나쁘게 말하면 자기 생각이라고는 없이 의존적으로 보이는 여자가 차지했다는 게 질투가 났다. 독립적이고 세련된 여자였더라도 그 여자가 누구였더라도 질투가 났겠지.
 
시간이 쉼 없이 흘러 나는 늙어가고 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서 발견되는 흰머리에 서글퍼지는. 그러나 이 봄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내 몸을 봄 햇살에 말려 동물성의 욕망들을 털어내고 나도 몇 알의 열매로 변하고 싶다. 그래서 아름다운 허벅지의 시간을 나와 보내지 않았으면서 늙어가는 나를 부려먹는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다. 결국엔 호러로 끝나는 오늘의 글쓰기. 하! 하! 하!
 
밤에 보는 어린 잎들이 가로등 빛에 황금색으로 빛난다.
봄이 금빛으로 물드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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