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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Sep 29. 2019

사표를 던지고 싶을 때 로또를 산다

남편과 함께 마시는 금요일 밤 쏘맥

한 밤 중에 침대에 누워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너무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하다.


관리자는 비상식적인 프로젝트를 지시를 하고, 그 프로젝트를 억지로 떠맡은 팀장은 현실적으로 그 일을 하기 힘든 팀원들과 역시나 그 프로젝트를 하기 싫어하는 다른 팀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협의된 내용이 아니라 불만을 덮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이야기만 하다 프로젝트 마감이 촉박해지니 정색한다. "이렇게 하기로 협의된 거잖아요!!! 자기 일 아니라고 생각했죠?"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다른 팀 팀장에게 "저는 여기까지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그쪽에서 하셔야죠"라고 말했다 관리자와 팀장 다른 팀 모두에게 싸기지 없고 성격 더러운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일은 모두 우리 팀이 다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 팀 모두 풀이 죽은 어깨로 퇴근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 본다.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은 그냥 내가 그 일을 온전히 다 하기를 바랐던 것인데 나만 그걸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두 다 내 업무라고 말했어야지 그런 건 또 아니라고 했으면서. 후회한다. 그렇게 말하지 말걸. 내 생각 같은 건 그냥 내 머릿속에서 하고 말로 뱉어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내가 너무 나댔나 보다. 메가톤급으로 늘어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일하는 사무실의 정적을 무겁게 느끼며 우리 팀 다른 이들에게도 미안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밤 중 분노에 찬 눈동자를 부릅뜨고 있는 것뿐이다. 이렇게 직장에서 화가 날 때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지만 나는 사표를 던지는 대신 로또를 산다. 대단히 희박하지만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행운을 조심스럽게 한 장 산다. 그리고 멋지게 직장에 사표를 던지는 상상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한다. 그렇다고 답답하고 화나는 마음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한다.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정말 사표를 내는 일? 한 때는 내게 "내일 가서 당장 사표 내고 와!"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의 남편이다.


내가 직장에서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남편이 그냥 아무 말 없이 들어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 굳이 내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내가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과 행동을 꼬집어 준다. 굳이 그런다. 나는 그런 남편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 직장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남편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굳이 내가 직장에서 속상했던 이야기가 아니라도 해야 할 이야기가 많기도 하고 집에까지 와서 직장일을 떠올리기 싫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남편은 내가 직장에서 이런저런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 하면 "내일 가서 당장 사표 내고 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내가 고생하는 것이 마음 아파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고 "거봐. 그냥 집에 있어. 아이들 키우고 살림이나 해."로 들렸다. 남편은 내가 일하는 것을 마뜩잖아했다. 남편이 그런 식으로 말하니 나는 직장에서 힘들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돈 들어갈 곳이 많아지고 아이들이 크면서 남편은 어쩌다 내가 직장생활의 힘겨움을 하소연해도 당장 사표 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그럴 땐 이랬어야지."라고 나에게 가이드라인 비슷한 것을 제시했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누가 그런 줄 몰라서 이러냐, 그냥 좀 입 다물고 들어주면 안 되냐'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남편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해서 그런 말은 못 하고 "왜 이제는 사표 내라는 말은 안 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이제는 사표 낸다는 말을 농담처럼 해야지 진심으로는 할 수 없는 때가 되었나 보다. 삶의 무게가 진지하게 늘어난 것이다.


풀이 죽은 어깨로 퇴근해 운동할 마음이 전혀 아니었지만 내 기분에 상관없이 루틴으로 해야 하는 일이 운동이다 라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한 시간 땀 흘리고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를 맞고 마트에 가 장을 볼 기분이 영 아니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대충 스캔하고 남편에게 "오늘은 카레나 해 먹을까?" 했다. "아니야. 오늘은 나가서 고기 먹자." 한다. 어제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내가 나도 모르게 한 숨을 거칠게 내뱉었나 보다. "무슨 일 있어? 말을 않으니 무슨 일인지 알아야지"그런다. 그래서 오늘 고기를 먹으러 나가는 걸까?


남편이 쏘맥을 만들어 건넨다. 기가 막히게 맛있다. "와! 맛있다! 역시 술은 빈 속에 먹는 게 최고야!" 우리 둘 다 이렇게 말하고 크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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