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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Sep 08. 2019

밥통에 밥이 없으면 스테이크, 지극히 개인적인 메뉴선정

현미밥을 포기해... 그럴 순 없어

써놓고 보니 참 재수 없는 제목이다. 밥이 없으면 스테이크를 먹으라니. 마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말했던 프랑스의 왕비처럼 참으로 포시랍기 그지없는 말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냉장고에 재료만 있다면 스테이크가 오히려 현미밥보다 더 마음 편한 메뉴다. 만드는 시간이 더 짧기 때문이다. 현미밥을 짓는 시간은 한 시간, 스테이크는 접시에 담아 차려내는데 넉넉잡아 삼사 십 분이다. 시간에 쫓기는 워킹맘에게 때로는 스테이크가 현미밥보다 더 만만한 메뉴다. 현미밥을 짓고 방금 한 따듯한 반 찬 한 가지에 밑반찬으로 식탁을 차려내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렇다면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자기 자신에게도 시간을 쏟고자 하는 워킹맘에게는 현미밥과 국이나 찌개, 찬으로 이루어진 한 끼의 상을 차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가? 짓는데 한 시간이 걸리는 현미밥 상에 올리는 것은 똑똑하지 못한 것인가?


내가 요즘 가장 신경 쓰는 하루의 일과는 헬스장에서 하는 한 시간의 운동이다. 작년 11월에 1년 치를 등록하고 1년을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몸을 움직여 땀을 내면서 내 몸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의 방해 없이 온전히 나의 몸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행복한 일인 동시에 참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아이 둘에, 손이 많이 가는 남자와 함께 살며,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여 일하는 여자 사람으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점점 게을러지려고 하는 나 자신도 채근해야 한다. 보통은 퇴근을 하고 곧바로 헬스장에 가 1시간 동안 운동을 하는데, 사무실에서 주차장까지 가는 그 5분의 시간 동안 운동이 하기 싫어 게을러지는 나 자신과 사투를 벌인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너무 더우니까, 아이의 준비물을 챙겨야 하니까 등등의 수많은 변명거리를 만들어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다 이겨내고 적어도 1주일에 5일 이상은 헬스장에 나가(운동은 헬스장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헬스장에 가는 것이 그 날 운동의 90%는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무거운 아령을 들고, 스트레칭을 했다. 변한 나의 몸을 다른 이들이 알아봐 줄 때, 맞지 않았던 옷이 내 몸에 착 감겨 옷 태가 날 때 참으로 기분이 좋다.


그렇게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니 저녁 먹는 시간이 1시간 늦어졌다. 운동하느라 저녁이 늦어져 무척 미안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아니면 밤에 헬스장에 가야 하는데 남편이 야근하는 날에는 막내 혼자 집에 두고 갈 수가 없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 차리는 시간을 되도록 줄일 수 있게 준비를 해둔다. 주말에 두어 가지 밑반찬을 만들어 놓고, 멸치 다시마 밑국물도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많이 먹는 당근, 양파, 감자, 파, 달걀은 떨어지지 않게 장을 봐놓는다. 그러면 운동하고 돌아와 찌개를 끓이거나, 생선을 굽고, 하다못해 달걀말이라도 하나 부쳐 방금 한 따끈한 것을 밑반찬과 함께 빠르게 차려낸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신경 써서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하는 것은 밥이다. 우리는 현미밥을 먹는데 현미쌀로 전기밥솥에 밥을 하려면 1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전 날 밤이나 아침에 미리 밥을 안쳐놓고 예약 버튼을 눌러 놓고 출근을 한다.


그런데 오늘 저녁 밥통에 밥이 없다. 어제 먹고 남은 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 이럴 때를 준비해 '백미쾌속' 버튼을 누르면 금세 밥이 지어지는 흰쌀도 사놓는데 오늘은 이마저도 없다. 밥이 가장 중요하다. 반찬이 없어도 밥만 있으면 카레나 짜장을 끓여도 되고, 야채를 넣고 볶아도 되고, 이도 저도 없으면 김치볶음밥이라도 할 수 있는데 밥이 없다니 낭패다. 마침 냉장고에 남편이 세일한다고 사다 놓은 미국산 스테이크 고기가 있다. 고기를 꺼내 키친타월로 핏물을 닦고 가장자리의 기름기를 제거한 후 소금, 후추, 바질 가루를 뿌려 한 곳에 두고, 야채 바구니에 감자 네 알을 꺼내 껍질을 벗겨 작은 크기로 잘라 물에 넣어 삶는다. 감자가 삶아지는 사이 스테이크 소스에 마늘 슬라이스와 꿀, 굴소스, 데리야끼 소스, 물을 넣고 졸인다. 소스가 어느 정도 걸쭉해지면 토마토를 슬라이스하고 양송이버섯을 손질하여 구울 준비를 한다. 다 삶긴 감자는 으깨, 우유와 마요네즈 소금 후추를 넣고 섞어놓고, 팬을 달궈 없는 버터 대신 올리브유를 팬에 둘러 야채를 먼저 굽고 스테이크 고기를 구워낸다. 고기를 굽는 시간은 7분. 너무 세지 않은 불에 4분 굽고 뒤집에 3분을 더 구워주면 미디엄 웰던으로 아주 연하다. 남편이 잘 먹었다고 다정하게 말하며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가 정리하고, 먹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은 막내도 입안 가득 고기를 씹는다.


현미밥이 없어 스테이크를 굽고, 야근하지 않는 남편이 함께 앉아 있는 저녁 식탁은 더욱 신경 쓰는 나. 이렇게 밥상에 신경 쓰는 나를 느낄 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처음 달린, '참 피곤하게 산다'는 댓글이 생각난다. 꼭 현미밥으로 밥상을 차려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매일 우리 집 식탁에 와 밥상을 검사하는 것도 아닌데, 소홀한 밥상 앞에서 내가 해야 할 바를 못 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든다. 오직 나만을 위해 쓰는 시간이 미안해서, 나에게 집중하느라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소홀하게 되는 게 마음이 쓰여 나는 아마 밥상에 집착하는 모양이다. 그런 '미안함, 죄책감 따위 개 가져가 버려!'라고 스스로에게 소리치지만 나는 이렇게 생겨 먹었나 보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흰쌀을 사러 가야겠다. 현미밥이 없을 때 '백미쾌속'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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