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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May 20. 2019

월급날 푸짐한 저녁

매운 등갈비찜

이번 달은 지출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달 월급이 더 반갑다. 물론 월급은 내 은행계좌에 숫자로 잠시 머물다 카드대금으로, 아이들 학원비로, 그 어딘가 돈 들어가는 곳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래도 월급날이 되면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출근하기 싫었던 그 모든 아침이 백분의 일 정도는 보상받는 것 같아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치킨을 시켜 먹자고 하면 쏘 쿨하게 "오케이! 먹고 싶은 걸로 시켜!" 한다. 이러려고 돈을 버는 것이다. 아이들 먹고 싶은 거 사주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함을 즐기기 위해. "자본주의가 이렇게 편리하고 무서운 겁니다"는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가 생각나는 타이밍이다.


어렸을 적, 한 달에 한 번 아버지는 누런 월급봉투를 엄마에게 건네셨다. 엄마는 그 봉투를 소중히 받아 들고 또 다음 한 달을 기다렸다. 친정아버지는 칠 남매의 맏이다. 막내 삼촌과 나는 겨우 세 살 차이다. 아버지와 결혼하여 엄마는 올망졸망한 여섯 명의 시동생과 시댁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산골짜기 면소재지의 면서기로 발령이 나 살림을 분가해 나올 때, 할머니는 수저 두 벌을 겨우 챙겨주실 정도로 형편이 어웠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버지와 이제 단촐한 자기 살림을 꾸릴 수 있어 그저 행복했다고 했다. 따로 부엌이 없이 툇마루 옆에 석유곤로를 하나 두고 밥을 끓여 먹는 셋집이었지만, 젊은 부부의 하루하루는 여느 신혼처럼 달콤했을 것이다. 한 달에 한번 아버지가 들고 오는 월급봉투는 얇디얇았고, 그마저도 엄마의 손에 쥐어지는 게 얼마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월급이 삼촌들 학비로 시댁 생활비로 보내지고 빠듯한 살림을 살고 있을 때 내가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나의 유년이 가난하다고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사랑을 무척 많이 받았다. 듬직한 맏아들, 하늘 같은 큰 오빠, 큰 형의 첫 아기. 그게 나였다. 내가 계집아이였음에도 나는 사내아이가 아니어서 받는 서러움을 받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남동생에게는 없지만 나에게는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돌사진이다. 칠십 년대 중 반, 아직도 사진관에 가서 돌사진을 찍는 것은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호사스러운 일이었던 시절이었다. 도시에서 이제 막 공장을 다니기 시작한 큰 고모가 잔 꽃무늬가 있는 레이스 원피스와 같은 천으로 맞춤한 레이스 모자를 사 와, 식구들이 우르르 나를 데리고 사진관에 가서 돌사진을 찍었단다. 물론 전적으로 내 느낌이지만, 돌 사진의 나는 가난 따위 발아래에 놓고 있는 듯 당당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나는 사랑을 듬뿍 받았다. 고모들은 서로 나를 엎고 나가려 했고, 엄마가 늘 목욕을 시켰던 어린 막내 삼촌까지도 나를 예뻐했다. 한 번은 둘째 고모가 나를 엎고 정월 대보름날 쥐불놀이하는 것을 구경 갔다 불덩어리가 포대기에 떨어진 줄 모르고 있다 돌아와 할머니가 그걸 보고는 놀라고 화나셔서 부지깽이로 고모를 흠씬 두들겨 팼다고 했다. 고모는 두들겨 맞아서 아픈대도 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울었다고 지금도 나를 보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내가 초등학교 이 학년, 큰삼촌이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린이 날 즈음에 큰삼촌이 학교로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담임선생님께서 그 편지를 반 친구들 모두 앞에서 읽어 주셨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친정 부모님의 헌신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 형제니 당연하게 그 수고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모든 수고로움의 구체적인 고통은 엄마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자식의 교육에 만큼은 빠듯한 살림살이의 티를 내지 않았다. 물론 풍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지 못했다. 대학이 있는 서울에 가서야 잘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에 나의 풍족하지 않음이 가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음에도 자식 공부시키고 뒷바라지하는 것에는 열심이었던 엄마는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은 모두 "알겠다. 열심히 해라" 하시며 지원해 주셨다. 그런데 단 한 번, 나는 엄마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고집이 센 나도 어서 학교 가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나는 아마 4학년이었나 보다,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었고, 그 날은 학교에서 받아보는 어린이 신문 값을 내는 날이었다. 왜 엄마가 돈을 주지 않는지 몰랐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계속 학교에 가지 않고 버티고 있자 엄마는 너무 화가 나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바닥에 던지고는 어서 들고 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나는 신문값만 주워 들고 학교로 가면서 엄마를 원망했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는 신문을 보지 않겠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아직까지 엄마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왜 천 몇 백 원 그 돈을 안 주고 화를 내고 있었는지. 아마 엄마는 당신이 그랬다는 것을 기억도 못할 것이다. 지금은 천 몇 백원이 정말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1985년 그때는 자장면 한 그릇이 500원이었을 때이니 지금보다는 큰돈이었을 것이다. 아마 엄마는 주머니에 있던 그 돈이 엄마가 가진 전부의 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며칠 후면 아버지의 월급날이니 그 돈으로 찬거리를 사며 월급날까지 버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신문값을 달라고 조르니 화가 났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 날의 아침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 본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원망하며 학교에 걸어갔던 초등학교 사 학년 여자 아이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싶다. 엄마가 가진 돈의 전부를 너에게 준거라고. 그러니 원망 말고, 속상해 말고, 감사하라고.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텔레비전을 보니 "나 혼자 산다"에 박나래가 나와 매운 등갈비찜을 해 먹는 게 나온다. 늦은 밤인데도 식욕이 돈다. 오랜만에 등갈비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푸짐하게. 월급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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