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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May 13. 2019

텃밭 도시락

다시 꿈꾸다

"엄마는 꿈이 뭐예요?"

"어?"

"엄마는 꿈이 뭐냐고요."

나는 할 말을 잃고 당황했다. 수세미를 꼭 쥐고 냄비 바닥을 닦아내던 손이 고무장갑 안에서 스르르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내 꿈? 나의 꿈?

세상에!!!

나는 더 이상 꿈꾸고 있지 않았다.


늘 무언가 애쓰며 살았다. 그것이 되기 위해, 더 나은 나를 위해 언제나 시간표를 만들어 계획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결심만 하면 못 해낼 것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의지를 굳세게 밀고 나갔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오고 겨울이 시작되는 찬바람이 불 때 이유 없이 몸이 아팠다. 생리통이 오래 지속되는 것처럼 엷은 몸살기가 온몸에 흐르는 것 같았다. 몇 개월 동안 그랬다. 몸의 에너지가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듯 시들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체력이 강하고 힘이 센 사람인데 찬바람을 고 바람 든 무처럼 서걱거렸다. 그리고 몸이 힘드니 무언가를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애써서 무언가를 해나가는 것이 번거로웠다. 나의 모든 에너지는 강한 체력에서 나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오늘을 담보해 낸 내일을 만들기 위해 애쓰지 않기로 했다. 꿈이란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것인데 나는 오늘의 이곳에서 편하고 싶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란 몸의 힘이 빠지는 것인 듯하여 의기소침해졌다.    

 

내 강철 체력은 아마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젊은 유전자 덕분인 듯하다. 아버지가 스물넷, 엄마가 스물 하나에 나를 낳으셨다. 반면 칠 남매 막내인 남편은 시어머님이 사십이 다 되어서 낳으셨다. 남편은 어디가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자잘하게 자주 아프고, 약골이기는 커녕 몸이 탄탄한데 어느 순간 지쳐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일인용 체력이라고 부른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에 딱 알맞은 체력만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농부나 군인이 되었어야 했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체력과 책임감이 강한 나에게 농부나 군인은 참으로 딱 맞는 직업이라고 느꼈다. 아이들과 너프건 총싸움을 하던 남편이 일인용 체력을 다 방전하고 소파에 널브러지자 아이들이 달려들어 총싸움을 계속하자고 남편을 조른다. "엄마하고 해. 엄마는 군인이 되고 싶었대"라고 장난처럼 웃으며 너프건을 나에게 내민다. 아무리 너프건이라고 해도 총 따위 만지고 싶지도 않다. 그럼 군인은 아닌 걸로. 그렇다면 농부가 되었어야 했었나? 대학시절 농활을 가면 나는 늘 일 잘하는 힘센 여학생이었다. 삽으로 고구마 모종을 심는 비닐 위에 흙을 척척 퍼 얹고, 바람이 세게 불어 벼가 누워 있는 논에 들어가 낫으로 싹싹 벼를 잘도 벴다. 왜 그때라도 농부가 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다른 것을 꿈꾸고 있었고, 결국 지금 그 꿈과는 또 다른 곳에 와 있는데 말이다.


작년 다섯 평이 채 되지 않는 밭을 일 년에 십만 원의 임대료를 내고 빌려 처음 농사를 지었다. 그곳은 친환경 농업을 하는 영농법인에서 임대하는 텃밭이었는데, 농약과 비닐,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너무 일찍 심은 고추와 가지 모종이 얼어 죽기도 하고, 거름을 잘못 주는 바람에 상추가 모두 말라죽기도 했다. 그러나 꽤 열심히 했다. 걸어서 사십 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텃밭에 주말 아침마다 걸어가 잡초를 뽑고, 그 작은 밭에 많은 것을 심었다. 고추와 콩에 생기는 노린재라는 벌레를 잡기 위해 천연 농약도 만들어 뿌리고, 새들이 쪼아 먹지 못하게 토마토에 그물도 씌워 주었다. 덕분에 감자며, 상추, 부추, 대파, 고추, 가지, 토마토를 무농약으로 추수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어린 잎사귀들은 내가 애쓰는 대로 예쁘게 크고 있었고, 흙을 갈아엎고, 풀을 뽑고, 밭에 물을 주는 노동의 즐거움도 컸다. 밭에서 기른 먹거리로 밥상을 차리는 것도 좋았다. 대파의 뿌리는 작년 한 해 밑국물을 우려내는 재료가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가지는 여름 내내 가지볶음으로 상에 올랐으며, 아이들과 함께 수확한 감자로 감자 크로켓을 만들었다. 새들로부터 지켜낸 토마토는 토마토 스파게티며 카프레제 샐러드를 만들어 근사한 상을 차릴 만큼 실했고, 푸성귀는 우리 식구가 다 먹지 못해 지인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풍성했다.


그렇게 작년 한 해는 텃밭 농사와 함께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꿈꾸고 있었다. 농부가 되어 흙을 포슬 하게 만들고 어린잎들을 길러내고 싶었다. 몹시도 그러고 싶었다. 밭에서 땀 흘려 일할 때 내 몸이 다시 건강해지는 듯했다. 햇볕을 받으며 땅을 밟고 서 있으면 내가 마치 식물이 되어 태양으로부터, 땅으로 부터 에너지를 얻는 듯했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해도 몸속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지는 듯 오히려 기운이 넘쳤다.


지난해 둘째의 봄소풍. 마침 직장이 쉬는 날이라, 둘째 도시락을 예쁘고 싸주고 남은 재료로 나를 위한 김밥도 쌌다. 아이들을 모두 학교로 보내고 나도 양은 도시락에 김밥을 담아 시원한 맥주 두 캔과 물을 챙겨 텃밭에 걸어갔다. 오월의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풀을 매고, 벌레를 잡고, 천연 농약을 뿌리고, 물을 주었다. 한 낮이 되어 산그늘이 드리운 평상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맥주까지 마시저녁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에너지가 충전되고 힘이 나는 하루였다.


그러나 올 해는 텃밭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사실이 가슴 아리도록 무척 슬프다.) 경칩을 며칠 앞둔 어느 주말 오후, 나는 작년 늦가을에 심어둔 마늘과 양파의 어린싹이 자라는 나의 밭 옆에 하나의 밭을 더 하기로 하고 삽으로 그 밭을 갈아엎고 있었다. 그런데 밭 한쪽 귀퉁이가 연못에서 흘러나온 물 때문에 흥건해져 질퍽거리고 있었다. 밭이라기보다 물을 댄 논 같았다. 그래서 조합 사무실에 전화해서 사정을 말하고 처리해 주십사 했더니 알겠다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운영진 중 높은 분이 내게 전화해서는 반대편 밭을 사용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밭은 농약을 사용하는 아주머니 밭 옆이라 내가 싫다고 했다. 그리고 농약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으니 관리를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더니 자기들은 물이 나오는 밭을 어쩔 수 없으니, 밭을 하려거든 하고 말려면 말라고 퉁명하게 말했다. 순간 화가 났다. 물이 나오는 밭에 돌멩이 몇 개 놓아주는 시늉만이라도 했더라면 고맙다고 물이 나오는 밭이지만 어떻게든 단속하며 정성을 쏟았을 텐데.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밭에 온갖 정성과 노력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있는데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꺾어버리다니 화가 나서 며칠 뒤 전화해 두 개의 밭 모두 하지 않겠으니 사용료로 입금한 돈을 환불받고 싶다고 했다. 도대체 왜 그러시냐고 했지만 나는 이러저러한 내 마음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결국 환불을 받고 삽과 호미며 천연 농약 뿌리는 분무기 같은 것이 든 큰 통과 고춧대와 토마토 지지대를 차에 싣고, 내가 일 년 동안 포슬포슬하게 만들어 놓은 그 밭에서 영영 철수했다. 아직도 내 차에 그것들이 모두 실려있다.


그리고 후회했다. 참을걸. 그냥 그 밭에 농사를 지을걸. 날이 점점 따듯해지고 이때쯤 고추를 심어야 하는데, 토마토를 심어야 하는데, 언제나 우아한 모습의 가지도 이제는 심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마른침을 삼킨다. 허전한 마음이 초겨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스산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농부가 되기를 꿈꾼다. 농사지을 손바닥만 한 땅도 없지만 여전히 나는 농부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이제 나는 나의 꿈이 뭐냐고 묻는 내 아이에게 말할 수 있다. 엄마의 꿈은 농부가 되는 것이라고. 이른 새벽 일어나 이슬을 맞으며 밭을 매고, 소박한 아침 밥상에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고. 뜨거운 볕을 피해 낮에는 책을 읽고, 한낮의 해가 스러지면 다시 들에 나가 푸성귀 사이로 올라오는 흙냄새를 맡고 싶다고. 그리고 밤이 되면 고단한 몸을 평상에 누여 쏟아지는 별을 보면서 내일의 노동을 계획하고 싶다고. 직업으로서 농부는 되지 못했지만 농부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고. 그것이 엄마의 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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