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국을 좋아한다. 초록의 빤딱빤딱한 잎과 작고 여린 꽃잎들이 모여 큰 꽃송이를 이루고 있는 그 풍성함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내 유년의 마당, 그 마당의 수돗가에 자라던 수국나무의 풍성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웃음과 한숨, 그 아련한 기억이 좋다.
여기저기 뭉개진 어렴풋한 느낌을 지나, 나의 가장 또렷한 기억의 처음은 그 마당이다. 그 마당의 한쪽에 수국나무가 크게 자라고 있었고 그 옆이 바로 수돗가였다. 나는 빨간색 무른 흙덩이를 딱딱한 돌멩이로 빻고, 수국나무 이파리를 물에 씻어 손으로 찢는다. 빻아놓은 빨간 흙가루를 수국나무 이파리에 묻혀 "이건 김치야"라고 상상의 친구에게 혼잣말을 하고, 감나무 가지를 부려 뜨려 만든 젓가락이 얌전히 놓여있는 돌판 위에 놓는다. 그 순간 "저리 비켜!" 거친 발길질이 내가 차려놓은 소꿉놀이 밥상을 엎지른다. 안집 민정언니다. 나는 화가 나서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주어 노려본다. 나의 서슬퍼른 눈흘김에도 아랑곳없이 민정 언니는 내가 더 이상 덤비지 못하는 그 레퍼토리를 또 시작한다. "여기는 우리 집이야. 이것도, 이것도, 저기 저것도 다 우리 꺼야! 딴 데서 놀아!"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세상 억울한 이 일을 이르지 않는다. 그랬다간 이 상황에 속이 상한 엄마가 나를 달래거나 위로하기는커녕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냐고 나를 더 혼낼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소꿉놀이는 포기하고 옆집 대규랑 그 집 단풍나무 아래 평상에서 공기를 하려고 대문을 나선다. 아마도 나는 다섯 살이었나 보다. 다섯 살 평생 나에게 그렇게 심술 맞은 사람은 민정언니가 처음이었다.
산골짜기 면사무소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읍내로의 이사가 탐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지역 공무원 임용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 아버지를 산골짜기 면으로 발령 낸, 학연과 혈연으로 얽힌 읍내의 기득권이 포진한 군청으로의 입성이 자존심 센 아버지에겐 썩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를 경험한 엄마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당신 자식들을 겨우 하루에 두어 번 버스가 다니는 산골에서 기르는 것은 자식의 성공을 위해 부모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설득한 엄마는 결국 아버지를 군청으로 전보발령을 받게 하고, 국도변을 따라 작은 번화가가 자리 잡은 읍내의, 살림집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곳에 전셋집을 얻었다. 그러나 그 집엔 민정 언니가 있었다. 볼이 퉁퉁하고 눈썹이 일자로 자란 주인집 막내딸 민정 언니는 자식을 위해 읍내 입성을 계획한 엄마에게 최고의 복병이자골칫거리였을 것이다.
그 마당은 세 집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주인집인 안집과, 그 집의 문간방에 부엌을 들여 만든 방에 세 들어 사는 진주네, 그리고 세를 들이려 일부러 만든 것이 분명한 우리가 사는 아래 채. 이렇게 세 집이 마당을 함께 쓸며 서로의 살림살이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서로의 부엌에서 밥 끓이는 냄새를 맡아가며 매일 아침을 함께 맞이하고 있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시내에서 양복점을 하는 인품 좋은 중년의 아저씨였고, 그 댁 아주머니는 그 아저씨 그늘에서 삼 남매를 잘 건사하고 윤기 나는 살림살이를 반짝반짝 빛내는 강원도 말씨를 쓰는 분이셨다. 두 분 모두 마음씀이 참으로 깊은 분들이셨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우리 집 부엌에 물이 차올랐다. 부엌에 차오른 물이 연탄아궁이를 적시고, 부뚜막 절반까지 올라오면 주인 내외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당신 집에 와서 잠을 자고 밥을 먹으라고 했다. 한 번은 나와 내 동생이 주인아저씨가 아끼는 포도넝쿨의 포도알을 여기저기 따먹어 포도송이를 못쓰게 해 놓고, 야단맞을까 어쩔 줄 몰라 이 골목 저 골목 걸어 다니다 다 저녁이 되어서 대문을 들어섰던 적이 있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우리를 야단치려고 그 대문을 지키고 서 있다가 우리의 기죽은 얼굴을 보고는 "이놈들!!!" 이 한 마디로 모든 걸 덮으셨다. 아마도 자존심이 세고 자식 훈육에 엄한 우리 엄마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터에, 우리 남매가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맞을 것을 걱정하여 그 한 마디로 모든 사건을 덮었을 거라 나는 짐작한다. 그 마당에 이사 온 첫 해까지도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주인댁 아저씨는 우리 남매 이름을 부르며 "테레비 보러 오너라"하셨다. 엄마는 어린 동생까지 남의 집에 보내는 것이 마음에 쓰였는지 늘 내 등만 떠밀어 가라고 했다. 나는 코바늘로 뜨개질한 레이스로 감싼 쿠션에 몸을 기대고, 오렌지 가루를 물에 녹인 주스에 설탕이 박힌 비스킷을 먹으며, 코마네치가 평균대 경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옆 방에서는 주인집 맏아들이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민병철 영어를 따라 하고, 주인집 두 딸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다.
엄마는 진주네 아줌마와 친 자매처럼 지냈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낯선 동네로 이사 와,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같은 처지의 진주네 아줌마를 친동생처럼 여겼다. 갓난쟁이 진주에게 매달려 진주네 아줌마가 꼼짝 못 할 때, 방금 무친 나물을 저녁상에 놓으라고 한 접시 갔다 주고, 진주네 연탄불이 꺼지면 우리 집 활활 타는 연탄을 가져다 연탄불을 살려놓곤 했다. 단 한 번 엄마가 진주네 아줌마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진주네 아저씨가 나에게 담배심부름을 시킨 게 화근이었다. 아저씨는 육백 원을 주고 오백 원짜리 솔을 한 갑 사고, 백원은 심부름 값이니 나더러 가지라고 했다. 평소에 농담 잘하고 허풍은 셌지만 사람 좋은 아저씨였다. 나는 '백 원으로 뭘 할까' 좋아라 하며 얼른 가게에 가 담배를 한 갑 사 손에 들고 집으로 뛰어들어 왔다.(지금은 어린아이에게 담배를 팔지 못하게 하지만 그 시절은 그런 게 아무것도 아닌 때였다.) 그런데 그런 나를 엄마가 보고는 기겁을 하고, 내 손에서 담배를 뺏어가 진주네 아줌마에게 "다시는 이런 일 우리 애한테 시키지 말라고 신랑한테 단단히 알아듣게 말하게"하며 담배를 던지다시피 진주네 아줌마 손에 쥐어줬다. 진주네 아줌마는 평소와 다른 엄마의 무뚝뚝한 말투에 놀라고 당황하여 미안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엄마가 진주네 아줌마에게 싫은 얼굴을 한 것은 그 날 단 하루였다. 그다음 날부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여느 때처럼 수국나무 풍성한 수돗가에서 함께 빨래를 하고, 푸성귀를 다듬으며 무슨 이야기인지 재미있게 깔깔 웃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시원한 지하수를 길어 올린 물에 참외를 담가놓고 "진주야! 진주 잘 때 얼른 참외 한 개 건져 깎아먹어라" 그랬다.
초여름의 햇살이 잠자리 날개처럼 반짝이는 날 엄마는 그 수돗가에 앉아 배추를 다듬어 절이고, 초록파를 씻어 김치를 버무렸다. 큰 스테인리스 대야 하나 가득 버무린 김치를 엄마는 모두 다 김치통에 담지 않았다. 대야에 김치를 얼마 정도 남겨놓고 "진주야, 밥 한 공기 가져오너라" 하고서 우리 집 밥통에서도 밥을 가져왔다. 막 버무린 김치에 밥을 비벼 엄마와 진주네 아줌마, 다섯 살의 나, 세 살배기 남동생이 김치 대야에 빙 둘러앉아 숟가락질을 했다. 북적거리는 소리에 안집 민정언니가 문을 열고 나오고, "민정아 너도 이리 와서 같이 먹자" 하면 먹성 좋은 민정언니가 냉큼 달려와 함께 빙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러면 안집 아주머니가 "우리 민정이 여기 있었네" 하며 소쿠리 가득 삶은 감자를 내와 김치와 함께 먹었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밥을 마치 잔칫날처럼 북적거리며 행복하고 맛있게 먹었다.
엄마가 그 수돗가에 앉아 배추를 절이고 있으면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모두 숟가락을 들고 나와 떠들썩하게 웃고 한바탕 잔치와 같은 식사를 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여름의 햇살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날, 수국이 탐스럽게 핀 수돗가. 막 버무린 김치에 밥을 비벼 함께 먹던, 소박하지만 정다웠던 우리들의 숟가락.
이제 내가 그 시절 엄마 나이가 되어 여름김치를 담는다. 내 어린 시절 수국 탐스럽게 핀 떠들썩한 수돗가, 아름답게 반짝이던 여름 햇살, 정겨웠던 우리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