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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Apr 08. 2019

김치 예찬

나를 위로하는 김치

나는 김치를 애정 한다. 그리고 김치 욕심이 많다. 김치가 떨어지면 몹시 불안하고 허둥거린다. 우리 식구는 캠핑을 자주 가는데 캠핑 갈 때마다 김치를 넉넉히 가져가고, 바쁘고 반찬이 없을 때 잘 익은 김장김치로 뚝딱 할 수 있는 음식을 자주 하는 터라 늘 김장을 많이 한다. 작년에 40포기의 김장을 하면서 왠지 부족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댁에 한 통 보내고, 친구에게 또 한 통 보내고, 우리 식구도 먹고 하여 벌써 절반은 먹었다.


나에게 김장은 겨울 동안만 먹는 김치가 아니고 일 년 동안 먹는 배추김치여서 일 년치 반찬인데 벌써 이만큼 밖에 남지 않아서 살짝 불안하다. 내년에 묵은지로 먹을 김치까지 남겨놓으려면 더 아껴 먹어야겠다 생각 중인데 시어머님께서 손수 기른 쪽파를 라면 상자 하나 가득 보내오셨다. 씻으려고 꺼내보니 큰 소쿠리에 한가득이다. 이걸 어떻게 할까, 모두 다 김치를 할까? 그럼 너무 많을 텐데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팔을 착착 걷어 부치고 쪽파를 씻어 건져놓고 찹쌀풀을 쑤어 식도록 두고 마트에 갔다. 이왕 하는 거 깍두기도 하기로 하고 큰 무를 2개 사 왔다. 무도 깍둑 썰어 절여놓고 두 가지 양념을 준비한다. 까나리 액젓에 잠시 절인 쪽파를 김장하는 커다란 빨간 통에 넣 양념에 버무려 김치통에 넣고, 그 사이 물이 빠진 무를 새우젓을 넣은 양념에 버무려 또 한 통 담아 두고 보니 집안에 젓갈 냄새가 가득하다. 베란다 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양념통을 정리하고, 김치 양념이 묻은 큰 통들을 씻어 엎어놓으니 뿌듯하기 그지없다.  

  


내가 김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향을 떠나 대학에 입학한 뒤다. 대학에 가서 기숙사나 학생식당에서 식판에 먹는 밥이 싫었다. 음식이 낯선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계적으로 아무렇게나 퍼주는 건조한 배식이 낯설었다. 나에게 밥은 주걱으로 밥그릇에 퍼담아 물 묻은 엄마의 두꺼운 손으로 모양을 봉긋하게 만들어 국그릇 옆에 사뿐히 놓아주는 것인데, 식판에 철퍼덕 던져주는 밥은 인정 없는 도시의 차가움인 듯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혼자였던 나는 식판에 담긴 밥 앞에서 우리 가족의 살갑고 정다웠던 밥상이 그리워 외로웠다. 그리고 낯선 양념의 음식들 앞에서 엄마의 김치를 그리워했다. 김치에 생선을 넣어 함께 삭히는 엄마의 김장 김치가 몹시도 먹고 싶었다. 정작 엄마가 차려주던 밥상 앞에서는 김장김치의 생선은 골라내고 잘 먹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그 김치 생각에 입 속에 침이 고이곤 했다. 그래서 방학 때 집에 내려와 밥그릇에 갓 지은 밥을 퍼담아 김치 한 포기를 꺼내 윗부분만 잘라내고 기다란 김치를 크게 한 입 먹고 있으면, 젊은 애가 밥을 궁상스럽게 먹는다고 엄마가 반찬을 더 꺼내 상에 놓아주었다. 애교 없는 맞딸이었던 나는 엄마 아빠가 그리워 외로웠다고, 보고 싶었노라고 그런 말은 않고 "이 김치가 너무 먹고 싶었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밥 한 그릇을 비웠다.


어학연수 가는 것이 한창 유행이었던 시절 나도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를 떠났다. 나는 미국 뉴올리언스에 있는 작은 대학의 ESL 수업을 들으며 대학 근처의 이층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방이 여섯 개, 부엌이 두 개인 낡은 이 집에는 여러 인종의 학생 여섯이 세 들어 부엌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서로 자기 문화의 음식을 해 나누어 먹으며, 맥주 마시고, 서로의 친구를 소개해 주고 그렇게 뉴올리언스의 숨 막히는 더위와 갑작스러운 오후의 소나기를 한 지붕 아래에서 피하고 있었다. 나도 한국계 미국인 관의 차를 얻어 타고 중국인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 와 어설픈 솜씨로 불고기에 배추쌈을 차려놓고, 신기해하는 나의 하우스 메이트들에게 "이 음식은 이렇게 손으로 먹는 거야"하며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주저하는 그들의 입에 배추쌈을 넣어주었다. 젊고 가난하고 착했던 그들은 나의 어쭙잖은 솜씨에도 "So good!"이라며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뉴올리언스의 오후, 나는 그곳에서의 일상이 시들해져 있었다. 늘 함께 붙어 다니던 태국에서 온 난티팜은 뉴저지의 대학으로 떠나고, 매일이 신기하던 뉴올리언스의 거리도 새로울 것이 없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에는 정보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즈음에 심하게 향수를 느꼈다. 떠나 온 모든 것이 그리웠다.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고 부모님께 수신자부담 국제전화를 했다. 수업 빠지고 공원에 앉아 아이스 라떼의 얼음이 모두 녹아 커피가 맛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말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방학마다 과외로 돈을 모으고, 종로의 회화학원을 열심히 다녔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렇게 마음이 목적 없이 떠돌던 시간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씩씩하게 지내고 싶었고, 이 먼 곳까지 오기 위해 애쓴 내 노력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김치를 먹으면 그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시뻘건 김치를 먹으면 멀미처럼 울렁이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뚝 그치게 할 것 같았다.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김치 만드는 레시피를 알 도리가 없었지만 엄마가 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대충 절인 중국 배추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갈아 넣고 마구 버무린 나의 첫 김치. 마늘 냄새가 너무 강했던지 같은 집에 살던 모두가 이층의 부엌으로 우르르 몰려와 "What's going on here?" 현관에서부터 마늘 냄새가 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이건 김치야, 이건 원래 이런 거야' 라며 세상에서 제일 만들기 어려운 요리를 너희에게 먹을 기회를 주겠다며 허풍을 쳤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만든 그 김치가 맛있었다. 그 날 저녁 김치가 담긴 그릇을 손에 들고 어두운 방에  앉아 포크로 김치를 먹고 있었다. 김치가 맛있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해서 눈물이 났다. 함께 ESL 수업을 듣는 선배가 아시아 학생들끼리 하는 파티에 같이 가자고 나를 찾아왔다 울면서 김치를 먹고있는 나를 보고, 왜 이러고 있냐고 묻는데 딱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배가 고파서요"라고 말했다.


요즘도 김치를 만들 때 내가 처음 만들었던 뉴올리언스의 김치가 가끔 생각난다. 아무렇게나 풀어져 힘없이 겉돌던 내 마음을 붙잡아 주었던 나의 첫 김치. 김치는 그렇게 나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는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김치가 떨어질 것 같으면 불안한가 보다.


새로 담은 파김치를 입이 짧은 열한 살 둘째도 잘 먹는다. 독감에 걸려 약을 먹는 바람에 입맛이 없는 와중에도 파김치에 밥을 먹는다. 아픈 나의 아들에게도 이 김치가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얼른 씩씩하게  학교에 가고 축구도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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