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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Feb 08. 2019

우리의 처음은 지금과 달랐다

생선 튀김... 처음을 기억하라고? 그래서?

"나의 시부모님은 참 선량한 분들이다." 이 말은 꼭 하고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소한 일들로 남편과 감정이 좋지 않을 때 '어떻게 저런 부모님한테서 이런 아들이 나왔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시부모님은 자식들이 섭섭하게 하더라도 될수록 자식들을 이해하고 믿으시고, 자식에 헌신적인 부모이자, 큰 욕심 없는 분들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시다.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이었다. 시어머님이 동네 아주머니들과 관광버스로 어딘가로 여행을 가신 여름날의 오후. 나는 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내려와 있었고, 나와 고향이 같은 당시 나의 남자 친구는 취업 시험에 통과하여 발령을 기다리는 중에 고향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즈음에 아버님은 낚시로 소일거리를 하셨다. 내가 놀러 가면 남대천에서 낚아온 은어로 튀김을 해 담금주에 곁들여 먹곤 했다.


그 날 오후에도 아버님은 자전거를 타고 남대천에 은어 낚시를 가셨다. 남자 친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집을 비웠고, 나는 낯선 집에 혼자 남아 시어머님이 없는 두 남자의 저녁 준비를 했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고 오직 그 사람이 나의 전부 연애가 한창이었던 나는 앞으로 나의 시부모님이 될 분들에게 무조건 잘 보이고 싶었다. 몹시도 그랬었다. 그러나 나의 칼은 그런 나의 마음을 따라가기에는 턱 없이 서툴렀다. 또각또각 느린 칼질로 호박을 썰어 된장을 끓이고, 생선을 구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늘이 흐리고 후드득 비가 떨어졌다. 우산 없이 비를 맞을 아버님이 걱정이 되었다. 우산을 들고 둑에 올라가 아버님을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천둥이 번쩍거리니 와락 걱정이 덮쳐왔다. 이리저리 아버님을 찾아다니는데 저기 다리 쪽에서 아버님이 비를 맞고 자전거를 끌고 오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뛰어가 우산을 씌워드리니 내가 비 맞는 것을 걱정하시며 괜찮다 하신다. 그러나 나는 또 아버님이 걱정되어 우산을 씌워드리면 또 괜찮다 하신다. 그렇게 아버님과 나는 모두 비를 맞고 집에 돌아왔다. 또르르 자전거를 끌고 오는 아버님 곁을 우산을 들고 어정쩡하게 따라 걸었던 그 길이 참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이 함께 집으로 갈 수 있어서 참 좋다고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은 날씨 때문인지 낚시가 별 재미가 없었다고 검지 손가락 만한 민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셨다. 나는 미리 만들어 놓은 튀김옷을 입혀 아버님이 손질 해 주신 물고기를 튀겨냈다. 부엌에 작은 상을 펴고 오래된 소주잔에 소주를 따라 마주 앉은 아버님과 나. 그리고 민물고기 튀김 세 마리. 흐린 하늘을 뒤로하고 떨어지던 굵은 빗방울에 한기가 느껴졌다. 소주를 꿀꺽 삼키자 쯔르르 싸하다. 그런 나에게 제일 큰 꺽지 튀김을 건네시는 아버님. 따뜻했다. 내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챙겨준다는 게 참 신기하고 따뜻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이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행복한 기억은 17년 결혼생활의 며느리 역할로 점점 더 오래된 기억으로만 남을 뿐 그 기억을 대신할 또 다른 행복한 기억은 없이 '힘듦'만 남는다. 이 '힘듦'은 명절에 특히 그렇다. 나는 막내며느리인데 하나 있는 나의 윗동서는 내일이 설날이면 내가 음식을 다 하고 오늘 저녁에 먹을 국까지 다 끓여놓으면 그제야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결혼 생활을 시작할 때 형편이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한 윗동서를 시어머님이 가엾게 여겨 속마음으로는 괘씸하게 여기실지언정 그 앞에서는 싫은 내색이 없다. 그렇게 길들여진 나의 윗동서는 명절에 일찍 와서 함께 음식을 한 적이 지금껏 다섯 번도 안된다. 덕분에 나는 아이들이 어려 칭얼대는 초보 엄마였을 때도, 교대 근무하는 남편이 명절 연휴에 쉬지 못해 아이들 데리고 혼자 간 명절에도 일복이 터져 났다. 처음에는 손도 빠르고 솜씨도 좋다고 칭찬 듣는 재미에, 그리고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일 년 내내 하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몇 번 내가 힘들고 말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흔을 넘어오고 내 몸이 힘드니 명절을 지내고 돌아오면 또는 생신상을 차리고 돌아오면 몸이 너덜너덜해져 일주일은 아프다. 내가 힘이 드니 시댁에 가는 것이 겁난다.


책임과 의무만 있고, 나의 '힘듦'은 당연히 며느리가 할 바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섭섭하다. 이 번 설에 집으로 돌아오는 내게 시어머님이 힘들다고 명절에 안 오면 안 된다고 다음에 또 오라고 하신다. 그 말씀에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부모님은 나를 좋아하시는 것과 남편을 좋아하시는 게 다르다. 남편은 아들로, 자식으로 그저 좋아하시고, 나는 내가 잘할 때만 좋아하신다. (이런 나의 심정을 브런치 작가 화이트님의 "며느리가 말하는 가성비 0인 관계"를 읽어 보면 아주 잘 이해하실 거다.) 여든이 넘으신 시부모님께 섭섭하다고 투정 부려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참 슬프다. 나를 좋아해 주시고 예뻐해 주셨는데 나는 이제 지치고 힘이 든다. 아름다웠던 기억은 바래고 남루한 현실만 남은 것 같아 쓸쓸하다.


어머님의 채마밭. 정직한 노동으로 자식을 길러낸 그 삶을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시부모가 된다면 다르게 살 것이다. 농담처럼 나의 아들에게 말하다. 너는 명절에 부모 만나러 올 생각 말고 여행이나 다니라고. 꼭 그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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