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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Sep 24. 2019

호떡이 필요해

불안을 털어내는 캠핑

태풍이 오고 있다. 바람이 거세고 비가 세차게 몰아친다. 이십 층 우리 집 오래된 베란다 문이 바람에 흔들린다. 화가 나 으르렁거리는 듯한 바람소리가 거칠게 실내로 휘몰아 들었다 다시 또 올 거라는 여운을 남기며 어딘가로 스며든다. 남편은 휴일이지만 회사에 나가고, 나와 아이들만 집에 있다. 또 한 번 사나운 바람이 문을 거칠게 흔들며 으르렁거린다. 베란다 문의 유리가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베란다 문틈 사이로 남편이 일러 준 대로 상자에서 뜯어낸 종이를 끼워 넣는데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이 태풍에 집과 저 아이 둘을 온전히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무거워진다. 그리고 무섭다. 창밖 저 아래에서는 여전히 거센 바람을 따라 미친 듯이 흔들리는 나무 위로 검은 비가 쏟아진다. 태풍이 어서 지나가기를.


작은 아이가 베란다에서 걱정스럽게 있는 내게 다가와 "엄마 내가 도와줄까요?"라며 재활용 바구니에서 상자를 꺼내 들고 묻는다. 내가 너무 허둥거리고 있었나 보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이 불안하다. 나는 크게 웃으며 아이의 볼을 쓰다듬어 준다. 괜찮다고, 이제 태풍이 지나갈 거라고, 이 태풍이 지나면 가을이 시작될 거라고, 가을이 오면 또 캠핑을 가자고. "캠핑? 언제요?" 신나서 깡총거리는 아이의 눈에서 불안이 사라지고 생기가 돋아난다. 재잘거리는 아이를 보니 나도 태풍이 이미 지나간 듯 안심이 된다. 그리고 나 역시도 캠핑이 기다려진다. 올 해는 남편의 출근 스케줄이 바뀌고,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는 바람에 캠핑을 거의 갈 수 없었다. 시월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겨우 두 번 캠핑을 다녀왔을 뿐이다. 지금쯤 숲 속 축축한 나무 언저리에서 버섯이 빼곡히 돋아나겠지. 숲 냄새가 그립다.


작은 아이가 다섯 살이었고 성탄절 다음날이었다. 앞에 큰 저수지가 있는 캠핑장으로 캠핑을 갔다. 원래 낮은 산비탈의 과수원이었던 곳을 캠핑장으로 만들어 깔끔하게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겨울용 거실형 텐트를 치고 일찌감치 저녁을 해 먹었다. 일찍 찾아온 산골의 밤, 무거운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었다. 남편이 단조 팩을 망치로 깊이 박아 텐트를 꼭 고정시켜 놓았는데도 텐트가 통째로 뽑혀 날아갈 것같이 바람이 거셌다. 검은 어둠 속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텐트 안에서 자꾸만 바람 펄렁거리는 불안한 마음을 모른 척하고 잠을 자려고 하는데 몰아치는 바람 소리 사이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깔려있는 자갈을 밟는 소리로 미루어 우리 텐트 안에 누군가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나는 무섭다기보다 화가 났다. 캠핑 다니다 별 더러운 꼴을 다 당한다 싶어 침입자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뭐 할 짓이 없어서 이 밤중에 이 산속에 남의 텐트에 와서 자갈을 저벅거리고 있는가 말이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데 또다시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들렸다. 이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남편을 흔들었다. 남편도 이미 소리에 놀라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눈 빛을 교환하고 남편이 비장하게 이너 텐트의 지퍼를 열고 나갔다. 나도 얼른 뒤따라 나갔다. 그런데 험상궂게 생긴 도둑은 없고 고양이 한 마리가 천으로 된 찬장에 넣어 둔 국물용 멸치를 먹으려고 찬장을 발로 마구 긁고 있었다. "뭐야? 고양이잖아!!!" 황당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험상궂은 도둑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도둑을 만나기 직전의 분노와 공포를 이미 경험한 우리는 정말 허탈했다.


도둑으로 오인한 고양이 소동을 겪은 다음 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고 파랬다.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니 어젯밤 그 바람 속 소동이 꿈인 듯했다. 아침을 해 먹고 텐트 앞에 앉아 겨울 햇살을 즐겼다. 햇살이 몸에 닿는 따뜻함이 좋았다. 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보여 식구 모두 산책을 갔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저수지는 꽤 컸다. 둘레에 나 있던 선명하게 보였던 길도 막상 가보니 잡목이 우거지고 길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산 쪽으로 난 길을 걸어 저수지까지 걸어 내려갔다 다시 그 길로 걸어 올라 오기로 했다. 작은 아이와 내가 앞장서 걸어오고 큰 아이와 남편은 뒤에서 땅에 떨어진 땔감용 나무를 주우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캠핑장 근처까지 온 것 같은데 길이 없어졌다. 잘못된 길을 따라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남편과 큰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겠다 생각하고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데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 소나무 사이로 말라버린 풀 나무를 헤치고 작은 아이와 간신히 걸어와 드디어 캠핑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남편과 큰 아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찾으러 가자니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또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핸드폰은 연결이 되지 않고 속만 탔다. 그렇게 한 삼십 분이 지났을 때 몹시 지친 얼굴의 남편과 큰 아이가 돌아왔다. 얼마나 반갑던지 달려가 덥석 끌어안았다.


"엄마, 아빠랑 길 찾다가 산을 넘어갈 뻔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자기야, 하마터면 조난당할 뻔했어."

우리 모두 너무 놀라고 힘들고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무슨 일인가 싶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져간 호떡 믹스로 호떡을 만들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따뜻하고 달콤한 호떡이 들어가니 드디어 놀란 가슴이 진정되고 서로서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놀랐는지 마구 마구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틀 연속 사건 사고를 겪은 그 캠핑장을 우리는 두 어번 더 갔다. 냉이가 캠핑장에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마트에서 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냉이 향을 즐기기 위해. 갈 때마다 우리를 놀라게 했던 고양이와 산속에서 조난당할 뻔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이는 저수지. 겨울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십이월의 어느 오후 저기 왼쪽 산에서 우리는 길을 읽고 한참을 헤맸다.


태풍이 여전히 근처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자정이 지났는데 아직도 바람이 거세다. 이십층 우리 집 베란다 유리문이 세게 흔들린다. 나는 캠핑을 가서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자는 것이 좋다. 아파트 높은 곳에 사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게다가 오늘은 바람까지 이렇게 무섭게 들이치니 더 불안하다. 산속에서 조난당할 뻔한 우리의 놀란 가슴을 달래주었던 그 날의 호떡이 생각난다. 오늘의 나의 불안을 달콤하게 진정시켜 줄 것만 같다. 이 태풍이 지나면 아름다운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이십층 아파트에 살면서 느끼는 불안감을 눈부신 가을 햇살에 말려 털어내고 싶다.




작은 아이 다섯 살 때 모습이다. 지금 이 아이는 훌쩍 커서 저 통통한 볼을 잃었고, 안경을 끼고 있다. 처음 안경을 끼게 되었을 때 어찌나 속상하던지. 캠핑이 십 년째로 접어들고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큰 아이를 보니 작은 아이 더 크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캠핑을 가고 싶다. 큰 아이 때는 몰랐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줄... 이 태풍이 지나면 가을이 올 것이다. 잠자리 날개에 반짝이는 햇살을 뿌리며. 그 햇살을 받으며 텐트를 튼튼하게 치고 이 아이와 함께 배드민턴을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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