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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Feb 15. 2019

뿌리 내림,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될 수 없는

봄 냉이

작년에 처음으로 텃밭을 시작했다. 너무 의욕이 앞선 나머지 자연의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내가 하고픈 대로 하고픈 시간에 고추와 토마토, 오이, 깻잎의 모종을 심었더니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새로운 모종을 심으려고 죽은 모종을 손으로 뽑아내려는데 뿌리는 나오지 않고 줄기만 똑똑 끊어졌다. 결국 뿌리는 호미를 가져와 파냈다. 그 사이 뿌리가 땅에 내려 얼마간 자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가느다란 뿌리로 흙을 감싸 쥐고 그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뽑아내는데 제법 힘이 들었다. 한 번 내린 뿌리는 이렇듯 쉽게 파내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잎이 얼어 까맣게 변한 고추 모종을 파내려다 잘못 힘을 줘 엉덩방아를 찧고 흙더미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저 멀리 뿌옇게 먼지 낀 산 아래로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고, 잎 안에 모래가 씹히는 듯 까끌거렸다.


모두의 말에 적극적인 리액션을 보이고 가끔은 그 리액션이 엉뚱하기도 한, 그래서 귀여운 B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눈물부터 뚝 떨어뜨렸다. 화사한 웃음을 주위에 퍼뜨리고, 다른 사람을 살뜰히 배려하는 그녀의 친절한 목소리가 "오빠가......" 이 한 마디에 눈물이 뚝 떨어진다. 2년 가까이 사귀다 이제 결혼 이야기가 나오던 차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B. 짧은 침묵 속 눈물 번지는 그녀의 예쁜 얼굴이 안쓰러워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고, 그에게 너는 너무 과분했다고, 그런 너를 그가 너무 소홀히 대했다고 나는 그를 마구 욕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나 나의 위로는 그 순간뿐 그녀는 한동안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잠시 말을 잃고 눈물을 흘렸다. 아직까지 B는 그에게 내렸으나 끊여져 버린 그녀의 가느다란 뿌리로 그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 뿌리가 여전히 스스로 살아 그녀를 눈물 흘리게 했다. 한 번 내린 뿌리는 쉽게 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원래부터 없던 것이 될 수는 없나 보다. 그것이 땅에 내린 뿌리든 사람에게 내린 뿌리든.


새로 가져온 모종을 모두 심고 호미를 들고 밭둑에 자라난 냉이를 캤다. 겨우내 땅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이파리를 키우며 땅속으로 하얗고 부드러운 뿌리를 내리는 냉이. 내가 캘 수 있는 냉이는 포슬포슬한 땅에 자라는 냉이가 아니다. 포슬포슬한 밭에서 자라는 냉이도 있지만 그 밭은 내 밭이 아니어서 나는 사람들의 발국으로 딱딱하게 된 길 옆이나, 작은 돌들이 단단하게 박힌 땅에 있는 냉이를 캘 수밖에 없다. 이런 곳에서 냉이를 캘 때는 뿌리를 온전히 보존하여 캐는 것이 어렵다. 이만큼 팠으면 다 되었지 싶어서 뿌리를 살짝 잡아당기면 땅에 박힌 뿌리가 끝까지 나오지 않고 중간에 뚝 끊긴다. 역시나 한 번 내린 뿌리는 파내기 어렵다. 마음먹고 파내어도 어딘가에 여린 뿌리가 살아 남아 흙을 감싸 안고 뽑히지 않는다. 다 파내지 못한 뿌리는 시간이 지나 다시 다른 잎을 피울 수도, 그냥 그렇게 흙으로 남을 수도 있다. 끊겨버려 여전히 땅 속에 박혀있는 뿌리가 안타깝다. 가느다란 실뿌리로 살살살 딱딱한 흙을 부비며 언젠가 새 이파리를 또 피워내라고 파헤친 흙을 다시 호미로 토닥토닥 덮어준다.


한 움큼 캐 온 냉이로 된장을 끓여 식탁에 올린다.

싱그러운 봄이 부드러운 뿌리로 내 식탁에 올라 와 있다.

땅 속 어딘가 흙을 감싸 안고 여전히 살아 있는 가느다란 실뿌리를 남겨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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